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공감능력 – 2.
다행히 차혜진이 도훈의 집무실에 쳐들어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차혜진이 송지은의 머리를 쥐어뜯는 ‘사태’도 생기지 않았다.
- 차 의원 제안서에 서명했던 사람들, 전부 자기 빼달라고 한 뒤에 송 의원 제안서에 서명했어요. 차 의원 제안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안 남았단 말이에요. 몇 명은 차분히 설득해야 했지만, 결국 마지막엔 다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네요.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면, 뭐가 일이 되도록 하는 방향인지 모르지 않겠지. 뭐, 이 정도면 차 의원도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지 않겠어요?
반려동물공원을 원하는 개 주인들이 자기들끼리 논의해 무엇이 더 현실적인지 판단하고 그에 적합한 사람을 ‘선택’하고 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까지 했다는 얘기.
‘우리 시민들도 보통이 아니라니까.’
전화번호를 받아놨던 노인과 통화를 한 뒤 도훈은 그렇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우매한 대중’ 어쩌고 하는 얘기를 하지만, 이 시대의 시민들은 그러한 편견이나 단정을 스스로 이렇게 깨버리질 않는가.
좀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도훈이 그렇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거듭 입에 올리는 ‘주민자치’의 원리가 올바르게 작동한 좋은 예라고나 할까.
차혜진이 잠잠한 이유, 아니 잠잠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시민들과 올바르게 ‘교감’ 혹은 ‘소통’하지 못했다는 걸 뒤늦게나마 깨달았기 때문일 터.
다만, 그런 깨달음이 그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도 인식하고 변화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지 나가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일이 잘 안 풀려 유감입니다.”
“... 흥!”
시청 구내식당에서 우연히 차 의원과 마주친 도훈이 그렇게 위로의 말을 했건만, 차혜진은 세게 콧방귀만 뀔 뿐 입도 떼지 않았다.
또각, 또각, 또각.
냉기를 쌩쌩 내뿜으며 멀어지는 차 의원의 모습에 도훈 옆에 있던 영배가 이렇게 탄식했다.
“... 오래가겠네요.”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걱정이네요.”
“동대문에서 뺨 맞고 어디 가서 화풀이한다더니··· 딱 그 짝입니다.”
“누가 아니래요.”
솔직히 말해, 차혜진이 화를 낼 대상은 도훈이 아니었다.
도훈은 좋은 마음으로 그녀와 시민들을 연결해 준 것 말고는, 이 ‘공원’ 건에 관해서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차혜진은 너무도 거창한 제안서를 민원실에 들이밀기만 했을 뿐, 그 전이나 후에나 도훈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물론, 도훈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긴 했지만, 송지은 의원처럼 도훈을 통했더라면 ‘이 제안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을 터.
도훈이 했던 말이 있으니 상의하지 않은 건 이해한다고 쳐도, 민원실 팀장에게 ‘시장이 관심을 둔 일’이라고 으름장까지 부렸던 건 명백한 잘못이 아닐 수 없었다.
여하튼, 도훈은 차혜진에게 잘못한 게 전혀 없음에도 냉대를 당하고 있었다.
‘... 저 사람은 그냥 내가 만만한 걸 거야.’
분명히 화가 났겠지만, 시민들에게 화를 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송지은 역시 적절한 상대가 아니다.
그녀 역시 시의원이 아닌가.
아마 그래서, 지금껏 관계가 ‘좋았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도훈이 ‘짜증’의 대상이 된 것일 터.
멀어지는 차혜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훈이 고개를 가로젓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시장님, 또 차 의원한테 미움받으신다면서요?”
“아, 의장님.”
말하는 거로 봐서는 자초지종을 다 아는 느낌.
“무슨 일인지 아세요?”
“송 의원한테 대충 들었습니다.”
“아, 예.”
“그러려니 하세요. 차 의원도 시장님께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겁니다. 그냥 분을 못 참아서 저러는 걸 테죠.”
“하하,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무작정 시장님 원망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지 않겠어요?”
안준식은 도훈, 영배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영배를 먼저 사무실로 올려보낸 도훈은 안준식과 함께 청사 옆 자판기를 찾았다.
두 사람이 커피를 뽑고 담배에 불을 붙인 직후, 안준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갑자기 웬 한숨이십니까?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그런 일이 있긴 있습니다. 아, 생각해 보니 이거 시장님과도 좀 관련이 있는 문제네요.”
