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69화 (170/279)

169. 오지랖 - 2.

“서운해요, 시장님.”

“... 네?”

“정말 서운하다고요.”

“......”

차혜진 의원이 도훈의 사무실을 찾은 건 이번이 두 번째.

전에는 갑자기 나타나 밀고 들어왔다면, 오늘은 비서실에 전화해 잠깐 만날 수 있겠냐며 양해를 구했다는 게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찾아와 꺼내는 이야기의 황당함은 저번이나 이번이나 매한가지.

“무슨 일 때문에 서운하다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말문을 잃은 도훈 대신 두진이 질문을 던졌다.

“저도 유서면이 지역구잖아요. 모르시는 건 아니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왜요?”

“유서면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해결할 책임과 의무는 저한테도 있답니다, 비서실장님.”

“......”

“유서면 주민들의 일이면 제게 맡기실 수도 있었잖습니까? 제가 아니라 다른 분께 일을 주선하셨다니 서운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서운하다는 말은 하고 있지만, 차 의원의 표정에는 그다지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주 애매한 느낌인 것이, 말투는 평범했으나 표정은 화가 난 걸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쨌든, 말문을 잃었던 도훈이 차 의원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신길영 의원님께 부탁드린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 공업사 일요?”

“맞아요.”

도훈이 새로 인수한 공업사 직원들과 불화를 겪는 손병근 사장을 우연히 만난 게 며칠 전의 일.

자초지종을 듣고 또 다른 유서면 시의원인 진평당 소속 신길영 의원에게 그 불화의 중재를 부탁했었다.

신길영은 당일로 문제의 공업사를 방문해 사장과 직원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준 뒤, 양쪽의 오해를 풀고 화해하도록 주선했다.

손병근 사장은 자신이 마음이 급했고 너무 익숙해진 오랜 말버릇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상처를 줬음을 사과했다.

사장이 먼저 사과하니 직원들도 자신들의 실수 혹은 잘못을 인정했다.

나이 차가 제법 나는 사장을 어렵게만 생각해 업무 시간에 너무 권위적이고 험한 말투를 쓰는 것에 불만을 쌓기만 했지, 회식 등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솔직히 얘기해 사장의 실수 혹은 잘못을 수정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것을.

어쨌든, 신 의원의 중재로 인해 사장과 직원들이 화해했고 그날 저녁 다시 회식을 통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오래 함께하며 앞으로 잘해보자고 결론이 났다는 건 신길영에게 이미 전해 들은 바 있는 도훈이었다.

“저도 싸움 말리거나 화해시키는 거 할 수 있어요. 제게 연락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 아, 예.”

“오늘은 이 말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저도 엄연한 대흥시 시의원이니까, 제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거요.”

“... 그렇군요.”

담담하게 답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간신히 참고 있는 도훈.

“바쁘실 테니 길게 말씀드리지 않을게요.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제게도 기회를 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약속하시는 거죠?”

“... 또 그런 경우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차 의원님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연락을 드리죠.”

“좋아요.”

도훈의 대답을 들은 차혜진은 가식적인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미소를 머금은 묵례를 남기고 돌아섰다.

탁.

차혜진이 나가고 시장실 문이 닫힌 직후.

“... 저 사람 왜 저러는 겁니까?”

“저라고 알겠습니까?”

묻는 두진이나 어깨를 으쓱하며 답하는 도훈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인 건 마찬가지.

“무슨 일이 있었으니까 차 의원이 저렇게 나오는 걸 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소한 그 공업사 일이 동네에 소문이라도 나서 신 의원이 칭찬받으니까 저러는 거겠죠. 저분, 손해 보는 거 정말 싫어하시잖습니까.”

“알아보면 되겠죠. 제가 신 의원에게 전화해보겠습니다. 알아내면 말씀드리죠.”

“네. 그래 주세요.”

두진이 비서실로 나갔고, 홀로 남은 도훈이 의자에 가 앉으며 다시 실소를 흘렸다.

-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데, 애써 그걸 참는 것 같더라.

“... 저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 참, 내 별···.

“... 하하.”

도훈의 어이없는 표정은 조금 뒤 두진이 다시 시장실에 들어온 뒤에야 풀릴 수 있었다.

“신 의원이 일을 아주 잘하신 모양입니다.”

“신 의원과 통화하셨어요?”

“신 의원이 아니고 진평당 지역위 사람 하나와 통화했습니다.”

“그래요? 뭐라던가요?”

