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62화 (163/279)

162. ... 부디.

도훈이 도길수 노인과 우연히 마주쳐 대작했던 그 주 금요일 저녁.

“이번 달도 고생 많았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2월을 정리하는 비서실 회식이, 거의 전용 회식장소로 지정되다시피 한 작은 실내포차에서 열리고 있었다.

오뎅과 꼬치 외에도 이런저런 안주가 푸짐히 놓인 테이블에 앉은 건 도훈을 포함해 여섯 사람.

도훈과 비서실 직원 전원에 전 비서실 직원인 고정임까지 함께한 회식.

정임의 남편도 초대했지만, 아이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

“실장님, 어제 지역경제과에서 관내 기업지원방안 올렸다가 퇴짜맞은 것 있잖습니까? 담당 팀장이 실장님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싶다던데요?”

“나를 설득하면 뭐하나? 시장님이 전면 재검토하라고 하신 일을?”

“실장님이 지역경제과를 편들어 주길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만?”

“허허. 그 사람들도 참.”

나란히 앉은 영배와 두진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다.

‘일할 때는 열심히, 놀 때도 열심히’가 도훈의 방침이었지만, 최소한 비서실 회식 때만큼은 업무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주민센터는 어때? 고 주무관이 거기 에이스라 불린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호호. 에이스요? 잔소리꾼 대마왕이라는 얘기를 잘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뭐, 비슷한 이야기도 듣긴 했어. 고 주무관이 총무 부서에 있으니 그런 거겠지.”

“글쎄요. 시장실에서 배운 대로, 하던 대로 하니까 일주일도 못 가서 죽겠다고, 좀 살살하자고 얘기하던데요.”

영진과 정임의 대화에 지연이 끼어들었다.

“네가 비서실에서 하던 걸 센터에 나가서 똑같이 했다면 그런 소리 듣는 게 무리도 아니지. 나도 처음에 좀 놀랐는데, 뭐.”

“그게 내가 한 거니? 시장님이랑 실장님이 한 거지. 나도 처음에는 적응하느라 애 많이 먹었어. 관용차부터 시에서 쓰던 중고 승합차로 바꾼 분들인데, 뭐.”

“하긴 매년 새로 사서 센터랑 시청에 배정한 소형차들이 일 열심히 하고 있지.”

도훈은 전임 시장의 관용차를 물려받지 않고 시청에서 쓰던 낡은 승합차를 타고 있었다.

매년 관용차에 배정되는 예산은 시청이나 주민센터 등에 배정되는 소형차에 주로 쓰이고 있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시장님 차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점점 말썽나는 빈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실장님.”

“그런가? 연한은 넘겼지?”

“넘겼죠. 넘겨도 진즉에 넘겼죠. 그 차 계속 유지하면, 점점 더 수리비 부담이 커질 겁니다. 장기적으로는 교체하는 게 유리합니다.”

“흐음. 생각해 보세.”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나가는 직원들에 반해 도훈은 별다른 말없이 지켜보는 상황.

다른 때라면 대화에 끼어들어도 진즉에 끼어들었을 터였다.

다들 도훈이 전과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주 후반기부터 뭔가를 계속 생각하는 듯한 그런 모습을 종종 보였으니까.

다만, 이제 비서실에 근무하지 않는 정임은 달랐다.

“요새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거니?”

“나도 잘 모르겠어.”

“흠, 회식 자리에서 저러시니까 좀 낯설다.”

정임이 지연과 소곤거리는데, 도훈이 입을 열었다.

“딱히 고민 같은 건 없어요, 정임 씨. 그냥 자주 생각나는 게 있을 뿐입니다.”

“아, 들으셨어요. 호호.”

머쓱한 표정이 된 정임에게 도훈이 담담히 웃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도길수 할아버님, 치료는 잘 받고 계신답니까?”

“아, 그분이요?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도훈이 도길수 노인과 만났던 다음 날, 도 노인은 스스로 병원에 입원했다.

주민센터 담당 주무관은 또 집에 찾아갔다가 집이 빈 걸 알고 전화를 걸어본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다행인 게 맞긴 맞는데, 그간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하기만 하던 분이 갑자기 변하셔서 담당자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죠.”

