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작전 - 2.
선거운동 개시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난처한 지경에 빠진 민의당 쪽 인사와의 만남.
아무리 만남을 제안한 사람이 그간 정치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인 의장 안준식이라 해도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조용한 만남을 원했고 도훈도 동의했지만, 그 ‘조용한’이라는 게 꼭 아무도 없는 장소일 필요는 없었다.
안준식과 도훈이 공개된 장소에서 만나더라도 흠잡을 상황이 아니면 되는 것 아닌가.
또한, 도훈이 일부러 시민들의 눈길을 피할 수 없는 곳을 고른 이유가 있었다.
“일부러 여기 고르신 거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를 바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운계면 상가 거리의 끝자락에 자리한 어느 돈가스집에 마주 앉은 도훈과 안준식.
도훈 옆에 앉은 두진이 말없이 담담히 웃는 가운데 안준식이 살짝 삐진 듯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실에 자리한 게 아니라서, 뻥 뚫린 실내 다른 테이블에 자리한 다른 손님들의 이야기 소리가 다 들렸다.
반대로, 이들이 자리한 테이블에서 나누는 얘기도 어렵지 않게 들릴 테니 대화의 주제가 ‘자연히’ 조심스러울 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시장님 방으로 찾아가겠다고 할 것을 그랬습니다.”
“제 입장도 생각해주셔야죠.”
“... 휴우.”
담담한 도훈의 말에 안준식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안준식이 제안한 장소는 이 돈가스집 바로 옆에 있는 식당이었다.
안준식은 음식이 맛있어서가 아니라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내실이 있어서 그곳을 택했었다.
그런데, 약속 시각 직전에 도훈이 그 집이 아니라 이 돈가스집에서 기다리겠다 연락했던 것.
급한 사람이 우물 판다는 얘기가 있듯이, 사정이 급한 안준식은 어쩔 수 없이 돈가스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많이 힘드신가 봅니다.”
“... 아닌 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전과 달리, 안준식의 표정에 그다지 여유가 보이지 않았기에 도훈이 걱정스레 말했고, 안 의장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여기 돈가스 맛있답니다. 맛있는 거 드시고 힘내세요.”
“놀리는 겁니까?”
“아닙니다, 의장님.”
“... 휴우.”
“너무 여유가 없어 보이십니다. 다급하면 실수한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두진이 끼어들어 말하자, 안준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도훈이 뭐라 말을 이어갈까 생각하는데, 갑자기 조상님이 말을 걸었다.
- 야.
‘......’
도훈이 퇴근하고 하루의 반성회를 하기 전까지는 조상님과 말도 잘 안 섞게 된 지 오래.
낮에는 단 한 마디도 대화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을 정도니 당연히 도훈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 인마!
‘... 왜 그러십니까?’
- 눈치가 심상찮은 놈들이 너 지켜보고 있다.
‘네?’
- 네 오른쪽 건너 테이블!
‘......’
도훈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맞은편 벽에 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과 눈이 마주쳤고, 모자를 쓴 두 청년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돈가스집 안에는 테이블이 3열로 놓여있었고, 도훈 일행과 모자 쓴 청년 사이의 테이블은 빈 상태.
- 봤지? 너랑 눈 마주치니까 움찔하는 거.
‘... 네. 저 사람들 저희보다 먼저 들어왔나요?’
- 아니. 의장이 들어온 다음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들어왔어, 아주 허겁지겁. 당황한 것 같았는데 너랑 의장이 있는 걸 보고 안심하더라.
‘......’
“식사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시장님.”
점원이 주문한 돈가스를 가져다줬다.
“드시죠, 의장님. 드셔야 힘이 납니다.”
“... 그러죠.”
두진이 권하자 안준식도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아마 밥 먼저 먹고 얘기는 나중에 하겠다는 생각일 터.
어쨌든, 안 의장이 묵묵히 식사를 시작한 덕분에 도훈은 식사하며 반대편 벽에 앉은 남자들을 몰래 살필 수 있었다.
도훈의 눈에 모자 쓴 두 청년이 벽에 어떤 물건을 슬그머니 기대놓고는 살짝 움직이는 게 들어왔다.
