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각자의 신념 - 4.
도훈, 두진, 영배가 자리한 식당의 테이블.
도길수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던 초로의 노인이 먼저 자리를 뜬 뒤 세 사람은 제각기 복잡한 심사를 붙들고 말문을 잃고 앉아 있었다.
도 노인의 후배에게 들은 이야기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각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스버너의 불이 꺼진 지 오래라 맛있게 끓고 있던 동태찌개도 식어가는 상태.
식당에 와 음식은 손도 대지 않고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 묵묵부답인 사람들의 모습에, 보다 못한 주인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묵념이 너무 긴 거 아니오?”
“네? 아, 사장님.”
“뭔가를 심각하게 얘기하더니 찌개가 다 식어가도록 생각에만 잠겨있으니···.”
“죄송합니다.”
도훈이 사과했고 두진과 영배도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은 표정이 풀어진 식당 주인이 말을 이었다.
“음식값 내면 죄송할 거야 없지만,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거든.”
“네. 이제 찌개 데워야죠. 밥은 좀 식었어도 찌개가 있으니 괜찮을 것 같고···. 소주 한 병···.”
영배가 도훈을 흘끔 하며 말을 흐렸고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주 한 병 주세요.”
“그래요. 잠깐 기다려요.”
주인이 가스버너에 불을 붙이고는 소주 한 병과 잔을 가져다줬다.
쪼로록.
영배가 도훈과 두진에게 술을 따르고는 자신의 잔도 채웠다.
“... 참, 난 이런 얘기는 영화 속에나 나오는 줄 알았어.”
“그러게.”
“......”
오래전, 도길수 노인이 40대 중반일 무렵.
비번이던 어느 날, 도 노인은 가족들을 차에 태우고 놀이공원에 나들이를 갔다.
경찰관 생활이 워낙 바쁘고 비상근무도 잦은 터라, 실로 오래간만에 온 가족이 함께한 나들이.
그 나들이는 목적지인 놀이공원이 멀지 않은 지점의 도로에서 재앙으로 변했다.
- 다중 추돌사고가 났어요. 몇 대가 사고에 휘말렸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승합차를 포함해서 여러 대가 심하게 부서졌지요. 그리고 그중에 도 경사님 차도 있었고요. 당연히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부상자가 여럿 발생했으나 놀이공원으로 향하는 차량으로 도로가 막혀 구급차의 도착이 늦었다.
먼저 도착해 현장수습에 나선 구급대원들이 심한 상처를 입은 이들부터 병원으로 호송하기 시작했다.
도 노인의 가족은 외견상 크게 다치지 않은 것으로 보여 긴급후송 대상이 아니었는데, 문제는 많이 놀라기만 한 것 같던 부인의 상태가 점점 나빠졌다는 것.
- 나중에 듣기로는, 사모님 몸속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했어요. 그러니 처음엔 창백하기만 했겠고, 점점 상태가 나빠졌겠지요. 길이 막혀 소방서 증원이 늦어서 소수의 구급대원이 여러 부상자를 챙겨야 했으니 실수를 한 거예요.
부인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발견하고 알린 건 큰아들.
도 노인은 몇 안 되는 구급대원을 돕고 있다가 길가에서 엄마와 쉬고 있던 아들이 울며 달려온 다음에야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
도 노인과 구급대원이 달려가니 부인은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
당시 현장에서는 구급차가 없어 급한 대로 순찰차에 부상자를 태우고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찰차에조차 자리가 부족했다.
- 아마 사모님과 비슷하게 위중한 이들이 여럿이었던 모양입니다. 구급대원이 누굴 먼저 태워야 하는지 결정을 못 내리니까 도 경사님이 부인이 아닌 다른 부상자를 순찰차에 태워 보내게 했어요. 그리고는 지나가는 일반 차량에다 대고 호소하셨다죠. 중한 부상자가 있으니 병원으로 옮기는 걸 도와달라고요.
- ... 사람들이 돕지 않은 건가요?
- 그건 아니에요.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도와주겠다고 나서서 병원으로 출발할 수 있었대요. 하지만, 그 차는 구급차도 순찰차도 아니잖아요.
