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거창할 필요 없는 – 3.
금요일 저녁, 도훈의 집.
도훈은 모처럼 정시에 퇴근했다.
도훈이 퇴근했으니 비서실 직원들 모두가 제때 퇴근할 수 있었다.
약속도 잡지 않았고 찾아갈 시민 모임도 없어서 일찌감치 집에 온 도훈은 순심이 밥부터 챙겨주고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정말이냐?”
- 응. 그거 때문에 아빠가 프린터도 새로 사셨던데, 오빠는 몰랐어?
“응. 몰랐다.”
도연이에게 답하며 도훈은 살짝 머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엊그제 아버지와 통화하며 ‘재선 도전’이라는 중요한 얘기를 꺼냈다가 ‘뭐 그딴 일로···.’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지.’라는 아버지의 말에 역시 우리 아버지답다는 생각을 했던 도훈이었는데, 동생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가 인터넷에서 도훈에게 좋은 기사가 날 때마다 출력해 모아놓는다는 얘기였다.
물론, 도훈의 기사만 스크랩하는 게 아니고 이제 때때로 ITS 뉴스에 등장하기도 하는 도연이의 모습도 마찬가지란다.
“번잡하게 왜 그렇게 하신대?”
- 오빠랑 나랑 나중에 결혼해서 애 생기면 보여주려고 그러신다는데?
“... 하하.”
- 나도 우연히 알았어. 아빠 방에 들어갔다가 오빠 기사 출력한 걸 봤거든. 이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아빠가 마지못해 말해주시더라. 내 건 없냐고 투덜댔더니, 내 것도 있대. 근데 있다는 말만 하고 보여주시지는 않더라고. 나 보여주려고 모은 거 아니라면서.
“... 하여간 역시···.”
- 우리 아빠지, 뭐.
자식들에게는 할 수 있는 쿨한 척은 다 하는 분이지만, 뒤로 혹은 모르게 챙길 건 다 챙기는 그런 양반.
사랑한다는 말이나 의례 부모들이면 하는 그런 걱정이나 잔소리도 잘 하지 않는 옛날식이라지만, 뭐 어떤가.
‘그러신다는 걸 내가 알면 됐지.’
아버지가 딸이 나온 뉴스 동영상을 캡처해 따로 컴퓨터에 보관한다는 걸 안 뒤 도연이는 좀 더 열심히 일하기로 마음먹었단다.
“나한테는 왜 얘기 안 했냐?”
- 아빠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셨습니다요.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그걸로 더 자극받을 필요 없이 오빠는 언제나 열심히 사니까. 그러니까 그냥 모른 척해.
“......”
- 하여튼, 재선 도전하기로 한 거 축하해. 난 오빠가 잘 생각했다고 봐.
“말은 고마운데 주변에, 특히 최승범 기자한테는 비밀로 해라.”
- 그렇게까지 해야 해?
“응. 꼭 그렇게 해다오.”
-쳇, 알았어. 끊어.
동생과 통화를 마친 도훈은 잠시 순심이가 밥 먹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말은 살짝 정이 떨어질 정도로 쿨하게 해도 내심은 다르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확인하고 나니···.
“뭔가 뿌듯하네.”
끼잉?
“너한테 한 말 아니다. 어서 마저 먹어라.”
순심이한테 답하고 난 도훈은 자신의 저녁밥을 차렸다.
요새 계속 밖에서 저녁을 먹느라 밥을 안 해 놔서, 시청 앞 분식집에서 깁밥과 오뎅 국물을 포장해 왔었다.
쿠르릉!
김밥을 씹고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일기예보 상으로는 이른 새벽부터 남해안에 태풍이 상륙한다고 했다.
하지만, 태풍이 오기 전부터 비가 제법 내리려는지 해가 지기 전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었다.
“적당히만 오면 참 좋겠는데···.”
야근하지 않고 약속도 안 잡은 것은 다 저 날씨 때문이었다.
계획대로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지 못하고 전화로 ‘쿨하게’ 대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역시 날씨 때문이 아닌가.
식사를 마친 도훈이 창가로 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협조 안 해줬지만, 우리 부자 사이는 다행히 아주 끈끈하다.”
쿠르릉!
도훈의 중얼거림에 답하기라도 하듯, 다시 천둥소리가 울렸다.
“협조 안 해준 건 용서해줄 테니까, 부디 적당히 해다오. 응? 부탁이다.”
쏴아아아!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 가득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의 눈빛에 걱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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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이른 시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자정 전에 멎었다가 이른 새벽부터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 날씨를 체크하던 도훈은 해가 뜨자마자 시청 상황실을 들른 뒤 자기 사무실에 와 있었다.
순심이를 소파에 내려놓고 커피메이커로 새 커피를 내려 창가에 서서 마시고 있는데 누가 비서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잠도 없냐?”
