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진심에는 진심으로 – 1.
도훈이 시청으로 돌아오자마자 두진이 심남진 의장과 만나 들은 얘기를 꺼냈다.
두진이 미리 연락했기에 윤종일 교수와 안준식 의원도 예정을 바꿔 도훈을 따라와 시장실에 함께 하고 있었다.
“... 그랬다고 합니다.”
“......”
“허허.”
“... 후우.”
두진의 설명이 끝나자 도훈은 말이 없었고 윤 교수는 헛웃음을 흘렸으며 안준식은 화를 참느라 심호흡을 했다.
가만히 뭔가 생각하고 있던 도훈이 입을 연 것은 거의 1분 가까이 침묵이 이어지던 순간.
“... 그냥 해보는 말이나 장난이 아닌 진지한 요구랍니까?”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두진의 답에 도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고, 윤종일 교수가 입을 열었다.
“송 실장님. 이거 제가 좀 황당해서 여쭙는 건데··· 저보다야 실장님이 그 사람을 잘 아실 테니까요. 혹시 실장님은 그 말이 믿기십니까?”
“... 당연히 믿음이 잘 안 갑니다.”
“허허, 나 원 이거···.”
윤 교수가 다시 헛웃음을 흘리고는 시원한 음료가 담긴 유리잔을 집어 들었고, 얼굴이 좀 벌겋게 달아오른 안준식이 중얼거렸다.
“... 도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도훈을 비롯한 모두가 이리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건 논의 위원회에 지원했다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어제 심남진 의장을 만나 직접 이야기했다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제명 사건으로 한창 화제가 되는 중인 이제는 무소속 서태기 의원.
서태기가 추천한 누군가가 아니라 서태기 본인이란다.
“저 심 의장님 만나서 얘기 좀 해봐야겠습니다. 윤 교수님, 죄송합니다. 이따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저도 시의회 의장님께 커리큘럼 때문에 대화할 게 있습니다.”
“그러실래요? 그럼 일어나시죠.”
“네. 도훈··· 아니, 김 시장. 이따가 연락하겠네.”
“네, 교수님.”
안준식이 윤 교수와 함께 나가고 영배가 시장실로 들어와 앉을 때까지 도훈도 두진도 말이 없었다.
가만히 양쪽을 번갈아 바라보던 영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장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야 한데···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길 수도 없지 않나.”
“원래 시의원에게는 누구나 논의 위원회 정식 위원에 준하는 자격을 주기로 했잖습니까. 요청하면 언제고 논의를 참관할 수 있고 자료도 받아볼 수 있도록 했고요.”
“그거야 그렇지만···.”
두진이 말끝을 흐리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휴우. 이건 그냥 내 경우를 말하는 건데, 기분의 문제가 좀 큰 것 같군.”
“기분이요?”
“그게 그냥 이름만 위원회인 게 아니질 않나. 우리 대흥시의 장기적인 발전 전망을 모색하자고 만든 거란 말일세. 당장 어떤 대단한 힘이나 영향력을 가진 건 아니지만, 우리 시의 미래를 고민하는 논의를 책임질 기구란 말일세. 제대로 운영하기만 하면 우리 시 입장에서는 꽤 다양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걸세. 단순히 도시구획 정비나 하자는 게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요.”
논의 위원회의 기본 취지는 대흥시의 발전 전망을 찾자는 것.
그건 현재 ‘성장 한계’에 봉착한 대전의 위성도시로서의 원래 틀을 재검토하고, 필요하다면 과감히 새 판을 짜는 그런 과정이 될 터.
“그런 위원회에 ‘구태’로 낙인 찍힌 사람이 정식 위원이 되고 싶다고 하니··· 이거 중요한 먼 길을 가겠다고 집 나서는 사람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거 아닌가 하는 느낌일세. 난 듣는 순간 기분이 확 잡치더라고.”
“... 그건 이해가 갑니다.”
영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태기는 최소한 대흥시에서는 ‘구태 정치’의 산증인으로 낙인이 찍히다시피 한 인물.
그가 민의당에서 제명된 이후 도훈이나 비서실 직원 그 누구도 물어본 적은 없지만, 민의당 지역위원회의 분위기는 서태기의 당적 회복은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분위기였다.
오죽하면 서태기 본인이 ‘제명’ 처분에 대해 이의신청도 하지 못했다고 하겠는가.
내내 뭔가를 생각하고 있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저도 실장님 기분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한 것 같고요.”
“... 네.”
“그래도 당장 큰일이 생긴 게 아니라는 조 비서관 말도 틀린 게 아니네요, 생각해 보니까.”
“네.”
“진정하고 일단 오후 업무 시작하죠. 제 기억이 맞는다면 1시에 세무회계과 재산관리팀 회의에 가기로 했잖습니까.”
