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또 다른 관리 – 3.
토요일, 도훈은 윤종일 교수의 집에서 자야 했다.
윤 교수를 강사로 섭외하는 거 말고 서울에 다른 볼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버렸다고나 할까.
- 인마, 네가 우리 와이프 설득하는 거 도와줘야 할 거 아니야. 우리 와이프가 나 기력 떨어졌다고 괜한 일에 힘 빼지 말라고 얼마나 단속하는 줄 아냐? 나 혼자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대흥시에 출강하게 생겼다고 하면 와이프가 선선히 ‘그러세요.’ 할 것 같냐?
윤종일의 부인은 평생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정년퇴직한 사람이었다.
그녀 역시 도훈을 제법 예뻐했는데, 그녀의 딸들과 도훈의 나이 차가 있어 ‘맺어’ 주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어쨌든, 졸지에 윤 교수에게 붙들린 도훈은 가지고 간 전통주 두 병을 중국요리를 시켜서 대낮부터 윤 교수와 해치우며 연락하지 못하고 지냈던 시간의 괴리를 따라잡아야 했다.
- 그냥 군대에 갈 타이밍이라 갔다고? 인마, 나한테 그걸 믿으라는 거야? 끝끝내 말을 안 하겠다니 내 그냥 넘어간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야. 뭔가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어쨌든, 네가 넘어가자니 넘어가 주마.
- 뭐, 재미없는 직장생활 동생 학비 생각해서 다녔다고? 그건 기특하네. 그래서 동생이 지금 뭐 하는데? 뭐, 기자? 오호!
- 어쩌다가 홧김에 시장이 됐다고? 하하! 이놈의 자식, 예전이나 지금이나 살짝 ‘똘끼’가 있는 건 여전하네. 그래서 시장 어떻게 하고 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거쳐 시장이 된 후의 이야기까지 풀어내고 나니 어느새 저녁이 됐고, 윤종일의 와이프가 귀가했다.
원래 도훈의 스타일이라면, 절대 그렇게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는데 윤 교수가 하도 ‘자세한 설명’을 요구해 이야기가 계속 길어졌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도훈이 절대 그렇게까지 받아주지 않았겠지만, 윤종일은 ‘강사’로 섭외하는 목적 이외에도 도훈의 뇌리에 ‘훌륭한 어른’으로 새겨진 몇 안 되는 사람.
10여 년 전에는 젊은 사람 못지않은 활동력을 자랑하던 그가 도훈의 별것 아닌 이야기에 목매는 듯한 모습이 좀 찡하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최근에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다 보니 오래간만에 찾아온 도훈과의 시간을 실제 이상으로 기꺼워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어쨌든, 도훈은 그렇게 윤종일을 상대하고 저녁에는 그의 부인까지 상대하다가 끝내 그 집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일요일, 해장국까지 얻어먹고 집을 나서는 도훈에게 윤 교수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조만간 대흥시로 답사 가마.”
“... 답사요?”
“그래, 답사. 도시 발전계획을 짜려면 그 도시에 대해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 그렇죠.”
“인터넷 자료만으로는 한계가 있어요. 실제로 도시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지. 거기에 주변 광역 단체 발전계획도 살펴야 하고 말이야. 대전에 붙어 있으니 대전의 영향이 클 테고, 행정구역은 충남에 속해 있으니 그쪽 것도 참고해야겠네.”
“......”
말문을 잃은 도훈을 세워놓은 채 잠시 뭔가를 궁리하던 윤 교수는 이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주 후반이나 주말에 한 2, 3일 정도 내려가는 거로 계획을 잡을 테니까 그리 알아. 아, 숙소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하마. 와이프랑 같이 온천이나 가면 될 테지. 유성온천, 아직 쓸 만하지?”
“... 그, 글쎄요.”
“너는 충청남도 발전계획 같은 거나 좀 챙겨 봐. 대전 쪽에는 내 제자가 있어. 걔를 통하면 될 거야.”
“... 아, 예.”
“그리고 대흥 시 둘러볼 때는 너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어야 해. 안내인은 있어야 하니까.”
“... 예, 교수님.”
“빠트린 거 없지? 그렇게 알고 가서 준비해. 음, 이거 오래간만에 현장을 돌아다닐 걸 생각하니까 벌써 가슴이 뛰네. 하하하! 잘 가고, 연락하마.”
“......”
쿵.
닫힌 빌라 문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던 도훈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 그 양반, 여전하시네.”
도훈이 기억하는 윤종일 교수는 책상물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열혈 행동파.
매사에 정신없는 건 아니지만, 뭔가에 일단 꽂히면 그의 행동력은 거침없기로 유명했었다.