- 네?
-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지만, 그때만 해도 순찰차는 몰라도 구급차에는 잘 길을 안 비켜주던 땝니다. 일반 차량이 아무리 비상등을 키고 빵빵거리고 차창을 내리고 사람이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길이 쉬이 열렸을 리가 없잖아요?
구급차에는 그나마 싸이렌과 외부에 큰소리를 전할 수 있는 확성기라도 달려 있다.
당시의 인식이 어쨌든지 간에, 환자가 있으니 비켜달라고 간절히 외친다면 그것마저 외면하지는 못했을 터.
하지만, 일반 차량의 조수석에서 고개를 내밀고 아무리 크게 소리쳐봐야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 가겠는자.
- ... 그럼.
- 네.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요.
도 노인은 그렇게 부인을, 아이들은 엄마를 잃었다.
큰아들은 엄마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아빠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엄마 대신 다른 사람을 태우라는 아빠를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 그 사고 이후, 한 반년인가 있다가 일을 그만두셨죠. 저는 그나마 계속 연락을 했었는데, 도 경사님이 몇 년 전에 이리로 내려오시면서 연락이 좀 뜸해졌고요.
도 노인 후배의 말을 되새기던 도훈이 눈을 깜빡거렸다.
어느새 동태찌개는 다시 보글보글 끓고 있고 영배와 두진이 도훈의 눈앞에 술잔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또 그 생각했나?”
“네.”
“... 하긴, 나도 그 후배라는 분의 마지막 말이 생생하네. 당장 생생한 건 둘째치고 앞으로도 오래 안 잊힐 것 같아.”
- 원래도 도 경사님은 좋은 경찰이었습니다. 직분에 충실했고 일로 마주하는 시민에게 겸손했으며 동료들에게 따뜻했던 그런 분이었거든요. 사고 후에 동료들은 부인보다 시민을 우선할 정도로 경찰로서 사명감이 투철한 분이라고 했죠. 물론, 본인 앞에서 떠든 게 아니고 뒤에서 조용히요.
- ......
- 하지만, 정작 도 경사님은 그 얘기를 끔찍하게 괴로워하시더라고요. 우리가 입을 다물었는데도, 경찰 정복을 입은 자신을 보면 그 얘기가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만두신 겁니다.
도 노인의 후배는 아무래도 선배를 다시 보고 가야겠다며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도 노인 후배의 말을 되새기는 도훈의 귓가에 두진의 말이 들려왔다.
“마시자고.”
“네.”
쨍.
각자의 잔을 비운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동태찌개에 술잔을 기울였다.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해도 연신 신호를 보내던 위장이 가라앉은 세 사람의 감정에 짓눌렸는지, 밥은 거의 줄어들지를 않았다.
대화는 거의 없이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지만, 도훈은 머릿속이 복잡할 정도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분명히, 두진과 영배도 마찬가지였을 터.
‘그분 잘못이 아니잖아. 상황이 그랬던 거지.’
‘뭐가 옳은 판단이었을까? 내 가족을 살리고 남의 가족을 죽게 놔두는 건 옳다고 할 수 있나?’
도훈과 두진, 영배는 한 시간쯤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가 식당 앞에서 헤어졌다.
세 사람 모두가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이 있었다.
‘나라면 어떠했을까?’
영배, 두진과 헤어진 도훈은 그런 생각에 빠져 집을 향해 걷다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인적이 뜸해진 길거리의 편의점 앞에 놓인 간이 좌대.
그 좌대에 도길수 노인이 홀로 앉아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 어르신?”
도훈이 불현듯 다가가 도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도 노인이 고개를 돌리더니 도훈을 알아봤다.
“... 시장님.”
“왜 혼자 계십니까? 안 추우세요?”
“... 그냥 술 생각이 나서요.”
도훈은 테이블에 반쯤 비워진 소주병과 식어서 김이 나지 않는 오뎅 국물이 놓인 걸 뒤늦게 알아챘다.
“집에 가는 길이오?”
“네. 후배분은···?”
“좀 전까지 집에 나랑 있다가 갔어요.”