도훈의 말에 두진이 물었다.
“서 의원 건, 좀 더 알아보지 않으시고요?”
“일단 일정대로 진행하고 그다음에 이야기하죠. 시간이 다 됐잖아요.”
시계를 보니 오후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어 곧 도훈과 두진, 영배가 세무회계과가 있는 청사 2층으로 내려갔다.
“어서 오세요, 시장님.”
“안녕하세요. 저 안 늦었죠?”
“네. 제때 오셨습니다.”
“흠. 다들 앉으세요. 바로 시작하죠.”
인사하는 직원들과 웃으며 인사하는 도훈.
밖으로는 전혀 티를 안 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발목을 잡힌 것 같다’는 두진보다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 위원회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해 ‘재선’까지 결심하게 된 도훈이 아닌가.
그건 그만큼 위원회에서 할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인 터.
어쨌든, 도훈은 처음 두진에게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던 동안, 이런저런 생각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었다.
“회의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안건은···.”
팀장의 말에 도훈이 담담히 눈을 빛냈다.
정리한 생각대로 행동하기 위해서라도 침착을 유지하려 도훈은 애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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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지난 대흥시청 소회의실.
시장인 도훈과 시의회 의장인 심남진, 윤종일 교수에 시민 위원 세 사람이 함께한 자리.
기록 목적의 영상 촬영을 하는 직원 외에 두진과 영배 등도 회의 테이블 뒤 의자에 앉아 참관하는 중이었다.
“다음 분으로 넘어가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흠.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분은 탈락시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동감합니다. 아무리 장기적 논의를 위한 위원회고 당장에 개발과 관련한 건 다루지 않는다고 해도, 좀 걱정이 되네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맞아요. 금선면에 본인 명의로 땅이 이렇게 많은 것도 그렇지만, 가장 크게는 본인의 주민등록지가 대흥시가 아닌 게 걸리네요.”
오늘의 안건은 추천된 위원의 최종 선정.
도훈이나 심남진 등은 주로 시민 위원들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고, 특정 후보에 대한 호불호를 입에 올리는 걸 무척 조심하고 있었다.
오늘 논의되는 위원 후보들은 최종 판단을 위한 자료를 제출했기에 시민 위원들은 제출된 각 후보자의 자료를 보고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혹시라도 허위로 기재해 위원이 됐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발각되면 당장에 위원에서 해촉되는 건 물론, 업무방해 혐의를 물을 것을 미리 경고하고 받은 자료였다.
민감한 자료였기에, 외부에 유출되는 걸 막고자 사전에 배포되지 않고 회의 시작 한 시간 전에 모두가 미리 도착해 검토의 시간을 따로 가졌다.
“그럼 표결하죠. 위원 위촉에 찬성하시는 분 손 들어 주세요.”
도훈의 말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시민 위원 셋이 모두 부정적인 의견을 말해 도훈도 심남진도 그에 따른 셈이었다.
“위촉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테이블의 사람들이 다음 후보의 서류를 들췄고, 도훈은 잠시 말을 끊고 여유를 두어 자료를 재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줬다.
그리고 진지하게 자료를 살피는 위원들에게 시선을 줬다.
‘다행히 생각보다 훨씬 더 진지한 태도야. 고마울 정도네.’
이 자리에 앉은 시민 위원 셋은 아무렇게나 고른 것이 아니었다.
먼저, 홈페이지에 자원하거나 추천한 인원 중 시민들의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여섯을 골랐고, 그들 각자의 동의를 구해 직업, 재산, 주변 평가 등의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료를 놓고 도훈과 심남진, 윤종일 교수가 함께 여섯을 일일이 신중하게 면담해 셋을 골랐다.
결론만 말하자면, 부자도 아니고 화려한 경력을 가진 것도 아니며 경륜 있는 연장자만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 중학교 평교사로 정년퇴직해 지금도 후배 교사와 옛 제자들에게 존경받는 60대 중반의 남성.
- 과거 대학교 철학과목 강사였다가 아이가 생겨 쉬는 중이라는 40대 초반의 여성.
- 대전의 어느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인 20대 후반의 여성.
교사 출신 남성은 주변의 추천을 받았고 다른 두 사람은 위원회 일에 흥미가 생겨 지원한 사람들.
박사과정 중인 여성은 ‘산업과 지역 발전’이라는 분야가 학위 주제였고, 철학 강사였던 사람은 도시 계획에 녹아든 철학을 공부했던 사람.
도훈과 심 의장은 물론, 윤종일 교수가 인정할 정도로 위원회의 향후 활동 방향에 적합한 지식과 경력이 있었다.
교사 출신인 사람은 전문 지식은 없더라도 여전히 학구열에 불타고 평생 어려운 이들에게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왔고, 이 위원회 활동 역시 그 계기로 삼겠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조상님의 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이런 분들과 서 의원을 나란히 놓고 보면···.’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는데, 시민 위원들이 서류에서 눈을 뗐다.
