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거창할 필요 없는 – 2.
진주의 집에서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도훈 앞에 세경이 마주 앉았다.
어쩌다 보니 오늘도 자연스럽게 도훈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된 세경이었다.
도훈이 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무릎에 올라와 몸을 늘어뜨린 순심이를 쓰다듬으며 세경이 물었다.
“이제 재선에 도전하는 거 마음 확실히 정한 건가요?”
“거의요.”
“에이, 아직도 뭐가 남았어요?”
“음, ‘결정했다.’고 말하기 전에 말씀드릴 분이 두 분 남았거든요.”
“아, 혹시···?”
“네, 부모님이요.”
도훈의 말에 세경이 이해가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의 아버지가 고졸로 경찰관이 되어 경위도 달지 못하고 경사로 정년퇴직했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청렴하게 공직을 마쳤다는 건 들었다.
때때로 도훈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아버지의 ‘말’을 빌려 설명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도훈이 아버지를 많이 존경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게 된 세경이었다.
“그럼 도훈 씨 조만간 아버지 뵙고 어머니 성묘하러 가야겠네요?”
“그래야죠.”
“흐음.”
세경이 빤히 도훈을 바라보자 캔맥주를 마시려던 도훈이 동작을 멈추고 물었다.
“왜요?”
“음, 도훈 씨가 조금 신기해서요.”
“신기해요? 뭐가요?”
“좀 조심스러운 말인데, 어머님 돌아가신 지 20년이 넘었잖아요?”
“그렇죠.”
“아무리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더라도 웬만한 사람은 무덤덤해지고도 남을 시간인데, 도훈 씨는 꼭 아직 어머니께서 생존해계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거든요. 그것도 무척 자연스럽게요.”
세경이 조심스럽게 한 말에 도훈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은 것이, 도훈이 누군가와 대화하다 어머니 얘기가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너무 자연스럽게 어머니 얘기를 해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라는 얘기를 하면 나중에 깜짝 놀라는 이들이 종종 있었으니까.
“그냥, 곁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지내다 보니 버릇이 됐나 봐요. 동생 타이를 때 그런 얘기 자주 해주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게 자연스러워졌을 수도 있고요.”
세경이 담담히 미소 지었고 도훈은 눈에 보이는 뭔가를 얼른 외면한 채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세경 뒤편 허공에 뜬 조상님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 날 네게 보낸 게 네 엄마 아니냐. 날 대할 때마다 엄마의 은혜를 되새기기 때문 아니겠냐?
‘......’
뭐라 대꾸하지 않았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조상님은 ‘이게 다 네 엄마 덕분’이라는 이라 말하고는 지금껏 도훈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으니까.
엄마의 다정한 품 안 같지는 않았지만, 조상님의 ‘훈육’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도훈은 잘 알았다.
그렇다고 세경에게 ‘내게 시도 때도 없이 엄마의 고마움을 되새기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얘기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맥주캔을 비워버린 도훈은 조상님을 외면하며 세경에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세경 씨 보면 정말 좋아하실 거에요. 조만간 인사하러 갈까요?”
“그럴까요? 우리 엄마도 도훈 씨 보시면 좋아하실 텐데.”
“아, 어머니께 먼저 인사하러 가는 게 예의에 맞으려나요?”
“호호. 요즘 시대에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가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닌데. 천천히 해도 돼요.”
도훈도 세경도 결혼을 서두를 마음이 없었다.
결혼은 분명 플러스가 되기도 하겠지만, 각자 왕성하게 활동하는 두 사람에게 어느 정도 제약이 될 것도 사실이니까.
최근 많이 가까워진 두 사람이지만, 결혼은 좀 더 긴 시야로 바라보기로 합의했다.
도훈이 새 맥주캔을 따려고 하자 세경이 말렸다.
“그만 마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까도 꽤 마신 것 같은데.”
“음. 그럴까요, 그럼?”
“이번 주도 힘들었을 텐데, 주말에라도 푹 자야죠.”
“하하, 네.”
두 사람은 곧 자리를 정리하고 나란히 누웠다.
도훈은 곁에 누운 세경을 토닥이며 여느 때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열심히 일해 피곤했던 것도 있고 술을 좀 마시기도 해서 도훈의 손이 점점 느려지다 이내 멎었다.