“저하고요? 뭔데 그러세요?”
의아해하는 도훈에게 안준식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저 임기 곧 끝나잖습니까.”
“네? 아, 임기요.”
도훈이 뒤늦게 안 의장의 말뜻을 이해했다.
일반적으로 시의회 임기 4년 중 의장단의 임기는 전, 후반기로 나뉘어 2년.
전반기 의장단의 임기는 올 6월까지이니, 안준식의 의장 임기는 이제 두 달도 채 안 남은 셈이었다.
“알고 있었는데, 요새 엉뚱한 일 때문에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허허, 시민들 일 부지런히 챙기시는 건 좋은데 의회를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물론이죠. 지금까지는 의장님 덕 많이 봤다는 거 제가 제일 잘 압니다.”
“하하. 뭐, 그렇게까지야···.”
“빈말이 아닙니다.”
정색하고 말하는 도훈의 모습에 안준식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도훈이 당선됐을 때,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나이도 어린 시장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행정의 ‘행’ 자도 모를 시장이 어떻게 공무원들을 통솔할 것이며, 의회와 협력해 시정을 펼치겠냐고 비웃는 이들도 많았다.
도훈은 송두진을 비서실장으로 영입해 공무원들에 대한 장악력을 높일 수 있었고, 초선에 담백한 성품인 안준식이 의장이 되면서 노회한 정치인들과 기 싸움, 수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됐다.
이후, 점점 ‘실력’을 드러내며 그런 우려가 쏙 들어가게 한 도훈이지만, 시의회와의 관계를 좋게 풀어갈 수 있었던 건 안준식 덕분인 게 분명했다.
“의장님이 다시 의장 하시면 안 되겠죠?”
“... 뻔한 걸 왜 물어보십니까?”
누가 후반기 의장이 되더라도 안준식처럼 솔직담백한 대화로 일을 풀어가기는 어려울 터.
“다음 의장과 관련해 의회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후보로 나서겠다는 분이 있나요?”
“네, 벌써 셋이나 됩니다.”
“셋이요?”
“네. 셋이요. 아까 봤던 차 의원도 포함해서요.”
“... 하하.”
차혜진이 후반기 의장을 지망한다는 말에 도훈은 헛웃음을 흘렸다.
시의원 일곱 중 대자당 소속은 차혜진이 유일했다.
나머지 여섯 중 민의당 소속이 다섯이고 진평당이 한 명.
차혜진의 당적을 차치하더라도, 그간 그녀는 다른 시의원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중앙당 혹은 도당의 지침에 아주 충실했던 그녀는 개인적 매력으로도 다른 의원들의 지지를 얻기 불가능하다는 뜻.
그런 차혜진이 후반기 의장이 될 가능성은 0%였다.
“다른 분은요?”
“지금 부의장인 심남진 의원하고 다른 한 분은···.”
“서태기 의원입니까?”
“네.”
안준식이 긍정하자 도훈이 입맛을 다셨다.
서태기 의원은 민의당 소속임에도 도훈과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
취임 전에 사석에서 간부 추천을 했던 것부터 시작해, 이런저런 일로 도훈에게 공격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자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그가 도훈과 대립한 게 공익에 대한 의견의 차이라기보다는 그 자신의 이런저런 ‘이익’을 우선한 행동이었다는 것.
물론, 그런 모습을 보였다가 도훈에게 역으로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도훈과 관계가 나쁘기로는 차혜진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쩝.”
“이제야 제 심정이 이해가 되나 보네요.”
같은 당의 선배 의원이긴 하지만, 안준식도 서태기를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민단체 활동가였던 안준식과 지역 토호에 가까운 서태기가 친분은 둘째치고, 같은 당 소속이라는 것부터가 좀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떤 분이 우세합니까?”
“글쎄요. 일단은 심 의원이 유력하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서 의원님이 물밑작업을 열심히 하신다고 하더라고요.”
“물밑작업이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도훈에게 안준식이 답했다.
“네, 물밑작업이요.”
답하는 안준식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4월의 마지막 토요일, 대흥시 운계면의 한 호프.
최신 콘셉트와는 거리가 먼 내부 실내장식이 가게가 제법 오래되었다는 걸 시사하는 가운데, 내부 구석진 자리에 중년의 남자 하나가 앉아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로서는 언감생심이었나?”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하는 남자의 이름은 심남진.
