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첫 행사 – 1.
도훈이 심남진에 전한 팁은 이랬다.
- 유서면·남가동 지역의 지인 중 작고 보잘것없어도 좋으니 친목단체활동을 하거나 주변에 발이 넓은 그런 사람과 자주 만나라. 그리고 그런 이들과 만난다는 걸 자연스럽게 송지은 의원에게 알려라.
심남진은 도훈이 일러준 대로 유서면, 남가동에 사는 지인들과 약속을 잡고 그 얘기를 송지은이 듣게 했다.
마침 임시회가 열리는 중이고 같은 당 소속이라 활동반경이 비슷한 송지은이 심남진의 스케줄을 알게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배드민턴 동호회 부회장, 고등학교 동기회 회장, 학부모회 모임, 카페 운영자들 모임 등 특별한 것 하나 없지만, 동네에서 인맥을 풀어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
송지은은 그런 심남진의 ‘지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심남진이 유서면·남가동 지역에 더 많은 지인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다음에 심남진이 송지은을 본격적으로 공략했다.
“송 의원, 내가 의장이 돼도 송 의원이 관심 두는 의제 밀어주는 건 할 수 있어요. 다만, 나든 서 의원님이든 합리적 수준을 넘어서는 건 도와줄 수 없을 겁니다. 김도훈 시장이 수용할 리가 없으니까요. 송 의원도 김 시장 어떤 사람인지 알만큼 겪어봤잖아요?”
“나도 대흥시 유지들 많이 압니다. 그중에 유서면, 남가동 사는 사람도 많죠. 서 의원님이 주선해 줄 수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주선해 줄 수 있는 사람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밑바닥 민심이 중요하다고 하죠. 요 며칠 보셨듯이 난 친하게 지내는 사람 많아요. 아주 평범하고 다른 이들과 관계가 좋은, 다시 말해 주변 평이 좋고 인맥도 다양한 이들이죠. 그들과 친분을 맺으면 송 의원에게 득이 되면 됐지 실은 아닐 겁니다.”
심남진의 ‘인맥’의 가치를 알아본 송지은은 그렇게 심남진의 담담한 설득에 넘어갔다.
심남진이 도훈에게서 팁을 전해 듣고 채 열흘도 안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혜진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던 서태기가 뒤늦게 송지은의 눈치가 이상하다는 걸 알게 된 건 후반기 의장단 선출이 코앞으로 다가온 시기.
송지은이 심남진을 선택한다면, 서태기는 차혜진의 표를 얻어도 의장이 될 수 없다.
서태기가 다급히 송지은에게 접근했지만, 송지은은 그새 심남진의 인맥에 확신을 갖게 된 그런 상황이었다.
아무리 능수능란한 서태기라 해도 그런 송지은을 돌려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서태기는 차혜진과 송지은 둘 모두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의장단 선출일을 맞이해야만 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시장실 문을 열고 들어선 건 두진.
“의장단 뽑혔답니다.”
“그래요? 누구랍니까?”
“의장은 심남진 의원이고 부의장이···.”
“신길영 의원이 맞는답니까?”
“그렇다네요.”
“하하, 의외네요.”
부의장인 심남진이 후반기 의장이 되는 건 예상했지만, 도훈도 진평당 소속의 신길영이 부의장이 되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의회 사무과장에게 들으니 심남진 의원이 먼저 권하고 안준식 의장이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었답니다. 송지은 의원도 덩달아 신 의원을 지지한 것 같더군요.”
“흐음.”
“아무래도 심남진 의원이 서태기, 장민호 두 의원과는 관계가 좀···.”
“네. 그렇겠죠.”
서태기는 자신의 의장단 파트너로 장민호를 미리부터 택해 움직였었다.
아무리 적을 잘 만들지 않는 주의인 심남진이라 해도 직전까지 경쟁하던 서태기와 함께 하던 장민호가 부의장이 되는 게 부담스러웠을 터.
안준식도 아무리 같은 당 선배이고 동료라고는 해도 서태기, 장민호에 대한 신뢰가 거의 없으니 고심 끝에 신길영을 지지한 모양이었다.
“당은 달라도 의외로 잘 꾸려나가실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심남진은 둥글둥글한 성격이고, 신길영도 단호할 때 단호해서 그렇지 까칠한 사람이 아니었다.
국회라면 몰라도 기초의회에서 소속정당의 당색을 드러낼 일은 많지 않았다.