‘... 저거 설마··· 몰카?’
빛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도훈의 테이블을 잘 찍히게 하려고 ‘각’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나 안 의장을 찍는다고? 왜?’
모자를 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20대라는 건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이들이었고 기자도 아니었다.
‘기자라면···.’
총선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기, 궁지에 몰린 여당 측의 움직임은 취재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안준식은 시의원인 데다가 의회 의장이니 취재 가치가 더 높을 터.
도훈 역시, 논란의 중심인 대흥시 시장이니 ‘입장’ 외에도 ‘행동’에 관심이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맞은편 벽 테이블의 두 남자는 기자로 보이지가 않았다.
움찔.
맞은편 테이블을 흘끔 하던 도훈과 모자 쓴 두 남자 중 하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고, 상대가 다시 움찔하는 게 보였다.
아무런 일도 아닐 수 있겠지만, 조상님이 일부러 알려줄 정도로 수상했고 무엇보다 무척 찜찜했다.
‘안 되겠어.’
드륵.
말없이 의자를 밀고 자리에서 일어난 도훈이 남자들의 테이블 쪽으로 다가가는데, 갑자기 한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벽에 기대놨던 물건을 들고 벌떡 일어나 뛰려다가 막 가게로 들어온 손님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윽!”
쿵.
들어오던 손님이 체구가 컸기에 모자 쓴 남자는 뒤로 넘어졌고, 그 와중에 손에 들었던 수상한 물건을 떨어트렸다.
툭.
물건은 공교롭게도 도훈 앞에 굴러왔고, 도훈이 그걸 천천히 집어 들었다.
담뱃갑처럼 생겼지만, 담뱃갑이 아닌 묘한 플라스틱 상자.
그걸 손에 든 도훈이 무표정하게 모자 쓴 두 남자를 차례로 바라봤다.
파르르.
여전히 의자에 앉았던 남자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하려 했으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쓰러진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도훈의 시선이 손에 든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향했고, 상자에 작은 구멍이 있는 걸 발견했다.
“도, 돌려줘요!”
쓰러진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지만, 도훈은 한 발 뒤로 물러나며 플라스틱 상자의 조립면에 힘을 주어 상자를 반으로 갈랐다.
상자 내부를 본 도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시장님?”
도훈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두진이 어느새 다가와 물었다.
그 옆에 안준식도 있었다.
도훈이 손을 움직여 갈라진 상자의 안쪽을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 카메라? 이게 왜?”
두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고, 안준식이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다 뭔가를 깨닫고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당신들 뭡니까? 기자입니까?”
“......”
돈가스집 내부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은 진즉부터, 그러니까 남자 하나가 달아나려다 손님에게 부딪혀 쓰러지던 때부터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도훈이 뭔가를 쪼개 내부를 연 뒤부터는 ‘도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길래 저래?’ 하는 호기심이 커져 가고 있었다.
그런 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말이 안 의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거 몰카죠?”
“......”
“당신들, 이걸로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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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가스집 사장이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고, 안 의장이 연락해 민의당 대흥시 지역위 사람들도 여럿 달려왔다.
확인해 보니 몰카에 도훈과 두진, 안준식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의장님. 그 청년들, 이 옆 가게 예약했었답니다.”
“... 확실해요?”
“네. 예약한 방이 의장님 있던 방 바로 옆입니다.”
“......”
“의장님 나가신 뒤에 그들도 곧바로 나갔답니다.”
“... 허.”
몰카에 도훈 등이 등장하기 전에는 웬 텅 빈 방에 홀로 앉은 안준식이 찍혀 있었다.
안 의장이 예약했던 내실에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몰카를 ‘미리’ 가져다 놨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야?”
“맙소사.”
안 의장과 민의당 사람들이 망연자실해 하는 가운데, 경찰관과 대화를 마친 도훈은 자리를 떴다.
더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차에 오르는 도훈에게 안준식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시장님.”
“아닙니다. 의장님도 저랑 같은 처지이신데요.”
정황으로 볼 때 누구를 노렸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최소한 도훈과 안준식이 만난다는 정보는 안준식 주변에서 흘러나갔다.