“다 읽었어요, 시장님.”
“저도요. 진행하시죠.”
“아, 네.”
회의가 이어졌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차분한 평가와 결론이 내려졌다.
오늘 논의되는 후보는 17명이었고, 이들은 그중에 7명을 선택해야 했다.
17명 모두의 자료를 검토했을 때, 탈락자는 8명이라서 다시 두 명의 탈락자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예정에 없이 검토해야 할 다른 위원 후보가 있었다.
“그럼 마지막 분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죠.”
“네.”
“오셨나요?”
“네. 조금 전부터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갑작스럽게 지원한 후보라서 미리 제출받은 자료가 없었다.
그렇다고 심사를 늦출 수도 없어서 시에서 급히 자료를 준비하고 오늘 당사자가 이 자리에 출석해 면담을 거치는 것으로 대체했다.
미리 연락해 검토가 끝난 시점에 바로 면담할 수 있게 했다.
“들어오라고 해주세요.”
“네, 시장님.”
일어서서 답하던 영배가 소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담담히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은 시의원 서태기.
그를 맞이하는 이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가볍게 묵례하는 도훈과 심남진 외에 앉은 채로 고개를 까딱하는 정도.
다들 서태기의 지원이 그리 반갑지 않은 게 분명했다.
서태기가 떨떠름한 표정을 애써 숨기는데 도훈이 별다른 인사말도 없이 회의를 속개했다.
“미리 말씀드렸죠? 지원 동기 말씀해 주시죠, 의원님. 그리고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더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 그러죠. 음, 저는 요새 제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는 일이 많습니다. 나름 소신과 의지를 갖고 활동해왔는데, 갑자기 그걸 다 부정당한 그런 느낌이라서 말이죠. 저는···.”
서태기의 장황한 지원 동기가 이어졌다.
핵심은, 나름의 소신과 목표를 갖고 의정 활동을 한 것을 ‘제명’이라는 처분으로 부정당했지만, 그것과는 관계없이 계속 대흥시 시민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고 그를 통해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시민들에게나마 인정받고 싶다는 것.
‘결국, 자기가 살기 위해 위원회를 이용하겠다는 거네.’
사전에 서태기를 만나지 않았던 도훈도 처음 듣는 얘기.
의도야 어쨌든, 위원회 위원이 되겠다는 건 진심인 것 같았기에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했다.
시민 위원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위원이 못 된다는 건 미리 못을 박았다.
“... 그래서 제가 이렇게···.”
“그쯤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비슷한 말을 반복하고 계시네요.”
“... 크, 크흠!”
입을 열어 서태기의 말을 끊은 것은 시민 원 중 가장 연장자인 선생님 출신 남자.
도훈은 미리 서태기의 면담은 그에게 사회를 봐달라 얘기를 해놨다.
도훈은 이 자리에서 서태기와 그다지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대신에···.
“제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 그, 그러시죠.”
40대 여자 위원이 서태기는 쳐다보지도 않고 서류에 눈을 고정하고 말을 이었다.
“처음 이 위원회 구성이 발표되자 의원님 부인께서 대흥시 땅값부터 알아보셨다는데 사실인가요?”
“... 네?”
서태기가 당황했고 여자 위원은 여전히 서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자료에 적혀 있어요.”
“... 뭐, 뭐가 말입니까?”
“의원님 부인께서 몇몇 공인중개사와 함께 토지 시세를 전부 확인했다고요.”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모함···!”
“그 일 함께한 공인중개사들 이름도 다 적혀 있는데요?”
“... 뭐, 뭐요?”
“하나씩 읽어 드려요?”
“......”
심드렁한 표정의 여자 위원의 말에 서태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말문을 잃었다.
‘어,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가 당황한 건 ‘모함’이어서가 아니라 몰래 한 일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놀라서였으니까.
‘어떻게든 부정해야 돼.’
‘사는 방법’의 하나로 위원회를 선택한 건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결과.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위원이 될 수 있다면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되리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위원회에 들길 바랬는데, 그를 막고 싶은 누군가도 진심이었다.
“그것뿐이 아닌데요. 여기 보면, 다른 의원을 이 일에 끌어들이려고···.”
또 다른 이야기가 남자 위원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고, 서태기는 당황하다 못해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 됐다.
위원회를 통해 잇속을 차리려고 몰래 벌인 꿍꿍이가 하나씩 밝혀지고 있었으니까.
‘... 도, 도대체 어떻게···?’
연신 이어지는 세 시민 위원의 발언 앞에서 얼굴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서태기.
‘... 진심에는 진심으로.’
서태기를 바라보며 도훈이 속으로 냉담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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