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또 다른 관리 – 1.
6월 말 날씨 좋은 수요일의 대흥시청 시장 집무실.
날씨가 좋았고 시장도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인지 비서실 분위기도 좋았다.
분위기야 어쨌든지 간에, 취임 후 세 번째로 맞이하는 6월이고 업무에 완전히 적응했건만 시장과 비서실이 바쁜 건 여전했다.
“지연 씨. 재난안전팀장님한테 혹서기 위기점검 리스트 갖고 바로 올라오라고 전해주시고, 다음으로 재해대책팀장님은 한 10분쯤 뒤에 재난대비 긴급대응 매뉴얼 업데이트된 것 갖고 오라고 해주세요.”
“네, 시장님.”
미소 띤 도훈의 말에 지연도 웃으며 답하고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매년 살인적인 더위와 강력한 태풍이 계속 이어지는 터라 혹서기 순찰 계획도 확인해야 했고,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조 및 복구 등의 활동지침을 점검해야 했다.
곧 두진과 재난안전팀장이 시장실에 들어섰고, 셋은 소파에 앉아 서류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혹서기 순찰 계획은 좀 보강됐나요?”
“네, 시장님. 기존 우리 시청과 주민센터 직원, 경찰관 중심으로 행해지던 것에 의용소방대원이 포함됐습니다.”
“인원이 늘어나면 순찰을 더 꼼꼼히 할 수 있긴 하겠네요. 차량이나 활동 비용과 관련한 부분은요?”
“계획서 다음 장을 보시면 적혀 있습니다. 시에서 차량을 직접 지원하고 일일이 금액을 산정하는 것보다 의용소방대에 매일 두 개 팀을 자가 차량을 이용해 운용토록 요청하고 그에 따른 유류비와 소정의 사례금을 합산해 소방대에 일괄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계획을 잡았습니다.”
“운용 검증하는 것도 소방대 쪽에서 동의했습니까?”
“네. 어렵지 않게 동의를 받았습니다.”
올해로 혹서기 외부 순찰이 3년째에 접어들다 보니, 외부에 보여주기식인 부분은 많이 없어지고 실질적인 부분이 강화됐다.
혹서기 순찰이 시작되기 전에 소방서 구급대가 직원들에게 더위 먹은 사람을 발견하고 옮길 때 조치사항들을 사전에 교육하거나 필요한 물품을 더 충실히 챙기는 부분 등이 이에 속할 터.
“교육 일정은 구급대 쪽에 맡겨야 하는 거 아시죠?”
“네.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희보다 그쪽이 더 시간을 쪼개서 써야 하는 처지이잖습니까.”
7월 중순에 대흥 소방서가 개소할 예정이었다.
운계면에 건설된 소방서는 현재 한창 내장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현재의 안전센터는 평상 업무와 소방서 개소 및 이전 준비를 하느라 평소보다 더 바빴다.
소방서 완공은 좀 더 서두를 수도 있었지만, 예비 장비 보관소 및 의용소방대를 위한 사무실과 창고도 같이 짓느라 조금 시간이 더 걸렸다.
그래도 정식 소방서가 개소하게 됨으로써, 비좁은 건물과 간이 건물에 나뉘어 생활하던 소방관들의 애로사항이 대폭 개선될 터.
이는 곧바로 대흥시 주민의 더욱 안전한 생활과 연결될 터였다.
“인원이 좀 더 빨리 충원되면 좋겠지만,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
“소방관이 부족하지 않은 곳은 없으니까요.”
“쩝, 그러게 말입니다. 개소일에 맞춰 제가 소방서에 축하금 보내겠다고 전해주세요. 많지는 않아도 여름 오기 전에 대원들 보양은 한 번 할 수 있을 겁니다.”
“하하.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재난안전팀장이 웃으며 답하고 나가자 두진이 입을 열었다.
“소방서에 축하금 보내실 때, 지구대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지구대 사람들이 요즘 소방서 무척 부러워하고 있다면서요?”
“센터에서 ‘서’가 되면 환경뿐 아니라 변하는 게 많잖습니까.”
“그렇죠. 경찰서도 좀 빨리 생기면 좋겠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경찰서 신설이 급할 만큼 우리 시 치안이 나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죠.”
곧 재해대책 팀장이 시장실에 들어섰고, 셋은 잠시 대화를 이어갔다.