자주 당색을 드러내는 차혜진이 특이한 케이스라 할 수 있을 터.
새 의장과 부의장의 성품과 성향을 보면, 찰떡궁합까지는 아닐지라도 큰 무리 없이 의회를 운영할 수 있을 것으로 도훈은 생각했다.
“저희로서는 다행이네요.”
“그렇고 말고요.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뭘 말씀이십니까, 실장님?”
궁금해 죽겠다는 두진에게 담담히 반문하는 도훈은 여전히 심남진과의 일을 비밀로 하고 있었다.
딱히 숨겨야 할 대화를 한 건 아니지만, 굳이 아는 사람을 늘려서 좋을 거라고도 생각되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계속 모른 척하실 겁니까?”
“아는 게 없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건데요, 뭐.”
“... 에휴. 이제 의장씩이나 된 심 의원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한숨을 내쉬는 두진의 모습에 도훈이 담담히 웃더니 말을 이었다.
“의장단 바뀌었으니 의원들과 식사 한번 하는 게 맞겠죠?”
“네. 그게 좋겠습니다.”
“일정 잡아주세요, 실장님.”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마침 생각난 업무지시를 내린 도훈이 시계를 봤다.
“점심시간 다 됐네요. 나가시죠.”
“알겠습니다.”
외부에서 점심을 먹는 날이라 두진, 영배와 함께 청사를 나서는 도훈의 눈에 의회 건물을 나서는 의원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결과를 모르고 저 장면만 봤어도 대충 짐작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옆에 섰던 영배의 말에 도훈이 맞장구를 쳤다.
환하게 웃는 심남진과 신길영에 뒤이어 담담한 얼굴의 안준식과 송지은이 나왔고,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서태기, 장민호가 뒤를 이었다.
마지막에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확 구긴 차혜진까지.
잠시 의원들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도훈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오늘도 밥이 맛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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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금요일 저녁, 시청 앞 삼겹살집.
“안 의장님은 고생 많으셨고, 심 의장님은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 이제 의장 아니니까 독하게 굴 겁니다. 각오하세요, 시장님.”
“겁부터 주시는 겁니까? 중간에서 잘 막아주셔야 합니다, 심 의장님.”
“애써보겠습니다, 허허.”
안준식과 심남진에게 인사한 도훈은 다른 의원들과도 인사를 나눈 뒤 신길영과 마주 앉았다.
“축하드립니다, 의원님.”
“고맙습니다.”
부의장 자리가 거창한 감투는 아니지만, 활동비가 따로 지급되는 등 의정활동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일을 열심히 하는 의원이라면 더더욱 그럴 터.
“앞으로는 부의장님이라고 불러야겠습니다.”
“어우, 그러지 마세요. 나부터가 닭살이 돋아요.”
“하하.”
신길영은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닭살이 돋는 듯한 모습으로 팔까지 긁으며 말했다.
“앞으로 익숙해지셔야죠.”
“그런 거 익숙해지지 않아도 시의원 하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쩝.”
“좀 있다가 또 얘기하시죠.”
“네, 그러세요.”
의원들뿐만 아니라 의회 사무과 직원도 전부 참여한 회식이었기에 도훈은 직원들과도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훈이 직원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의원들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몇몇 자리가 비어 있었다.
“다들 어디 가셨어요?”
자리에 앉은 도훈이 속삭이자 내내 의원들과 함께 있던 두진이 피식 웃고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이 있다고 가셨습니다. 조용히 나가시더군요.”
“흠.”
딱 밥만 먹고 일어선 차혜진은 인사는 하고 갔기에, 도훈도 알고 있었지만 서태기와 장민호는 조용히 빠져나간 모양.
‘... 아직도 속이 쓰린가?’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신길영이 말을 걸어왔다.
“아, 시장님. 제가 시장님께 전할 말이 있습니다.”
“저한테요?”
“네. 대전·충남 지역 진평당 신입 청년 당원 연수가 조만간 우리 시에서 열릴 것 같아요.”
“우리 시에서요?”
“네.”
“정말이세요, 신 의원님?”
“하하, 네 진짭니다.”
도훈에 이어 송지은까지 되물었던 이유가 있었다.
대흥시는 호텔도 없고 연수원 같은 곳도 없어 사람들이 모여 숙박하고 회의까지 할 장소가 적당치 않았으니까.