그 얘기가 흘러나간 루트를 찾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배후가 누구고 뭘 노리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밝혀내는 것도 중요할 터.
다만, 그건 도훈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오늘 하려고 했던 말씀이 뭔지 짐작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좀 고민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오늘 일은···.”
“당장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싶습니다.”
“... 네.”
“다만, 뭔가 밝혀지면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차에 오른 도훈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좀 멍한 기분이었다.
그런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두진이 입을 열었다.
“바로 퇴근할 텐가?”
“... 그래야죠. 실장님 모셔드리고 집에 가야죠. 다른 직원들 다 퇴근했을 텐데.”
“그러지 말고,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하세.”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그게 아니고, 자네가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그래.”
두진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충격까지는 아니고···, 좀 놀라긴 했습니다. 무슨 작전 현장을 발각해낸 기분이라서요.”
“나도 실제로 현장을 보는 건 처음이긴 하네만, 이런 걸 ‘공작’이라고 하는 거겠지.”
“... 작전, 공작···. 둘 다 그리 듣기 좋은 말은 아니네요.”
도훈은 카페를 가는 대신, 두진의 집에서 차 한잔 얻어 마시기로 했다.
간만에 두진의 집안에 들어간 도훈과 두진이 마주 앉았다.
“사모님은 또 대전에 가셨습니까?”
“오늘 오후에 가서 내일 오후에 온다고 했네. 한동안 뜸하다 싶더니 바람 쐬러 간다더군.”
유자차를 마시는 도훈에게 두진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눈치챘어?”
“그냥 운이 좋았습니다.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하는 게 좀 이상하더라고요.”
“뭐가 말인가?”
“담뱃갑을 기대 세워놓고 만지작거리는데···. 저도 담배 피웁니다만,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식당에 가서 앉았다고 담뱃갑 꺼내놓거나 하지 않거든요.”
“흠, 그건 그렇군.”
두진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누가 그랬을 것 같나?”
“글쎄요. 민의당 내부는 아마 아닐 테고···. 두 야당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그쪽에 작전이든 공작이든 경험자들이 좀 있기도 할 거고요.”
“그렇지. 나도 느낌이 그래.”
“문제는 배후가 철저히 밝혀질지, 밝혀진다면 이 일의 파급력이 어디까지 커질 것인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겠지.”
안준식과 도훈의 만남을 몰카로 촬영하라고 지시한 인물이 누구고 그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 일의 파급력은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었다.
아마, 민의당은 뿌리까지 밝혀내 선거 국면에 유용하게 활용하려 할 테고, 상대는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할 터.
“전국적인 의제까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우리 지역은 이것 때문에 꽤 시끄러워질 겁니다. 저는 그게 더 신경 쓰이네요.”
“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두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중앙 정치 무대의 논제 때문에 시의회가 영향을 받는 일도 있지만, 그럴 때는 필요 이상으로 격렬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 일은 대흥시의 주요 인물들을 노린 대흥시에서 벌어진 사건.
사건의 파급력이 전국에 영향을 줄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흥시는 한동안 그 영향을 받을 터였다.
노림을 당했던 민의당 쪽이 현재 대흥시에서 난처한 처지이니 더할 터였다.
“오늘까지 대자당, 민국당이 보였던 모습을 내일부터는 민의당이 보일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데?”
“맞습니다. 과열된 선거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 되니까요.”
아무리 시 단위라고 해도 정치적 분쟁이 격렬해지면, 그 영향이 시 행정에 미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내일 뭔 일이 터질지 겁이 나는군.”
“...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비슷한 심정입니다.”
“이거 당장에라도 비서실 직원들하고 시청 간부들에게 알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글쎄요. 지금 저녁 8시가 넘었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밤새 뭔가 조금이라도 밝혀질 테니 그 결과를 놓고 내일 아침에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 그러려나? 그래도 몇 사람에게는 알리는 게 좋지 않겠나?”
“음, 그럼 실장님이 비서실 직원들에게 연락하세요. 저는 부시장과 주요 간부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러세.”
도훈과 두진이 제각기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시작했다.
비서실 직원이고 간부고 간에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다만, 그들 모두는 상황이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갈 것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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