정부에서 만든 표준 재해대책 매뉴얼을 대흥시에 맞게 수정한 것이라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렇게 정리해서 간부회의 때 최종적으로 확정하면 될 것 같습니다, 팀장님.”
“알겠습니다. 간부회의에 맞춰 수정 완료하고, 완료되면 곧바로 주민센터에 매뉴얼 전하고 담당자들 교육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팀장과 논의를 끝낸 도훈이 시계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실로 나갔다.
“지연 씨, 오늘 점심에 의회 의장단하고 식사하기로 한 게 어디였죠?”
“유서면 냉면집이요. 홍 주무관이 차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럼 바로 나가겠습니다. 지연 씨랑 조 비서관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녀오세요, 시장님.”
도훈과 웃으며 인사하고 나가자 영배가 중얼거렸다.
“이번 주 들어 묘하게 활기차고 웃음이 많아졌는데···.”
“누구, 시장님이요?”
“네. 지연 씨도 느꼈죠?”
“느꼈죠. 이유는 몰라도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시는 걸요.”
“흐음, 지난주에 좀 이상하다가 월차까지 쓰더니···, 이번 주엔 반대로 기분이 ‘업’ 되어 있단 말이죠. 뭔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영배가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지연이 타박했다.
“조 비서관님. 두 분이 ‘절친’이라는 건 아는데, 그래도 개인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런데 궁금하잖습니까.”
“별것이 다 궁금하시네요. 원래 시장님이 눈치 보면서 일하게 하는 분은 아니지만, 지난주보다 이번 주는 마음이 편하니 좋기만 한데요.”
“하하, 그렇긴 하죠. 쩝.”
도훈이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도 티를 내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잘 웃고 활기차게 행동하는 게 직원들에게 더 마음 편한 건 당연지사.
지난주 자주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것에 비교하면 아주 확연히 달라졌으니 영배가 뭔 일 있었냐고 물었지만, 도훈은 답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절친’이라도 ‘세경 씨가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는 얘기까지 해야 하는 건 아니잖은가.
“먼저 식당 갔다 오실래요, 아니면 제가 먼저 갈까요?”
“먼저 다녀오세요. 오늘은 제가 늦게 가겠습니다.”
“알았어요. 다녀올게요.”
지연이 점심을 먹기 위해 나갔고, 비서실에 남은 영배는 소파에 드러누운 순심이 옆에 앉았다.
“순심아, 주말에 네 주인한테 뭔 일 있었지?”
끼잉?
“있었지? 그렇지?”
끼잉.
“... 하하. 에휴,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이라니?”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만 내는 순심이 곁에서 영배가 스스로 한심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약속장소로 향하는 승합차 안.
“지난주와 비교해 표정이 밝으십니다.”
“개인적인 일인데 고민하던 게 풀려서요.”
“다행이네요.”
“하하, 네.”
웃으며 답했지만, 도훈은 두진에게도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월차를 내고 아버지께 가서 이런저런 어머니의 무용담을 들은 뒤, 아버지가 도훈에게 내려준 결론은 이랬다.
- 그건 일단 네가 혼자 끙끙댈 문제가 아니야. 그 아가씨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우선이지. 만나서 솔직히 물어봐. 상대 생각이 어떤 건지 알아야 대화를 하든 포기를 하든 할 거 아니냐. 그리고 이건 내 사견이다만, 그런 건 설득하고 어쩌고 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결론적으로, 도훈은 아버지의 충고대로 세경에게 얘기를 했고, 세경은 도훈이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가족이 함께 겪어야 할 일을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답했다.
도훈이 고민했던 것에 비하면 그녀의 답은 너무 선선했다.
세경은 오히려 그런 걸 걱정한 도훈이 자신을 과소평가했다고 살짝 타박하기까지 했다.
그런 솔직한 대화의 영향인지, 세경과 도훈의 관계에 중요한 진전도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세경은 이렇게 말하며 확실히 못을 박았다.
- 우리가 미래에 정말 결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우리가 결혼하고 도훈 씨가 정치인의 길을 걷는다면 전 그런 도훈 씨를 지지할 거에요. 왠지 도훈 씨는 어긋난 정치인이 될 것 같지 않거든요. 대신에, 무조건 희생하지도 않을 거예요. 세상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잖아요? 정치인 배우자가 꼭 내조만 하라는 법은 없죠. 저도 제 사회생활이 소중하고 계속해 나가고 싶어요. 도훈 씨도 그런 절 지지해 줄 수 있죠?