올해 49세인 그는 민의당 소속으로 운계면·금선면 선거구 시의원이었다.
그리고 현 대흥시 의회 부의장이기도 했다.
- 흠, 의원님. 당장 뭐라고 답해드리기가 그러네요. 서 의원님이 하신 제안부터 생각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서요.
어제, 같은 당의 송지은과 저녁을 함께하며 넌지시 후반기 의장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들었던 말.
- 제가 전부터 교육이나 청소년 관련한 일에 관심 많았다는 거 아시죠? 서 의원님 자기가 의장이 되면 그 분야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시겠대요. 시 집행부를 압박해서라도요. 저로서는 고민이 될 수밖에요.
심남진이 크게 충격을 받은 것은 송지은이 서태기보다는 자신과 관계가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심 서태기와 자신이 동시에 의장을 원한다면, 송지은이 분명 자신을 택할 것이라 여겼기에 충격이 더했다고나 할까?
“분명 내가 유리하다고 생각했는데···.”
심남진도 ‘계산’이라는 걸 할 줄 안다.
그가 후반기 시의회 의장에 도전하려 결심한 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현 의장인 안준식과 진평당의 신길영은 둘 다 시민단체 활동을 오래 했기에 그 성향부터가 서태기와 크게 다르다.
서태기보다는 자신을 지지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다.
서태기가 장민호 의원을 확실히 붙들고 있고, 차혜진 설득에 공을 들이고 있다지만, 그래 봤자 송지은을 설득하진 못할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후반기 의장단 선출이 점점 가시화되는 시점에 확실한 내 편이라 여겼던 송지은이 흔들리고 있었다.
“쩝.”
심남진이 입맛을 다셨다.
현역 시의원이라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게 없었다.
안준식처럼 명석한 것도 아니고 서태기처럼 능수능란한 것도 아니며, 장민호처럼 상황판단이 빠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심남진을 평가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수더분하다’였다.
쉽게 척을 지지 않고 이리저리 둥글둥글하게 지내는 게 자신의 장점이라는 걸 심남진 자신도 알았다.
평생 ‘튀는’ 일을 해본 적이 거의 없던 그가 시의회 의장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건 아주 이례적인 일.
시의원 생활도 나름 익숙해졌으니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다는 게 욕심일 수도 있지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랬는데···. 허허.’
심남진이 ‘줄타기’를 하는 송지은을 설득하기는커녕 충격을 받아 혼자 술이나 마시는 자신에게 다시 회의감을 느끼던 순간.
“부의장님 아니십니까?”
심남진이 고개를 드니 김도훈 시장이 서 있었다.
“아, 시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집에 가는 길에 이 앞을 지나치는데, 치킨이 눈에 밟혀서요.”
이 호프집의 주요 안주는 치킨.
전문 치킨집도 아닌데 맥주 마시러 가게를 찾는 손님보다 치킨 배달을 요청하는 손님이 더 많은 그런 가게였다.
“혼자십니까?”
“아, 예.”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하하. 그냥요.”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던 심남진이 말을 이었다.
“같이 한잔하시겠습니까?”
“아, 그럴까요? 하하.”
심남진은 그냥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도훈은 흔쾌히 승낙하고 심남진과 마주 앉았다.
“치킨은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 네.”
“그러고 보니, 부의장님과 단둘이 마주 앉은 건 또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제가 무심했습니다.”
“아이고, 그 반대죠. 제가 진즉에 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중히 말하는 도훈에게 심남진은 담담히 웃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훈이 주문한 500cc 생맥주와 훈제 통닭이 나왔다.
“건배!”
“건배.”
쨍.
심남진이 맥주를 삼키고 치킨을 씹는데,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고민거리라도 있으세요?”
심남진은 가만히 도훈을 바라봤다.
언제나처럼 침착한 도훈의 표정에서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 나이는 어려도 보통 사람이 아니지.’
시의회 부의장으로서 시장 김도훈의 능력을 여러모로 가까이에서 본 심남진.
생각하는 거며 말하는 거며 행동하는 거 하며···.
심남진이 보기에는 어느 것 하나 부족하다고 혹은 공직에 부적합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모든 면에서 우월한 ‘능력자’라고 할 수 있을 정도.
‘까짓것···.’
사석에서 만난 능력자에게 상담을 청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고민되는 게 하나 있긴 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심남진이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지금의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