“신 의원이 화해를 주선한 것만이 아니고, 공업사 사장님을 배려해 이런저런 일을 하신 모양입니다.”

“배려요?”

“네. 우리 시에 지인이 전혀 없다시피 했다면서요? 비슷한 일을 하거나 알고 지낼 만한 사람 몇을 소개해서 그 사장님께 말 상대가 좀 생겼답니다. 아무튼, 그 사장님이 아주 만족해서 주변에 신 의원 칭찬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나 봅니다.”

두진의 이야기를 듣던 도훈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겨우 그걸로 차 의원이 화를 냈다고요?”

“‘겨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신 의원이 그 사장님이랑 함께 공업사 주변이랑 그 사장님 전셋집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인사도 하고 했나 봅니다. 와중에 노인정에다 떡도 돌리고 했다는데요.”

“아, 그렇게까지···.”

“시의원이라고 해도 지역주민을 그렇게까지 챙기는 건 쉽지 않죠. 그러니 소문이 좀 날 수밖에요.”

두진의 설명을 들은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길영이 보궐선거에 당선됐을 때, 여당이 아닌 진보정당 출신으로 괜히 시의원이 된 게 아니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농민단체 활동으로 시작해 정치에까지 뛰어든 그는 지역주민들과 관계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럼 제가 소개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신 의원이 잘한 거네요.”

“하하, 그런 것도 같습니다.”

용건을 마친 두진이 다시 비서실로 나갔고, 도훈은 책상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아 피식 웃었다.

“차 의원이 총선 직후라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 그럴지도 모르지. 이번 총선에서 그 당 당선자가 특정 지역에 확 몰렸잖아. 총선은 끝났고 다음이 지방 선거니까 마음이 다급해졌을 수도 있지.

조상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훈은 신길영이 아닌 차혜진에게 이 일의 중재를 부탁했더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을 해봤다.

절래. 절래.

차혜진의 사무적인 미소를 떠올리자마자 도훈의 고개가 자동으로 좌우로 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혜진이 신길영 만큼 양쪽 얘기를 잘 들어주며 갈등을 진정시키는 모습이 상상이 안 됐으니까.

- 걔는 자기 말이 안 먹히면 곧바로 성질부터 내는 스타일이야. 자칫하면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키웠을지도 몰라.

“... 그건 좀 상상이 되네요.”

- 신경 쓰지 마라. 아마 배도 아프고 화가 나니, 너한테 한마디 하지 않고서는 못 참을 지경이었던 거 아니겠냐?

“네.”

실소를 흘리며 답한 도훈이 서류를 집어 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 의원에게 시민의 애로사항 해결을 부탁할 날이 과연 오긴 올까?’

아마 멀고도 멀지 않을까 생각한 도훈이었지만, 예상 밖으로 그런 날이 실제로 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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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인 일요일.

모처럼 쉬는 날이고 날씨 또한 좋았기에 도훈은 순심이를 데리고 시청 인근의 작은 공원에 나와 있었다.

- 아아, 나도 가고 싶다.

“그러게요. 저도 세경 씨랑 함께라면 더 좋았을 텐데.”

- 히잉.

세경과 통화하는 도훈이 담담히 웃었다.

원래는 세경도 시간이 있어서 어디 가까운 곳으로 소풍이라도 가자고 했었는데, 갑자기 세경이 어머니에게 호출되어 계획이 취소됐다.

무슨 일인가 걱정된 도훈이 연락해 보니, 세경은 어머니의 지시를 받아 대청소를 돕는 중이었다.

“봄맞이 대청소도 중요한 일입니다. 어머니 잘 도와드리세요.”

- 중요하죠. 하지만 그게 꼭 오늘일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글쎄요. 세경 씨 어머님이 결정하신 건데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세경과 통화하면서도 도훈의 시선은 신나서 공원 안을 돌아다니는 순심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잠깐의 산책은 매일 하지만, 야외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는 게 간만이었기에 녀석은 무척 신난 상태.

- 제 몫까지 재밌게 놀아요, 도훈 씨.

“네. 그러겠습니다. 다음에 같이 순심이 데리고 소풍 가죠. 고생해요, 세경 씨.”

통화를 마친 도훈이 저만치 떨어진 키 작은 나무들에 가려진 순심이를 불렀다.

“순심아! 이리 와!”

왈! 왈왈!

도훈의 부름에 순심이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녀석에 뒤이어 웬 노란 털 뭉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엥?”

왈! 왈왈!

앙! 앙앙앙!

