197. 진심에는 진심으로 – 2.
쾅!
굉음과 함께 문이 닫혔다.
“... 저런···!”
“쯧쯧.”
윤종일 교수가 발끈하려다 말았고, 심남진 의장이 혀를 찼다.
소회의실 안에 있던 이들 모두가 인상을 쓰고 있는 가운데, 잠시 도훈 대신 사회를 봤던 은퇴한 교사 출신 남자가 중얼거렸다.
“... 저럴 거면서 봉사는 무슨.”
“그러게 말이에요, 이 선생님.”
남자의 말에 철학 강사 출신 위원이 공감하는 말을 하자, 좀 머쓱한 표정이 된 다른 위원이 입을 열었다.
“제가 너무 쏘아붙였나 봐요.”
“아니에요. 오 위원.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내용이잖아요. 자료에 있는 내용이고, 이 위원회 위원이 되겠다는 사람이 그랬다면 당연히 확인해야죠.”
퇴직 교사인 이 선생이 다독인 오 위원은 박사과정 중인 젊은 여성이었다.
조금 전 서태기가 버럭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 직전까지 그와 대화하던 게 바로 그녀였다.
젊은 위원을 다독인 이 선생이 도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장님, 오 위원이 질의한 내용이 확인된 것 맞습니까?”
“네. 확인한 겁니다.”
“누가 어떻게 했는지 물어도 괜찮습니까?”
이 선생이 되묻자 뒤쪽에 앉았던 영배가 일어서서 답했다.
“선생님. 확인은 저와 안준식 의원이 장민호 의원을 직접 만나서 했습니다. 서태기 의원이 장민호 의원 친척을 동원해 은밀히 부동산 거래를 준비하려 했다는 걸 장민호 의원이 인정했습니다.”
“확실한 거죠?”
“물론입니다, 선생님.”
오늘 위원들에게 제공된 서태기와 관련한 자료는 도훈이 비서실의 영배와 영진에게 지시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소스는 조상님이 서태기의 기억을 뒤져 얻은 최근의 행적들.
그중에서도 제삼자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 것들만 골라 만들어진 게 오늘의 자료였다.
자료의 성격이 있다 보니, 유들유들 사람 상대 잘하는 영배와 시청 최고의 정보통이라는 영진이 나섰어도 모든 정보를 확인받은 건 아니었고,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시의원과의 공모는 안준식의 도움이 있어 확인할 수 있었다.
서태기가 제명되며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장민호도 더는 서태기를 두둔할 처지가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어서 확인 가능했던 정보였다.
장민호는 그 정보를 확인해 주며, 제안을 받기는 했으나 동의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했다는데 지금의 목표는 장민호가 아닌 서태기였기에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영배의 말에 다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강사 출신 40대 여성 위원이 끼어들었다.
“시청에서 저희에게 제공한 자료가 무슨 ‘찌라시’ 수준일 리는 없죠. 그리고 오 위원이 말한 그 건뿐 아니라 다른 것도 심각해요. 확인된 세 건이 모두 심각한 결격사유잖아요. 하나하나가 다 그래요.”
“그건 그렇죠.”
“사실, 이 자료가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 위원이 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니라 계속 시의원을 하게 놔두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서태기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는 차분하기만 했고 서태기가 입장한 뒤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던 여성 위원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냉정한 표정에 열이 오른 목소리인 게 기분이 나쁘다는 걸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퇴직 교사 출신 위원이 달래는 듯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조 위원님, 갑자기 화나신 것 같은데요?”
“네.”
“왜 그러세요?”
“... 제가 지난 선거 때 서태기 의원 찍었거든요.”
“아, 그랬어요?”
“네, 선생님. 그때 그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네요. 휴우.”
한숨을 내쉬고 도훈을 흘끔거리던 조 모라는 40대 여성의 시선과 도훈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던 그녀는 다시 푹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 휴우. 사실, 시장 투표에도 지금 시장님 안 찍었어요.”
“... 하하하. 그게 어때서요. 개인의 자유고 선택 아닙니까?”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대꾸하자, 여자가 다시 한 번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맞아요. 제가 선택한 거죠. 그리고 지금 와서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죠.”
“뭘 그렇게까지···.”
“제가 지지한 시의원은 저 모양이라 당에서도 쫓겨나고, 지지했던 시장 후보는 파렴치한 짓 했다가 걸려서 조만간 감방에 가게 생겼으니···.”