방금, 문앞에 도훈을 세워놓고 했던 말은 10여 년 전 기억 속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 일단 이걸로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된 거나 마찬가진데···.”
빌라를 나서 전철역 쪽으로 걸으며 도훈이 중얼거렸다.
윤종일 교수가 등장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닐 테지만, 아주 강력한 우군을 얻었음은 확실했다.
다만, 문제가 아예 없다고 할 수가 없었다.
“... 정작, 저분은 어떻게 다독인담?”
걸음을 재촉하는 도훈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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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인 화요일 오전, 대흥시 시의회.
미리 참석을 요구받은 도훈이 의회에 출석한 가운데 의장이 회의 속개를 선언하자마자 누군가 발언권을 요청했다.
“의장님, 시장님께 질의할 게 있습니다.”
“네. 안 의원님께 발언권 드리겠습니다. 시장님은 답변석으로 나와 주세요.”
의장의 말에 도훈이 걸음을 옮겨 단상에 섰다.
이제는 의장이 아니라 평의원이 된 안준식이 그런 도훈을 담담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흥시 발전계획 논의 위원회 건으로 질문을 드릴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시장님이 여러 차례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요. 그 취지가 좋다는 것에는 여전히 저도 공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저런 얘기가 도는데, 혹시 들어보셨는지요?”
“위원회 구성과 관련됐고 이권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 대한 우려라면 들어봤습니다.”
도훈이 답하는 순간,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는 이들이 있었다.
여당 의원 중에도 야당 의원 중에도.
그중 한 사람인 민의당 소속 서태기가 안준식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지만, 안준식은 담담히 그와 잠시 시선을 마주하다 말을 이었다.
“들으셨다니 다행인데요. 근거 없는 소문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셨는지요.”
“네. 안 그래도 그 부분과 관련해 말씀드릴 계획이었습니다. 우선···.”
도훈은 전경완 부시장, 두진과 논의했던 이야기들을 차분히 풀어냈다.
안준식은 도훈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도록 말을 끊지 않고 들어줬다.
위원회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조만간 만들어, 위원회의 목적과 임무, 구성과정, 시민의 의견 수렴을 시작하겠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의장석의 심남진이나 부 의장석의 신길영도 안준식과 비슷한 반응.
도훈이 홈페이지와 관련한 이야기를 마치고 잠시 물을 마시는 사이, 안준식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홈페이지 자체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사업의 추진 과정을 시민에게 공개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만으로는 좀 부족하지 않은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음, 그 부분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장기적’ 전망을 갖고 ‘논의’를 할 위원회이니만큼, 그런 부분에 도움을 주실 분을 추천하고자 합니다.”
“... 추천이요? 시장님께서요?”
“네. 제가 추천하는 분을 위원회 고문 겸 교육위원으로 위촉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기초적 소양 부분을 위원들이 공유할 수 있게 힘써 주실 테고, 학문적 분석이 필요한 부분에도 큰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겁니다. 위원회뿐만 아니라 우리 시 관련 부서 직원들의 소양 증진에도 도움이 될 테고요.”
“...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건지···?”
“대학에서 도시공학을 강의하시다 지금은 은퇴한 학자이십니다. 도시 계획 분야를 전공하셨고, 강단에서만 활동하신 게 아니라 현장 경험도 많은 분이라 이번 일에 딱 적임이라 생각합니다.”
의원들에게는 처음 꺼내는 이야기인지라, 의장과 부의장에 안준식 등도 관심을 보였다.
“그분 성함이···?”
“윤종일 교수님이십니다.”
도훈의 답에 반응한 사람은 실내에 딱 두 사람.
미리 들어 알고 있던 두진과 영배는 담담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반응이 없는 다른 이들은 그에 대해 아예 모르기 때문에 그럴 터.
유일하게 윤종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질문대의 안준식과 부 의장석의 신길영이었다.
안준식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는 물었다.
“윤종일 교수님이면, H대에 계셨던 그분 말씀하시는 거 맞습니까?”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아니, 진짜로 그분이라고요?”
“하하, 네.”
거듭 확인한 안준식의 얼굴에도 미소가 어렸고, 신길영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안준식은 시민단체 활동을 오래 했기에 아는 것일 터였고, 신길영 역시 진보적 학자이자 활동가였던 윤종일을 아는 모양이었다.
“그분이면 더할 나위 없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거의 활동을 안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용케 섭외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습니다.”
“음, 다행입니다. 한시름 덜었습니다.”
