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78화 (179/279)

178. 자기 관리 – 2.

“결혼은 할 생각입니까? 혹시, 독신주의자는 아닌가요?”

“... 그, 그게···.”

질문 하나에 도훈이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강정문과 김용진은 주로 도훈 때문에 당황한 적은 있어도 도훈을 당황하게 한 적이 거의 없어서 이런 도훈의 모습이 더 이채로웠다.

“왜 그렇게 당황해요, 시장님? 찔리는 거라도 있어요?”

“... 그건 아닌데···.”

“하하. 김 시장이 도청 직원분하고 사귄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요즘에 대흥시에서도 데이트하셨다던데요.”

“......”

“완전히 공개한 건 아니더라도 거리낄 건 없다는 뜻이잖습니까? 그럼 그분과 논의하지 않았더라도 생각은 해보셨을 것도 같은데···. 아닌가요?”

“......”

김용진의 말에 답하지 못한 도훈이 강정문의 눈치를 살폈다.

김용진의 말처럼, 도훈이 도청 과장인 민세경과 연애 혹은 데이트하는 걸 아는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 민세경이 강정문과 외사촌 관계라는 걸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담담히 웃기만 하는 강정문을 보니 김용진 역시 세경과 강정문의 관계를 모르는 듯했다.

“당··· 장 결혼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독신주의자는 아닙니다.”

“그래요? 그럼 결혼할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움찔.

다시 도훈이 즉답을 못 하고 움찔한 것은 조금 전처럼 질문한 사람이 강정문이기 때문일 터.

세경과 관계없는 사람이 물었더라면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거나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강정문은 세경의 친척이니까.

그것도 이름만 친척인 게 아니라 강정문이 외사촌 동생인 세경을 무척 아끼는 그런 가까운 친척.

‘저 양반이 왜 갑자기 기습공격을 퍼붓고 그러지?’

머쓱한 표정으로 웃으며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 김용진이 도훈을 꼬실 때는 김형일 사건 뒷얘기를 들먹이더니 이야기가 ‘자기 관리’로 이어졌고, 이제는 뜬금없이 도훈의 결혼 얘기가 나오고 있으니까.

강정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무척 진지했기에 도훈은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 양심상 제대로 준비를 했다고는 못하겠죠.”

도훈에게 빚은 없지만 가진 재산이라야 전셋집 보증금에 승합차 한 대, 거기에 약간의 저축이 전부였다.

전세 보증금이 큰 금액은 아니고 차도 무면허 음주운전에 대한 배상으로 받은 것.

시장이 되고 받은 월급은 자신과 영배의 용돈으로 쓴 돈 외에는 거의 그대로 통장에 있어서 저축이 초라한 수준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그런데, 강정문은 그런 물질적인 부분에 관해 물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결혼할 준비를 말한 건 재산을 얼마나 모았냐는 뜻이 아니에요.”

“... 그럼···?”

도훈이 반문하자 강정문 대신 김용진이 답했다.

“시장님. 시장님이 계속 공직을 꿈꾼다면, 시장님 부인과 태어날 가족도 그 영향을 받습니다. 가족을 쫄쫄 굶길 수야 없으니 재산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시장님이 결혼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그런 시장님의 선택을 지지하고 함께하느냐의 여부가 아니겠어요?”

“... 아.”

도훈은 김용진의 말에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애매한 감탄사를 흘렸고, 강정문과 김용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됐다.

강정문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김 시장, 앞으로 세상이 좀 더 좋게 변하겠지만, 아직 정치인과 결혼한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사회생활을 존중받기보다는 누군가의 배우자로 인식되는 면이 커요.”

“... 네.”

“유명 연예인의 경우에는 배우자를 언론에 전혀 노출하지 않는 방법을 쓰기도 하죠. 정치인 중에도 그런 분들 없지 않아요. 하지만, 완전히 가리는 게 불가능하죠.”

“......”

“ 때문에, 당연히 아직은 정치인의 배우자가 감당하거나 희생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난 김 시장이 그런 부분에 대해 생각해 봤고 김 시장이 사귀는 분에게 이걸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용기가 있냐고 물은 겁니다.”

“......”