도훈이 돌아보니 영배가 웃고 있었다.
“그러는 형은? 좀 더 잘 것이지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나오라는 소리도 없었는데.”
“밤새 비가 제법 많이 온 것 같아서. 왠지 네가 여기에 있을 것 같더라. 역시 넌 내 손바닥 위에 있어.”
“하? 형이 무슨 부처님이고 내가 손오공이냐?”
“농담이야, 농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인마.”
가방을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은 영배가 소파 위 순심이를 한 번 쓰다듬고는 자기 전용 잔에 갓 내린 커피를 따라 창가로 다가왔다.
“상황실 들렀냐?”
“응. 다행히 별일은 없다네.”
“비가 계속 쏟아진 게 아니고 오락가락했으니까.”
“태풍은 예상보다 동쪽으로 치우쳤대.”
“나도 알아. 방송 보고 나왔어.”
잠시 둘은 나란히 창가에 서서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얼마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영배였다.
“그러고 보니 두 번째네.”
“뭐가?”
“비 많이 와서 비상 대기하는 거.”
“그런가?”
“응. 다른 이유 말고 비 때문인 건 두 번째야.”
2년 조금 넘게 시장과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여러 긴급 상황을 겪은 두 사람이었다.
취임하자마자 산사태가 났다며 뛰쳐나오기도 했고, 대낮에 화학약품 트럭이 사고가 나 전 직원을 동원하기도 했었다.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해괴하게 논쟁거리가 됐던 산불도 있었고, 사고로 직원이 다치거나 안타깝게 사망한 일도 있었다.
그중에 비로 인한 비상 대기는 두 번째가 맞았다.
“첫 번째가 내···.”
“취임일이었지.”
그렇게 말한 영배는 비서실 벽에 걸린 액자 하나에 시선을 줬다.
도훈의 공식 임기 첫날 아침, 시청 앞에서 찍은 사진들이 한 액자에 들어가 있었다.
후줄근한 모습의 도훈과 영배, 두 사람 가운데에 서서 손가락으로 코를 잡은 정임, 그날 아침 상황실 근무자였던 직원까지 다 같이 찍은 또 다른 사진까지.
“저게 벌써 2년이 넘었네.”
“그러게.”
“시간 참 빠르다, 시장님아. 안 그러냐?”
“그냥 훅 지나간 거지. 빠르다는 느낌조차 없었어, 나는.”
“하하. 그래.”
‘홧김에’ 시장이 됐는데 벌써 2년이 넘게 지났다.
이유야 어쨌든, 일단 당선됐으니 시민과 한 약속은 최대한 지킨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다시 한 번 도전하겠다는 마음 까지 먹게 됐다.
피식.
짧게, 머릿속으로 지난 2년을 되새겨 본 도훈이 영배에게 물었다.
“형수가 뭐라고 안 해?”
“선아? 선아가 뭐?”
“아니, 힘든데 형 비서 그만하고 강사 다시 하라는 말 안 하느냐고?”
자신의 재선도 재선이지만, 도훈이 또한 신경 쓰였던 건 영배와 계속 함께할 수 있을지에 관한 것이었다.
도훈은 명색이 시장이니 직위에 따른 사회적 인정도 받고 급여도 상당하지만, 영배는 도훈에게 사적으로는 할 말 못할 말이 없는 사이이나 남들 보기에는 그냥 ‘비서관’일 따름이라 사람들의 시선이나 급여도 ‘좋다’고 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니까.
도훈이 영배의 옆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월급 올려달라는 말 뒤에 못한 말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도훈은 당연히 영배와 계속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배에게 ‘형도 정치에 관해 고민하라’는 이야기를 꺼낸 뒤로는 딱히 ‘함께 하자.’는 권유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절친이라도 규칙에 맞지 않게 영배의 처우를 갑자기 상향조절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사람들의 박한 시선이나 대우를 감당하면서도 계속할지 말지 영배의 선택이 중요했다.
거기에 당사자인 영배는 물론, 와이프인 선아의 생각도 당연히 중요할 터였고.
그런데 지난 주말 진주네 집에서 선아가 너무도 선선히 ‘그래라’고 하는 걸 보고 조금은 놀랐었다.
“음, 초기에는 한두 번 언제까지 계속할 거냐고 푸념한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런 얘기 안 하게 된 지가 벌써 1년이 훨씬 넘었어.”
“그래?”
“응.”
“무슨 계기라도 있었어?”
“있었지.”
“그게 뭔데?”
“작년에 어린이집 저녁반 탄력운용 시범적으로 보조한 거 기억나냐?”
국가가 ‘야간 육아보육 서비스’를 실시하고 각 지자체가 다양한 형태로 이를 보조한다.