평온히 잠든 도훈의 팔을 베고 있던 세경이 잠시 도훈의 옆얼굴을 바라보다 가만히 속삭였다.
“첫발 뗀 거 축하해요, 도훈 씨. 잘할 수 있을 거예요.”
세경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잠든 도훈이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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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나름, 재선 도전이라는 ‘큰맘’을 먹은 도훈이었지만, 사소한 것부터 빠트리지 않고 챙기고, 부서의 중요한 논의에 직접 참여하고 시간과 기회가 될 때마다 시민 모임을 찾아가는 도훈의 일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도훈이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업무에 임하자, 영배가 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속삭일 정도였다.
“뭐야, 기념식 같은 것도 안 해?”
“무슨 기념식?”
“재선 도전 결심 기념식은 어때?”
“... 선거가 가까운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지금 그딴 걸 할 수 있을 것 같냐? 어휴.”
“야, 웃자고 하는 얘기야. 너무 정색하지 마라. 친구들이랑은 기념한 셈이잖아. 직원 중에 가까운 이들하고도 얘기할 기회가 있어야 할 거 같아서 해본 말이야.”
도훈이 정색하고 노려보자 얼른 손사래를 치는 영배였다.
그래도, 영배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기에 도훈은 비서실 회식이나 하자고 했다.
“회식?”
“어, 정임 씨도 불러서 하자고.”
정임까지 부르자는 말에 영배가 은근히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거기서 선언하게?”
“선언은 무슨. 형 말대로 그럴 생각이라는 것 정도는 알려야지.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비서실 직원들인데. 실장님한테도 말씀드려야 하는데 어째 좀처럼 기회가 안 나니까.”
거창한 기념식 같은 건 필요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말로 ‘저 재선 도전할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좀 아니라고 생각한 도훈이었다.
“흠, 알았어. 그럼 이번 달 마지막 주? 아니면 좀 당겨?”
“당기되 좀 여유를 둬. 나 집에 갔다 와야 하니까.”
“아버지께 먼저 말씀드리게?”
“그래야지. 어머니 산소에도 가고.”
“알았다. 그럼 이번 주 말고 다음 주 금요일이면 괜찮겠냐?”
“그래. 그 전에 시간 내서 집에 다녀올게.”
“오케이. 회식 일정은 내가 지연 씨랑 조절하마.”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는 비서실 회식 겸 재선에 도전하기로 한 결심을 알릴 자리를 상정하고, 그전에 집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건만 상황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 주말에 태풍 온다고요?”
“네. 꽤 큰 태풍인데 우리나라에 상륙할 게 확실하답니다. 남해안이 태풍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는 게 토요일 새벽부터라더군요.”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네요.”
“네. 우리 기상청만 그렇게 예보한 게 아닙니다.”
‘긴급 안건’이라며 시장실에 올라온 재해대책팀장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가 내민 기상 예보를 보니 태풍의 상륙 예상 지점이 서남 해안 지방.
우리나라 기상청에 일본 기상청의 예측도 비슷했다.
아무래도 태풍은 대흥시나 인근 지역을 지나기 쉬웠다.
작은 태풍도 아니고 확률도 높으니 담당 팀장은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우리나라 기상 예보 적중률이 낮다지만, 대비했다가 헛수고하는 게 차라리 낫겠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시장님.”
“태풍 대비 매뉴얼 대로 움직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재해대책팀장을 내보낸 뒤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매뉴얼 대로 움직인다고 어떤 엄청난 준비를 하는 건 아니었다.
농수로나 야산 축대 등 태풍에 취약할 수 있는 지점들을 세세히 점검하는 건 6월 초에 이미 한 차례 했었기에, 재차 확인만 하면 된다.
혹여 피해가 발생하면 동원할 중장비도 이미 섭외가 됐다.
취임 직후에 있었던 일을 반면교사 삼아서, 섭외된 중장비 기사들이 ‘당번제’로 대기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소방서와 파출소 등에 미리 협조 요청을 해서 ‘만약의 경우’에 긴급히 대응할 수 있는 인력도 대기하게 할 터.
‘쩝, 날씨가 안 도와주네.’
매뉴얼이 가동되면, 시청의 안전총괄과 직원들이 상황실을 가동하며 비상근무를 한다.
다만,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퇴근 후 시 경내를 되도록 벗어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혹여, 인력이 많이 필요한 상황이 터지면 직원들이 나서야 하니까.