윤종일이라는 이름 석 자에 안준식과 신길영의 얼굴이 표나게 편해지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이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누군데 저러는 거지? 혹시 장 의원 알아요?”
“아뇨.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서태기가 장민호와 수군거리다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담담한 도훈의 눈빛에 서태기의 불안감이 커지는데, 도훈이 말을 이었다.
“목요일에 대흥에 오신다니까 원하시는 의원님이 있으면 잠깐 이야기할 시간을 마련해보겠습니다.”
“아, 그래요? 저는 꼭 뵙고 싶습니다.”
“저도 참석하겠습니다.”
안준식과 신길영에 이어 의장인 심남진까지 만남을 청하자, 도훈이 아예 의원 전원과 잠시 만나는 건 어떻냐고 제안했고 의장이 수용했다.
“의회로 모시기는 그러니까, 점심을 함께 드시는 건 어떨까 싶은데요.”
“그렇게 일정을 잡겠습니다, 의장님.”
“알겠습니다.”
“그분과 관련한 얘기는 그날 교수님께 직접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안 의원님, 질문 또 있으신가요?”
“아뇨. 이상입니다.”
안준식이 흡족한 표정으로 물러났고, 도훈도 답변석에서 내려왔다.
도중에 도훈과 서태기, 장민호의 눈빛이 마주쳤다.
씨익.
도훈이 담담히 웃고 지나가는 동안, 서태기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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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점심, 시청 앞 식당의 내실.
시장 비서실에서 준비한 식사자리에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교수님. 저 안준식이라고 합니다.”
“아, 반가워요.”
“안녕하십니까. 진평당 소속 시의원 신길영입니다.”
“진평당이요? 허허, 반갑습니다.”
윤종일이 도훈, 영배와 함께 내실에 들어섰고 미리 도착해 있던 안준식, 신길영을 필두로 의원들이 인사를 나눴다.
차혜진 의원은 일이 있다고 불참했고, 여섯 의원 중 서태기와 장민호 두 사람이 심드렁한 태도를 보였다.
분명히, 윤종일이 어떤 사람인지 이제는 아는 모양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은퇴한 지 오랩니다.”
“인터넷 검색만 해도 아직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검색되던 걸요. 완전히 손 놓으시긴 이르죠. 저희 시 일에 협력해 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써먹으라고 공부한 건데, 죽기 전까지는 계속 써먹어야죠. 오히려 그런 기회를 얻은 것 같아 제가 고맙습니다.”
다른 의원들은 윤 교수와 반갑게 인사했지만, 서태기와 장민호는 아주 형식적이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하고 대놓고 불만을 토하거나 위촉 반대를 말하지 못하는 건, 도훈이 추천하겠다고 했지 임명한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일 터.
사실, 위원 자격도 아직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인데, 고문이나 교육위원 후보라 해도 토 달기가 모호하지 않은가.
식사를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위원회 구성원들을 교육한다면 그 내용이 어떤 것들인지, 현실을 얼마나 녹여낼 수 있는지 그런 의원들의 궁금증에 윤 교수가 답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서태기가 입을 연 것은 주문한 콩나물국밥이 막 서빙되기 시작한 순간.
“그래서 그 교육이라는 건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글쎄요. 2주에 한 번씩 교육한다면, 짧으면 석 달에 길면 넉 달 정도 걸릴 겁니다.”
움찔.
“... 너, 넉 달이요?”
“네. 그리고 그게 끝이 아닙니다. 어차피 단기간 내에 결과를 내는 위원회가 아니라 좀 시간이 걸려도 내실있게 시민의 요구를 받아안고 현실적 여건도 고려하기로 한 위원회라면서요? 대전이나 충청남도의 발전계획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허허. 이거 보세요, 의원님. 아무리 대흥시가 작은 도시라지만, 발전계획이라는 건 시 전체의 미래 설계도와 같은 겁니다. 그런 중요한 걸 충분히 고민하고 공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
“내 욕심 같아서는 공부는 한 일 년 하고 싶은데, 공부만 하다 시간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가면 병행할 수 있겠죠. 그래도 위원회 끝날 때까지 공부라는 건 계속해야 할 겁니다.”
깜빡, 깜빡.
서태기와 장민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데, 윤종일 교수가 두 사람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도시 계획이라는 건 절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시민들에게 혜택이 안 돌아가고 엉뚱한 놈들만 배를 채우거든요.”
“......”
“허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그런 놈들 많이 상대해봤으니 위원들에게 그런 검은 잇속을 가진 이들 배제하는 노하우도 교육할 테니까요.”
“......”
윤종일의 말에 말문을 잃은 두 시의원을 보며 도훈이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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