다만, 그 서비스를 받는 시간대에 관해 한도라든가 기타 제약이 있다는 ‘개선 요구’가 있었는데, 도훈은 작년에 시의회의 동의를 얻어 ‘탄력적 육아보육 서비스’ 시범 사업을 보조하도록 했다.
핵심은, 출퇴근이 늦어 저녁까지 서비스 이용을 원하는 부모들을 위해 어린이집에서 ‘저녁반’을 운용하도록 한 것.
저녁반을 새로 만들어 운용하는 데 들어가는 인건비 등을 시 예산에서 지원하도록 했는데, 신청이 많았던 것은 아니지만 계속 운용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은 되어 올해도 계속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사업 규모가 살짝 늘어날 정도로, ‘주목받진 않아도’ 잘 운용되고 있었다.
“그거 형 아이디어였잖아?”
“맞아. 그랬지.”
“그게 왜? 혹시, 그거 형이 했다고 자랑이라도 했어?”
“아니. 선아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그런데, 우리 애들이 저녁반에 다니잖아. 그 어린이집 원장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선아한테 ‘이거 민지, 민욱이 아빠가 만든 거나 다름없어요.’라고 얘길 했나 봐.”
“그래?”
“응. 그때 선아가 그러더라고. 괜히 너 따라다니면서 맨날 늦게 들어오고 술이나 마시고 다니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쓸 데 있는 일도 하는 모양이라고.”
“하하.”
“오래간만에 칭찬 들었었지.”
“그랬구나.”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영배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돋보이거나 거창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 주는 일이면 자기도 봐줄 만한 마음이 든다나?”
“하하. 형수가 그랬어?”
“응.”
“형수한테 따로 고맙다고 해야겠다.”
도훈의 말에 영배가 피식 웃고는 갑자기 정색했다.
“그건 네 맘이고, 월급 인상해 달라는 요구는 진심이야.”
“알았어.”
“그때는 용돈 인상으로는 못 넘어간다.”
“아, 알았다고.”
도훈이 따로 챙겨주는 영배의 용돈은 작년에 5만 원, 올해 또 5만 원 올랐다.
좀 박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용돈만큼은 형수도 손을 안 댄다고 도훈이 이미 알고 있고 도훈도 영배와 같은 금액의 용돈으로 지내니 영배도 더한 인상 요구는 못 했다.
“형수가 돋보이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고···?”
“응. 오히려 자잘하면서도 꼭 필요한 것들 잘 챙기라고 하더라고.”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도훈이 시장이 된 이후 대흥시 시정방향이 크게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필요 여부를 따져 취소된 사업도 있고 새로 신설된 사업도 있지만, 다 시가 감당할 수 있는 규모였다.
애초에 ‘거창한’ 사업을 떡 하고 시행할 수 있는 살림도 아니었지만, 도훈은 2년 내내 ‘내실’을 다지는 방향에 집중했기에 시 살림의 효율성은 뚜렷하게 증진된 상태.
선아가 영배에게 했다는 ‘돋보이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진 도훈.
“어쩌면 형수 말이 딱 나한테도 맞는 말이네.”
“그렇지? 시장도 정치인이라지만, 아주 거창한 정치인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지.”
“시도 시 나름이지.”
“그러니까 네가 현직 시장이지. 아무리 너였더라도 대흥시가 훨씬 컸다면 당선 안 됐을걸?”
“하긴···.”
아직도 대흥시는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크기가 작은 순서로 3위.
도훈이 시장이 된 뒤 인구가 좀 늘긴 했어도, 4위 도시와의 차이가 크게 좁혀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도훈은 시를 어떻게든 키우겠다는 마인드도 아니었고.
‘지금 규모에서도 시민들 불편사항 개선하고 복지 증진하는 게 만만치 않지.’
나름 잘하고 있다지만, 만만찮은 것도 사실.
다만 점점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붙은 것도 사실이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도훈이 말없이 웃으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비서실장인 두진.
“네, 실장님.”
- 시청에 나오셨다면서요?
“네, 비서실입니다. 왜 그러세요?”
두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기에 도훈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 저도 1층 상황실인데, 방금 지구대에서 협조 요청이 왔습니다. 1시간쯤 전에 논 살펴보러 나가신 할아버님이 전화를 안 받는답니다. 논이 하천 근처라 혹시 불어난 물에 빠진 거 아니냐고 걱정한다는데요. 지금 경찰이 찾고 있는데, 혹시 시청에서 인력 지원할 수 있냐고 묻더라고요.
“바로 상황실로 내려가겠습니다.”
- 네.
뚝.
“형, 상황실!”
도훈이 바로 전화를 끊고 움직였고, 영배도 뒤를 따랐다.
‘다시 시작이네.’
영문도 모르고 도훈의 뒤를 따르는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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