“... 아.”
그녀가 투표했다는 시장 후보가 강운천이었음을 알아챈 도훈이 어색하게 웃었고, 여자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행정이나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 시장을 한다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건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제가 오만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죠, 뭐.”
“... 하하. 편견까지는 아니죠. 저 그런 말 한두 번 들은 거 아닙니다.”
“그러실 수 있죠. 그리고 그런 말이 구차할 정도로 잘하고 계시잖아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찍은 사람이 시장 안 되길 천만다행이라고 여러 번 생각했는데, 오늘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하네요.”
“이거 제가 으스댈 타이밍인 겁니까, 지금?”
“으스댈 정도는 아니더라도 잘하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하하, 감사합니다.”
도훈이 웃었고 실내 사람들 대부분이 따라 웃었다.
서태기가 위원들의 추궁을 더는 못 견디고 문을 박차고 나가 싸늘해진 분위기가 좀 풀렸고, 도훈이 시계를 바라본 뒤 말을 이었다.
“얼른 마무리하시죠. 그리고 예정대로 회식하러 가는 겁니다.”
“그러시죠. 안 그래도 잠깐 열을 올려서 그런지 배가 고프네요.”
“호호. 저도 그래요.”
일부러 이 회의를 금요일로 잡은 건, 회의를 마치고 분위기 좋게 회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서태기가 사람들 기분을 망쳐놨으니 필히 회식을 해서 더욱 친목을 다져야 할 터.
“회의 속개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두 분을 걸러내야 합니다.”
회의가 재개됐고, 다들 위원 선정에 집중해 곧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이 거의 다 된 적절한 타이밍에.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어요.”
도훈이 회의 종료를 선언했고, 다들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뒷자리에 앉았던 두진과 영배가 나란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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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그 자료 줬다는 사람 말이야. 지난번 강운천 전 시장이 업체 동원했다고 제보한 사람이랑 같은 사람일까?”
“나도 모르지.”
회식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
궁금증 가득한 표정의 영배에게 운전하는 도훈이 담담히 답하고 있었다.
위원들과 윤종일 교수는 두진과 지연이 챙겨 영진의 승합차로 회식장소로 먼저 갔고, 도훈은 시장실에 들러 몇 가지 일을 마무리하고 따로 가는 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시기적절하게 제보라는 걸 해줘서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동감이야.”
“물론, 이번에는 나랑 홍 주무관님이 좀 진땀을 빼긴 했다만.”
“알지. 고생했어.”
도훈은 이번에도 조상님이 알아낸 서태기와 관련된 자료를 제보받았다고 둘러댔다.
아침에 출근하려는데 차 앞유리에 서류 봉투가 올려져 있었다는 식으로.
도훈이 그 자료를 내주며 신속히 확인하라 지시했을 때, 영배와 영진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섰다가 ‘알찬’ 수확을 올렸다.
제보 내용 중 일부만 확인됐지만, 그것만으로도 서태기를 물리치기에는 충분했으니 연이은 ‘제보’가 큰 역할을 한 셈이랄까.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한 정보력을 가진 사람인 것 같은데···. 난 그 사람이 좀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줬으면 좋겠다. 안 그러냐, 도훈아?”
“... 난 이런 제보를 받을 상황이 더는 안 왔으면 좋겠어.”
“아,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러네.”
심드렁한 도훈의 말에 영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뒷좌석에서 조상님이 키득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 킥킥. 아마 힘들지 않겠냐? 본격적인 정치인이라고 하긴 좀 그렇다지만, 시장이 얼마나 다양한 일에 관여하는데.
‘......’
- 흐음. 어쨌든, 이번 제사상도 기대하마.
‘... 네.’
방법을 떠올리다 못해 다시 조상님을 ‘동원’했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 했다.
제사상 차리는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대처방안이 아니라서 꺼려지는 도훈.
이번에는 너무 다급해서인지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상님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안 돼··· 라고 도대체 몇 번을 다짐하는 거냐. 하하.’
귀신인 조상님이 나서면, 못 해결할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해결책은 ‘일반적’일 수가 없어 시 행정과 관련한 일에 ‘좋은 예’가 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든 보통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 해결책을 내놓는 방식을 앞세우자고 다짐한 게 오래지만, 아주 급하거나 예외적인 상황이 꼭 생겼다.