도훈 앞으로 온 순심이, 그리고 비슷한 크기의 푸들.

“넌 또 어디서 나타났냐?”

앙! 앙앙!

앙증맞게 생긴 푸들이 도훈을 보고 짖는데, 개들이 달려온 방향에서 노인 한 분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이 푸들을 불렀지만, 푸들은 순심이에게 정신이 팔려 본체만체.

결국, 노인이 도훈 곁으로 다가왔다.

“바우야, 인마. 말 좀 들어라. 내가 너 밥 주는 사람이여.”

노인이 푸들에게 투덜거렸지만, 푸들은 순심이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얘 이름이 바우입니까?”

“네, 그래요. 어라? 시장님이시네?”

“아, 네.”

“시장님도 개 키워요?”

“네.”

“허허, 몰랐네요.”

노인은 도훈 옆에 앉아 개들이 뛰노는 걸 바라봤다.

“저 녀석은 이름이 뭡니까?”

“순심입니다.”

“말 잘 들어요?”

“하하, 다행히도 그런 편입니다.”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는데, 어디선가 개가 한 마리씩 그리고 녀석들의 주인도 한 명씩 도훈과 노인의 곁에 앉더니 어느새 개는 다섯 마리, 사람은 일곱이 됐다.

“바람이 아프다더니 지금 보니 멀쩡하네요?”

“어휴, 저 녀석 병원에 사흘이나 입원했었어요.”

“저런, 고생했겠네.”

도훈을 제외한 사람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듯 친숙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집 뒷산 공원은 사람이 많을 듯하여 일부러 이곳에 왔다가 낯선 개들과 사람에 둘러싸인 도훈은 좀 뻘쭘한 기분으로 대화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맨 처음에 도훈의 곁에 앉은 노인이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아, 참. 시장님, 우리 시에는 반려동물 공원 만들 계획 없나요?”

“반려동물 공원이요?”

“네. 반려동물 데려와도 되는 공원이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면 생각 안 해봤습니다.”

“그래요? 그런 공원이 어떤 건 줄은 아시죠?”

“네. 다른 지역에 그런 공원이 있잖습니까.”

“우리 시에도 하나 만드는 건 어떨까요?”

“혹시 여기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노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보다가 제각기 말을 꺼냈다.

이 공원은 시가지나 아파트 단지와 거리가 있고 아파트 바로 옆에 공원이 이미 있어서 사람이 거의 찾지 않는단다.

그러다 보니 반려견을 키우는 이들이 산책 때 차를 타고 일부러 올 정도.

도훈도 차를 타고 오가며 도로에 바로 붙은 이 공원에 사람이 있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었다.

“흠. 이 공원에 애들 산책시키러 오는 분들이 많은가요?”

“한꺼번에 오는 건 아니니까 붐비지는 않는데, 내가 여기 오가면서 본 사람만 따지면 스물은 넘을 겁니다.”

“... 스물이라···.”

도훈이 그렇게 되뇌는데, 한 아주머니가 덧붙였다.

“아마 더 될 거에요. 여기선 제가 여기를 가장 오래 다녔거든요. 3년 조금 넘었으니까요. 제가 마주친 사람은 서른? 그쯤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지정되면 더 많이 모이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공원은 초등학교 운동장 반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

특별히 조경한 것도 아닌, 원래 있던 커다란 나무 밑에 벤치를 가져다 놓고 높지 않은 울타리를 쳐놓은 것에 불과했다.

“지정하는 것도 문제지만, 관리하는 것도 문젠데 말이죠.”

“관리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잘해야죠.”

“그럼. 만약 지정만 되면, 순번을 나눠서 돌봐도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환경만 갖춰지면 못할 것도 없지.”

도훈이 걱정했지만, 사람들은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분위기가 그런데, 그들 앞에서 ‘어렵겠다.’ 혹은 ‘안된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제가 여기서 가부를 말씀드릴 수는 없고, 우선 이 공원 자주 이용하시는 분들의 의견을 더 모으는 게 어떨까 싶네요.”

“음, 그건 당연히 그래야죠. 숫자가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요. 그래도 시장님이 함께 하시면 더 좋겠는데···.”

“아무래도 저는···.”

어느 아주머니의 말에 도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떼려다 멈췄다.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잠시만요.”

도훈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몇 걸음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김도훈입니다.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십니까?”

- 아, 시장님. 네. 말씀하세요

상대의 말에 도훈이 담담히 질문을 던졌다.

“의원님, 혹시 개 키우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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