“그럴 필요 없습니다.”

“네?”

“마음을 바꾼 동기는 모르겠지만, 좋은 쪽의 변화라고 생각해도 될 겁니다.”

“... 변화요?”

정임이 묻고 다른 이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도길수 노인의 이야기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의 딱한 사정도 사정이지만, 그의 과거사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니까.

“도 할아버님, 조만간 이사 가실 겁니다.”

“이사요?”

“네.”

“어머? 그럼 혹시 아들···.”

정임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말했지만,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자식들과 화해하신 게 아니에요.”

“그럼요?”

‘... 반쯤은 포기하신 거죠.’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도 할아버님 후배가 이사를 권했답니다.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직장도 주선하고요.”

“아, 그래서···?”

“네. 후배분의 말을 따르기로 하신 거죠.”

잠시 아무도 말이 없더니 영배가 입을 열었다.

“그걸로 괜찮을까요?”

“괜찮길 바라야죠, 일단은.”

그렇게 답한 도훈은 며칠 전,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도 노인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나 조만간 이사 가기로 했어요.”

“혹시 아드님과···.”

“아뇨. 아까 봤던 내 후배네 집 근처로요.”

“......”

“그 친구가 작은 회사를 하는데, 힘들지 않게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준다네요.”

“... 네.”

“전부터 계속 가자고 조르는 걸 거절했는데, 아까 승낙했어요.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끌고 가겠다고 하는데, 더는 거절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러셨군요.”

“네. 고마운 노릇이죠.”

좋은 변화일 수 있기에 도훈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지금의 관계라면 수십 년간 계속 연락할 만큼 존경하는 후배에 비할 바가 아닐 테니까.

다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도 노인의 표정이 신경 쓰였었다.

마치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내려놨다거나 뭔가 오래 매달렸던 일을 결국에 포기한 것과 같은 그런 표정이었으니까.

“내 후배가 그러더라고요. 자식들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상황을 냉정하게 보라고 말이오. 화해는커녕 점점 더 사이가 나빠지고 있거든.”

“......”

“저승 간 마누라가 보면 나부터 욕할 거에요. 그래도 내가 어른이고 아비니 내 책임이 더 클 거 아니오.”

다른 설명이 없어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도 노인은 화해를 미뤘다기보다 포기한 것처럼 보였었다.

그것 역시 그의 선택이기에 그때는 뭐라 할 말이 없던 도훈이었다.

도훈이 주민센터 직원에게 큰아들의 전화를 물어 연락한 것은 그 다음다음 날.

“... 그렇게 치료를 받은 뒤 이사하실 것 같더군요. 앞으로는 대흥에 자주 오시지도 않을 것 같고요.”

- ......

시장이 아닌 직원으로 자신을 소개한 도훈으로부터 도 노인이 경기도로 이사 갈 것 같다는 말을 간략히 전해 들은 큰아들은 얼마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 노인이 대흥시에 사는 건, 오래전 사망한 그의 부인의 묘가 대흥에 있기 때문.

아마 부인의 곁에서 자식들과 화해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 같았지만, 이젠 그걸 포기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도훈뿐만 아니라 큰아들도 비슷하게 받은 것 같았는데, ‘혹시나’ 했던 큰아들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역시나’였다.

- 뭐, 거기 가서 고생 덜하면 그걸로 좋은 거겠죠.

“......”

- 아버지 안 돌본다고 자식들 욕먹을 일도 줄어들 테니 다행이네요.

통화는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자신이 더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 여겨졌으니, 도훈도 ‘당신 아버지가 뭔가 포기한 것 같다’는 얘기는 하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했던 도훈은 결국 아버지에게 전화해 질문을 던졌다.

‘소신’이 도대체 뭐고, 어떤 소신을 품고 사는 게 옳냐고.

-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 하고 있네. 소신? 갑자기 왜 그래? 너 뭔 일 있었냐?

도훈은 아버지에게 대폭 간추린 도 노인의 이야기를 했다.

- ... 뭐 그런 개떡 같은 일이 다 있어.

도훈의 아버지는 도 노인의 행동이 아닌, 도 노인과 가족이 사고에 휘말린 사실 자체를 욕했다.