“몇 명이나 참석할 예상인데 우리 시에서 한다는 겁니까?”
“그건 가봐야 알죠. 1박 2일 예정으로 열리는데, 아마 100명 이상은 참석할 거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 대표님도 오실 거고요.”
“음, 숙소나 회의 장소 등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숙소는 모텔을 통째로 빌릴 예정입니다. 싸게 해주시겠다는 분이 있거든요. 회의 장소는 학교를 생각하고 있고요. 주말에 열리는 행사니까 좀 번거롭기는 해도 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주최하는 쪽에서 가능하다니 도훈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멋지게 이런 행사를 유치할 공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더라도 외부에서 손님이 오는 건 나쁜 일은 아닐 테니까.
그런데 신길영의 용건은 따로 있었다.
“그 자리에서 잠깐 강연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 강연이요?”
“네. 어차피 시장님이 인사 오실 수 있을 행사 아닙니까?”
“그게···.”
도훈은 거절의 말을 하려고 했는데, 신길영이 잽싸게 도훈의 말을 끊었다.
“시장님, 전에 민의당 지역행사 강연 요청받으신 적 있죠? 물론 거절하셨고요.”
“... 있죠. 그런데 그걸 왜···?”
“그때 이렇게 말하며 거절하셨다면서요. 우리 지역에서 벌어지는 행사면 또 모르겠다고요.”
깜빡, 깜빡.
도훈은 말문을 잃었다.
그런 말을 했던 게 사실이긴 한데, 그걸 어떻게 신길영이 알고 있단 말인가?
도훈의 시선이 안준식을 향했고, 안준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역시 좀 놀란 표정인 걸 보면, 신길영이 안준식에게 이 얘기를 들은 건 아닌 듯했다.
답은 신길용 자신이 했다.
“이번 행사를 맡은 분이 김용진 의원하고 좀 친하거든요. 저는 그분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게 누군데요?”
“지난 총선에서 대전·충남에서 당선된 진평당 의원이죠.”
“흐음.”
“큰 행사도 아니니 대흥시에서 하면서 시장님 섭외하는 건 어떠냐고 하시더군요.”
“......”
도훈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도훈의 모습을 시의원들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도훈이 분명히 당황하고 있다는 건 뻔했으니까.
최소한 시의회에서는 절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도훈이 아니던가.
“의장님, 무소속 시장이 특정 정당의 행사에 가서 인사를 하는 건 몰라도 강연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도훈이 담담하게 물었지만, 그 의도가 거들어 달라는 것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전 이제 곧 임기 끝나니까 이 일은 중립입니다. 후반기 의장님께 넘기죠.”
안준식이 웃으며 말했고, 심남진이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진평당 행사에 가시고 다음에 민의당 행사에도 오세요. 대자당이나 다른 당에서 행사하시면 거기도 가시면 되겠네요. 대흥시 외부라면 모르겠는데, 시내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강연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저···.”
“역시 의장님이십니다!”
도훈의 말을 끊은 신길영이 반색했고, 심남진이 말을 이었다.
“저도 부의장님께 잘 보여야죠.”
“......”
심남진이 신길영과 잘 지내려는 건, 총선 이후 여당이 진평당과 협력관계를 강화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
이유가 어찌 됐든, 도훈이 강연 요청을 거절할 명분이 더는 없었다.
“... 어쩔 수 없군요.”
쓰게 웃으며 말하는 도훈의 손을 신길영이 덥석 잡더니 위아래로 흔들었다.
“고맙습니다, 시장님. 하하!”
“... 네.”
“잘하실 겁니다. 예전에 모교에서 하셨던 만큼만 해주시면 대성공일 것 같습니다.”
“... 네.”
도훈은 떨떠름한 표정이 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대전에 진평당 의원이 둘인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가만히 잘 있는 나를 왜···.’
“나중에 우리 민의당 행사 때도 부탁드려요, 시장님.”
“... 물론이죠.”
“호호. 시장님이 강연한다고 하면 젊은 당원들이 좋아할 거에요.”
“......”
말하는 송지은은 물론, 안준식과 심남진도 담담히 웃고 있었다.
‘왜 하필 오늘 일찍 자리를 비워서···.’
이 자리에 없는 세 의원이라면, 어떻게든 시비를 걸었을 테지만 없는 걸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도훈의 첫 정당 행사 참여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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