앞으로도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었고.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진 도훈.
“... 쩝.”
“왜?”
“... 아무것도 아니야.”
담담히 답한 도훈은 이내 회식장소에 도착했다.
먼저 출발한 이들보다 20분이 채 안 되게 늦게 도착했는데, 이미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다.
“분위기 좋네요.”
“어서 오세요, 시장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긴요. 바쁘신 거 다 압니다. 자, 한잔 받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합류한 도훈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함께 먼저 온 심남진이 사람 상대에 능한 데다가 윤종일 교수가 쾌활하게 분위기를 주도한 때문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다행히 서 의원이 깽판 친 영향은 없는 것 같네.’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테이블 끝쪽에 앉아 안준식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40대 여성 위원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기분 좋게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있다면, 그 둘은 뭔가 진지하달까.
진지함을 넘어 좀 엄숙하다고 할 정도로.
도훈이 그들에게 시선을 주는 걸 본 두진이 옆에서 귀띔했다.
“아까부터 두 분이 저러고 있더군요.”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시고요?”
“네. 전 여기에만 있어서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도훈은 자리를 옮기며 참여한 이들을 챙기며 술잔을 기울이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준식과 여성 위원의 곁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엄숙한 분위기의 대화를 이어가고 있던 두 사람.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셨어요?”
“아뇨. 이렇게 마주한 건 오늘 처음인데요.”
“하하.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 하십니까?”
도훈이 웃으며 묻자, 조 모라는 여자 위원은 답을 망설였고 안준식이 담담히 웃으며 대신 답했다.
“그냥 모른 척해주세요. 아무래도 이건 시장님께서 아셔서 좋을 일은 아닐 듯합니다.”
“음? 뭔가 비밀스러운 주제인 겁니까?”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시장님이나 직원분들은 모르는 게 좋을 그런 주제거든요.”
“하하, 더 궁금해지는데요?”
도훈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자 이번에는 여자 위원이 말했다.
“음, 안 의원님 말이 맞을 것 같아요. 시장님이나 시청에 해가 되는 일은 아니라고만 말씀드릴게요.”
“해가 되는 건 아니라고요?”
“네. 대흥시 시민으로까지 범위를 넓혀도 절대 해 되는 일 아니에요.”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제가 그냥 참겠습니다.”
“음, 지금 말씀 안 드려도 조만간 아시게 될 거에요.”
“조만간 이요?”
“네. 일이 잘 풀린다는 전제하에요.”
여자 위원이 수더분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도훈은 궁금증을 억눌렀다.
“그럼 비밀 얘기는 두 분이 계속하시고요. 저랑 건배는 한잔하시죠.”
“그건 할 수 있죠, 당연히.”
잔을 든 도훈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함께 열심히 하시죠.”
“저도 열심히 할게요.”
쨍.
건배하고 난 도훈이 자리를 비켜줬고, 두 사람은 다시 ‘엄숙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여자 위원의 말처럼 그들의 대화 주제는 며칠 뒤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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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이 지난 화요일 점심시간, 시청 비서실.
식사를 마친 도훈과 직원들이 소파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데, 자기 책상에서 컴퓨터를 만지던 영배가 눈을 동그랗게 크게 떴다.
“어라? 뭐야, 이거?”
“... 무슨 일인데요?”
“... 위원회 홈페이지에 안 의원님이 글을 하나 올리셨는데요.”
“무슨 내용인데요?”
도훈이 묻자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영배가 답했다.
“금요일에 회의했던 내용, 그중에서도 서태기 의원 면담했던 이유와 과정이요.”
“... 그게 올라왔어요?”
“네. 시민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라면서요.”
“... 설마···?”
“그 내용도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네요.”
“... 허어?”
‘그 내용’이란 회의 때 사용한 서태기의 결격사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위원회 홈페이지에 올라왔다면···.
‘... 이거 자칫하면···.’
도훈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옆에서 핸드폰으로 뭔가를 보던 지연도 놀란 표정을 했다.
“어라? 이건 또···.”
“... 뭔데요, 지연 씨?”
“... 여기요.”
지연이 내민 액정에는 조 모 여성 위원의 SNS 계정이 올라와 있었다.
- 비리 시의원 서태기는 즉각 사퇴하라.
“......”
손팻말을 들고 찍은 조 위원의 사진을 본 도훈이 말문을 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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