운명의 장난이라는 말이 있다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던 평범한 가족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불행한 사건이니까.

- 너 인마, 뭐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 선배님 가족이 그런 불행한 일을 겪은 게 소신 때문이라는 거냐?

“... 아뇨.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버지.”

- 아니까 다행이네. 그건 그냥 불행한 사고지 그 선배님이나 그 선배님의 소신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야. 안 그래?

“...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 되는데 뭐?

“가슴이 답답해서요.”

도훈의 말에 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 사고가 왜 사고냐? 사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사고 아니야? 신념이고 소신이고, 그런 곳에 가져다 붙이라고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인마! 소신이건 신념이건 각자가 조용히 마음에 품고 사는 거야. 주변 사람들이 어쩌고저쩌고 떠벌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이랬다.

소신이 됐든 신념이 됐든 비슷한 뜻의 뭐가 됐든, 내가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란다.

-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비난하거나 칭찬하기 위해 별의별 소리를 다 가져다 붙이겠지만, 다 쓸데없는 소리야. 불행한 사고는 사고일 뿐, 신념이니 소신이니 말 같지 않은 말에 휘둘리지 말고 하루하루 ‘바르게’ 사는 데나 신경 써라.

도훈의 아버지도 도 노인의 가족이 당한 불행한 사고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도 노인과 자식들이 부인이자 엄마를 잃은 사고를 함께 잘 극복하지 못한 게 안타까운 것이지 다른 게 안타까운 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훈은 결국 대놓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라면 그렇게 하실 수 있겠어요?”

- 모르지.

“......”

-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도 불행한 일을 겪었다는 거다. 다행히 우리는 함께 슬기롭게 극복했고.

“... 네.”

- 난 우리가 극복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불행한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야.

아버지와의 대화를 되새기는 도훈의 귓가에 정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장님,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 아무것도 아닙니다.”

“흐음, 정말 고민 없으신 거 맞아요?”

“네. 잠깐 딴생각이 들었을 뿐이에요.”

정임이 담담히 답하는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술잔을 내밀었다.

“건배!”

“... 건배.”

쨍.

잔을 비운 도훈이 담배를 피우러 포차 밖으로 나왔다.

“휴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은 도훈은 유리창 너머로 직원들의 모습에 시선을 줬다.

영배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하는 두진, 그리고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하는 정임과 영진, 지연.

-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매사가 그런 건 아니네만, 공무원은 뭐가 더 공익에 부합하는가만 따지면 되는 거야.

도훈이 처음 배움을 청할 때 뭐 그리 간단한 걸 묻냐는 투로 답하던 두진의 말이 그랬다.

- 인생 뭐 있냐? 최대한 즐겁고 가치 있게 살면 되는 거지. 최소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해야지.

영배가 도훈에게도 사는 재미를 좀 찾고 살라며 하는 말이고, 스스로에게도 이따금 확인한다는 말이었다.

영진은 이따금 ‘가훈’을 언급하곤 했다.

- 나 좋고 남도 좋은 일 하면서 사는 거죠.

당찬 정임은 거창한 소신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무원으로서의 작은 포부가 있었다.

- 저와 제가 하는 일로 인해 웃는 시민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좀 특이한 취미를 가진 지연은 의외로 아주 평범한 기준이 있었다.

- 월급 받는 만큼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돼야죠. 음, 너무 계산적인가요? 그럼 월급보다 조금 더 많이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소신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각자가 가진 최소한의 준칙.

모두가 그걸 무탈하게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 내가 더 잘해야겠지.’

생각에 잠긴 도훈에게 조상님이 말을 걸었다.

- 눈은 대체로 먼 곳에 두되, 바로 다음에 발을 내디딜 자리를 살피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렇게 묵묵히 걸어가도 모두가 그 길을 완주하는 게 아니다.

‘... 답이 없다는 말이잖아요.’

- 인생에 답이 어딨어? 한 치 앞도 못 보고 사는 게 사람인데. 사람 뜻대로 안 되는 게 어디 하나둘이야?

‘......’

- 할 수 있는 것만 하면 되는 거야.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냐?

“··· 부디.”

며칠 전, 터벅터벅 걸으며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던 도 노인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도훈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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