답은 물론이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니까.
현실적인 제약은 있겠으나 그 제약이 옳지 않은 거라면 바꾸려고 시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강정문이 던진 ‘자기 관리’에 대한 질문에 도훈은 흔들리지 않고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게 마음이 편해진 도훈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지난주 종종 멍해져서 직원들이 신경 쓰게 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활기차게 일하고 있었고 말이다.
그 좋았던 기분을 그대로 갖고 도훈은 시의회 의장, 부의장과의 점심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심남진과 신길영은 미리 도착해 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먼저 와계셨군요.”
“우리가 좀 일찍 나왔습니다. 어서 앉으세요.”
사과하는 도훈을 심남진이 웃으며 맞이했다.
“두 분이 같이 식사하자고 청하시다니, 제가 오면서 좀 긴장했습니다.”
“흐음. 긴장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썩 듣기 좋은 얘기는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일단 밥은 먹고 이야기하죠.”
“그러시죠.”
냉면에 만두를 주문해 식사하는 동안 심남진 의장과 신길영 부의장은 용건을 꺼내지 않았다.
분위기를 맞춰주느라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고서야 도훈이 용건을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시 발전계획 수립 준비위원회 일입니다.”
“위원회요? 그게 왜요?”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흥시 발전계획을 논의하기로 한 이 기구는 이제 조금씩 모양을 갖추는 중으로 아직 어떤 인물들로 구성할 것인지도 확정되지 않았다.
시장인 도훈이 위원장을 맡고 시의회 의장 혹은 부의장이 부위원장을 맡으며 의회에서 추천한 인물을 참가시키고 시민들의 직접 참여 혹은 추천을 받은 사람도 포함한다는 게 지금껏 논의된 전부였으니까.
“시민 위원 지원이나 추천은 성과가 좀 있나요?”
“이제 막 홍보하는 단계라서 이름이 거론되는 분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활동 시작을 8월 이후로 잡아서 아직 시간도 좀 있고요. 그런데 왜···?”
도훈의 질문에 묵묵히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던 신길영이 답했다.
“위원회 구성을 좀 신중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 신중히요?”
“네.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신길영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하자 도훈이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이유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도훈이 정색하고 묻자 심남진이 답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요.”
“엉뚱한 생각이요?”
“네. 발전계획 수립이 ‘돈’이 될 거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도훈이 심남진의 말 속뜻을 드디어 알아챘다.
발전계획은 무언가를 짓거나 만드는 일과 관련될 수 있으니 부동산, 건설 등에서 이익을 노리는 이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것일 터.
“위원회가 구성돼도 그런 논의까지 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리고 전 그 위원회에서 그런 정보까지 논의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제 임기 내에 그런 논의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갈 거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고요.”
“시장님 생각은 우리도 잘 압니다. 그런데, 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면 쥐고 흔들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도훈은 의회에 이 위원회를 공동으로 운영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시민 의견 수렴과 지역 여건을 고려한 장기적 논의를 책임지는 것으로 못을 박았다.
이권이 개입되는 논의 자체를 위원회에서 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의회 의원 중 도훈과는 생각이 다른 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제 버릇 남 못 주는 경우이거나.
“또 그분들입니까?”
도훈이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심남진이나 신길영, 말없이 미간을 찌푸리고 듣기만 하는 두진도 ‘그분들’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아요. 쩝, 내가 시의회 의장이라는 게 창피합니다.”
“... 허허. 비슷한 심정입니다.”
의장과 부의장이 탄식하듯 하는 말에, 도훈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습니까?”
“글쎄요. 직접 묻고 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대체로 시장님 의견과 비슷하지 않겠어요? 시의원 자리가 그런 식으로 이권 챙기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 흐음.”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정리하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시급하다고 할 순 없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시 발전계획 수립은 중요한 일입니다. 구더기 무서워 된장 안 담글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말이야 맞는데··· 어쩌려고요?”
씁쓸한 표정으로 묻는 심남진 의장에게 도훈이 담담히 답했다.
“구더기 관리를 잘해야겠죠.”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그분들’을 떠올린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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