그런 직원들을 총지휘해야 하는 시장은 당연히 시 경내에 머물러야 할 터.
즉, 주말에 집에 다녀오겠다는 도훈의 계획은 실현 불가.
“... 이번 주에 집엔 못 가겠네. 간다고 미리 말씀도 드렸었는데.”
가만히 중얼거린 도훈이 개인용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이러이러해서 못 갈 것 같다는 얘기는 해야 하니까.
- 어, 왜?
“뭐 하세요?”
- 텃밭 보다가 좀 쉬는 참이다. 왜? 주말에 온다며?
“그게··· 주말에 못 갈 것 같습니다, 아버지.”
- 무슨 일 생겼냐?
“일이 생긴 게 아니고 주말에 태풍이 상륙한답니다.”
- 그래? 비상 대기?
“네.”
도훈은 못 가는 걸 아쉬워했지만,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 다음에 오면 되지. 뭐가 그리 아쉬워? 집에 꿀단지 파묻어 놓은 것도 아닌데.
“... 그게··· 아버지께 상의드리고 어머니께 보고할 것이 있거든요.”
- 상의? 전화로 하면 되지.
“중요한 거란 말입니다.”
- 요즘 시대에 뭐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고 꼭 얼굴을 봐야···. 응? 잠깐만! 너 혹시 결혼하냐?
“... 얘기가 왜 그리로 갑니까? 아니에요.”
도훈의 아버지는 아들이 세경과 사귄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심심찮게 ‘그래서 언제?’, ‘그러니까 언제?’ 하는 식으로 ‘결혼’을 입에 올려왔다.
어이없다는 듯한 도훈의 말에 혼자 흥분했던 아버지는 이내 심드렁한 목소리를 회복했다.
- 그거 아니면 뭔데?
“... 있어요, 중요한 게.”
- 뭐냐니까?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왜 말을 안 해? 하기 싫으면 끊어.
“잠깐만요, 아버지.”
퉁명스런 목소리의 아버지를 얼른 말린 도훈은 잠시 고민하다 얘기를 했다.
재선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딴에는 어렵게 꺼낸 아들의 이야기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은···.
- 인마,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얼굴 맞대고 상의하고 엄마에게 보고까지 하냐?
“... 안 중요합니까?”
- 네 인생 네가 사는 건데, 40 다 되어가는 놈이 그런 것까지 상의해? 하고 싶으면 도전하는 거고 싫으면 마는 거지.
“... 아, 예.”
도훈이 머쓱해 하자 아버지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 본격적으로 정치하겠다는 결심인 거냐?
“그것까진 아니고요. 일단 시장 일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 감당? 겨우 그 정도로?
“... 제가 여러모로 부족합니다만, 더 노력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진짜?
“... 네.”
- 확실해?
“네. 확실해요.”
- 그럼 됐네. 재선에 도전해서, 되면 열심히 하는 거고, 떨어지면··· 뭐, 내 아들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재주는 많으니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지.
“... 하하.”
아버지의 ‘후한’ 평가에 도훈이 황당한 웃음을 흘리는데,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네가 자신 있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냐? 더 열심히 하라는 말밖에 더하겠냐?
“... 감사합니다, 아버지.”
- 됐고, 내가 한마디만 더 하마.
“네. 말씀하세요.”
아버지가 말을 ‘더’하는 건 흔치 않은 일.
도훈이 살짝 긴장하는데 아버지가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재선에 도전해서 당선되고 싶으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겠냐?
“... 지금부터 선거 때까지 잘해야겠죠.”
- 잘 아네. 재선되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당장 오늘부터 더 열심히 해.
“네, 아버지.”
- 엄마한텐 내가 조금 있다가 가서 얘기 전해주마. 당신 아들 시장 재선에 도전한다네 하고 말이다. 신경 쓰이면 나중에 와서 엄마한테 다시 얘기하던가.
“... 알겠습니다.”
- 끊는다, 그럼.
쓰게 웃으며 답하는 도훈의 귓가에 아버지의 투덜거림이 작게 들려왔다.
- 썩을 놈.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난 또 혹시나 싶었네.
뚝.
핸드폰을 귀에서 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도훈이 투덜거렸다.
“누가 우리 아버지 아니랄까 봐···.”
거창할 것도 없는 김도훈 시장의 재선 결심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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