도훈은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솔직히 꼭 세경과 결혼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앞으로도 세경과의 관계가 순조롭게 풀리면 도훈의 결혼 상대는 아무래도 그녀가 아닐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세경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진지하게 임하고 있으므로 진도도 빠르지 않고 혼자서 너무 앞서 나가지 않으려는 게 연애에 임하는 도훈의 자세.

그래서 강정문과 김용진이 언급한 부분은 솔직히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도지사님도 그러시겠지만 나도 와이프와 그런 과정을 겪었어요.”

“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 것은 김용진.

“내 경우엔 곧바로 정치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공적인 부분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런 거였죠.”

“그러셨군요.”

“난 아직도 그날이 생생해요. 아주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와이프에게 얘기를 꺼냈어요. 그런데 와이프가 대수롭지 않게 인생 뭐 있냐고, 뜻을 품었으면 도전해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와이프가 응원해 줘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결과적으로 그게 날 국회의원이 되게 했습니다. 난 나대로 와이프는 와이프대로 각오라는 걸 하고 몇 번이나 그걸 새롭게 다잡고 그랬습니다.”

“......”

“그런데도 와이프가 마음고생 적지 않게 했어요.”

“... 네.”

“그럴 때마다 내 괜한 욕심 때문에 와이프한테 죄짓는 게 아닌가 하고 나도 고민 많이 했고요.”

“......”

대화는 김용진과 했지만, 도훈의 시선은 강정문을 향해 있었다.

이제 재선한 김용진의 경력은 강정문에 비해 많이 짧다.

강정문이 4선을 하는 동안 국회의원 선거에 떨어진 적이 거의 없고 지금은 도지사를 하고 있다지만, 그의 정치인생에 굴곡이 왜 없었겠는가?

담담히 도훈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강정문이 입을 열었다.

“배우자와 상의하고 이해를 구하고, 마음고생 할 때 다독이고 달래고 기운 북돋워 주고···. 그뿐이 아니라 아이들이 생기면 그 아이들에게도 신경 써야 하죠. 부모나 형제는 물론이고요.”

“......”

“그런 부분도 엄연히 자기 관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김 시장.”

“... 네.”

도훈은 조금은 숙연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고, 강정문의 말이 이어졌다.

“이젠 자기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겠어요?”

“......”

딴 때 없이 진지해 보이는 강정문의 질문에 도훈이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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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강정문, 김용진과 식사를 함께하기로 한 목적은 전혀 이루지 못하고 토요일 저녁이 지나갔다.

일요일은 출근하지 않기로 해서 도훈은 밀린 집안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거의 대청소 수준으로 집을 번쩍번쩍 빛날 정도로 쓸고 닦은 이유는, 일부러 몸을 움직여 생각이라는 걸 할 여유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강정문과 김용진이 언급한 ‘자기 관리’라는 말이, 그리고 그 말에 도훈 혼자만이 영향받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으므로.

“시장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아뇨.”

“어제오늘 멍하니 무슨 생각에 빠져 계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는 것 같은데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화요일 오후, 지연의 말을 웃으며 얼버무리는 도훈은 속으로 뜨끔했다.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자기 관리’에 관한 생각에 빠지는 건 아무래도 일요일에 있을 세경과의 데이트를 마음에 두었기 때문일 터.

거의 매일 전화나 ‘톡’으로 연락하고 있는 두 사람은 평소 각자의 일상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일요일에 얼굴을 마주한다면 아무래도 ‘그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내 생각부터 정리해야겠다는 건데···.’

세경을 만나기 전에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정작 도훈의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이리저리 마구 통제가 안 되고 뻗쳐나간다는 게 문제.

‘온갖 경우의 수를 다 상상하고 있으니···.’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부분이라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조상님은 무척 지혜로운 양반이지만, 이 주제에 한해서는 적절한 상담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생존했던 시대는 남자가 벼슬을 하는 등 사회생활을 하고 여자가 집안을 책임지며, 남자가 겪는 풍파를 가족이 올곧이 감내하는 게 상식이었으니까.

‘이건 영배 형이나 진주에게 상담하기도 뭐하고···. 아!’

한참을 고민하던 도훈의 뇌리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쳤다.

도훈과 비슷한 고민을 했을 가능성이 무척 큰 사람임과 동시에 도훈이 아주 마음 편하게 상담을 청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다만 문제가 좀 있었다.

‘이건 전화로 얘기하는 좀 그런 주제인데···.’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조상님이 참견했다.

- 얼굴 마주하고 얘기하다가 등짝 얻어맞기 좋은 주제이기도 하지.

“그럴까요?”

- 아마도?

“...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뭐.”

마음의 결정을 내린 도훈이 시장실 문을 열고 비서실에 있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저 목요일에 월차 좀 내겠습니다.”

“... 뭔 차요?”

“월차요. 목요일에, 그러니까 내일모레 월차 쓴다고요.”

“......”

두진부터 시작해 비서실 직원 모두가 말문을 잃고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이 시장에 취임하고 월차를 쓰는 게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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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오전 이른 시각.

컹컹! 컹! 컹컹컹!

왈! 왈왈!

개들이 정답게 마당에서 뛰노는 가운데 도훈이 현관문을 열었다.

“저 왔습니다, 아버지.”

“... 오냐.”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는 뭔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뭔 일이야?”

“어제 전화로 말씀드렸잖아요. 상담할 게 있다고.”

“무슨 일이길래 밭에도 나가지 말고 기다리래?”

“중요한 일입니다.”

불만스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훈의 아버지는 그쯤에서 말을 끊었다.

자신이 시장 일에 집중하라고 집에도 자주 오지 못하게 했는데, 이렇게 평일에 월차까지 내고 상담할 게 있다고 찾아오는 건 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얘기해 봐.”

도훈이 테이블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말했고, 도훈이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자기 관리라는 걸 어떻게 하셨었나요?”

“자기 관리? 어떤 자기 관리?”

“그러니까···.”

도훈의 아버지 김인식 씨는 아들의 말을 한 번도 끊지 않고 집중해서 들었다.

“... 그래서 요즘 그런 고민이 들더라고요.”

꽤 긴 설명을 표정의 변화도 없이 듣던 아버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네가 뒤늦게라도 철이 들긴 드는 모양이구나.”

“... 철이라뇨. 저 곧 마흔입니다.”

“사람이 철 드는 건 나이랑은 상관없어.”

“... 아니, 그건 그렇지만···.”

“시끄러워.”

“......”

아들을 침묵시킨 도훈의 아버지가 한쪽 벽에 걸린 액자들에 시선을 줬다.

도연이가 태어나기 전에 찍은 아버지, 어머니, 도훈의 옛 사진을 확대해서 출력한 가족사진과 비슷한 크기의 초등학생 도연이의 독사진.

도연이의 독사진은 가족사진에 왜 자기가 없냐고 항의했던 녀석을 달래기 위해 나중에 붙인 것이었다.

가만히 사진들을 보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너, 내가 예전에 형사였다는 거 알지?”

“알죠.”

“내가 좀 집요한 형사였다는 건 아냐?”

“... 집요하셨다는 건 모르겠고 능력 있는 형사라고 불리셨다는 건 들은 적 있습니다.”

“능력이 있었으면 그렇게 집요하질 않았겠지. 난 머리보다 몸으로 뛰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도훈의 아버지 김인식 씨는 둘째 도연이가 태어난 뒤 아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계속 형사로 경찰생활을 했었다.

아버지의 옛 동료 중 형사 출신들에게 ‘네 아빠가 얼마나 유능한 형사였는지 아냐?’하는 얘기를 도훈은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다.

“몸으로 뛴다는 건 나쁜 놈 잡겠다고 퇴근 안 하고 죽으라고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네.”

“네 엄마가 그런 나를 감당해줬으니 내가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었지. 가끔 집에 제때 들어오라고 바가지는 긁었다만, 못 살겠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안 했으니까.”

“... 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나쁜 놈들도 머리 돌아가고 집요한 건 마찬가지거든.”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아버지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집요하게 자기들 쫓아다니는 나를 직접 노리기도 했지만, 내 약점을 노린 적도 있었다.”

“약점이요? 설마···.”

도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아버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그래. 너와 네 엄마.”

“......”

“너는 어려서 기억이 안 나는 것 같다만, 네 엄마는 험한 일 당할 뻔한 적도 있었어.”

“......”

“너 지킨다고, 부엌칼 들고 조폭한테 달려들기까지 한 사람이야, 네 엄마가.”

“......”

말문을 잃은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입에서 아들이 상상도 못 한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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