“무릎 괜찮으십니까? 아, 참. 약주 하셔도 괜찮은 거 아니잖아요? 의사가 약 드시는 동안 술은 안 된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허허. 지금 잔소리하는 거요?”
“... 네.”
쓰게 웃으며 묻는 도 노인에게 담담히 답한 도훈.
도 노인과 도훈이 눈을 마주 보고 나누는 대화다운 대화는 이게 처음이었다.
도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 노인이 말을 이었다.
“... 같이 한잔 하겠어요?”
“그러시죠.”
그렇게 도훈과 한 노인이 처음으로 단둘이 마주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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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분쯤 뒤.
“어허, 그랬구만. 난 전혀 몰랐네요. 이거 대흥시 시민으로 자격이 부족하네요.”
“어휴, 아닙니다. 제가 시장으로 부족한 거죠.”
새로 뜯어 김이 솟는 오뎅국물 외에도 다른 안주를 놓고 도훈과 노인이 마주 앉아 있었다.
처음 마주 앉은 이들치고는 제법 대화가 부드럽게 되는 이유는, 도훈이 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었다.
“시장님 아버지도 고생했겠어요. 부인도 없이 어린 아들에 갓 난 딸을 키웠어야 했으니.”
“네. 애 많이 쓰셨습니다.”
도훈은 조금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 말문을 틀 게 하도 생각나지 않아 ‘경찰관’이라는 공통점을 노리고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어째 얘기가 ‘경찰관’이 아닌 ‘가족’ 얘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연륜이 있는 사람답게, 도 노인은 그런 눈치를 챘다.
“그렇게 조심할 필요 없어요.”
“네?”
“주제가 뭐가 됐든 내가 기분 상하거나 화내거나 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
“......”
말문을 잃은 도훈이 도 노인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폈다.
여러 번 본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고통이 됐든 뭐가 됐든, 뭔가를 꾹 억눌러 참는 그런 표정이 더는 아니었다.
‘... 한결 편해지셨어.’
“나 하나만 물어봅시다.”
“아, 네. 그러세요.”
“시장님은 무슨 마음으로 시장에 출마한 건가요?”
“......”
담담한 도 노인의 표정을 잠시 바라보던 도훈이 솔직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별생각 없이, 홧김에’ 그랬다고.
“하하, 걸작이네요.”
“... 창피합니다.”
“창피할 것까지야···.”
“다만 지금도 그런 마음인 건 아닙니다.”
“예끼, 이 사람아! 당연히 그래야지.”
타박하는 말투와는 달리 도 노인은 담담히 웃고 있었다.
“그런 것치곤 잘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요.”
“네?”
“나 찾아오는 주민센터 직원들 있잖아요.”
“네.”
“그 친구들한테 그랬었거든. 제발 좀 그만 귀찮게 하라고 말이에요. 인생 다 산 늙은이한테 왜 헛돈 쓰려고 하냐고.”
“......”
“그 친구들이 그럽디다. 나라에서 허용한 정책이기도 하지만, 혜택받을 수 있는 사람이 귀찮아한다고 자기들이 방치하는 걸 시장이 용서하지 않을 거라나?”
“그런 말을 했습니까?”
“네. 그러더라고요. 시민을 위해 일하는 건 원래 쉽지 않다는 게 시장 입버릇이라면서···. 그 말을 반복하며 하도 들러붙어서 내가 포기하고 병원에 갔었잖아요.”
“......”
담담한 도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지금 시장님 소신 같은 건가요?”
“... 소신까지는 아니고 저 스스로 생각한 다짐 같은 겁니다.”
“다짐이라.”
“부끄럽습니다.”
뻘쭘한 표정으로 뺨을 긁는 도훈을 바라보며 도 노인이 말했다.
“그러지 말아요.”
“네?”
“소신이 됐든 다짐이 됐든, 자기만의 준칙이 있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거든요.”
“......”
“스스로 준칙을 가진 사람은 그 준칙을 실천하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요.”
“......”
“나에 관해 들었죠?”
“... 네.”
도훈은 망설이다 답했지만, 도 노인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난 원래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
“주어진 상황에 묻어가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하면 맞을 거예요. 그날도 그랬을 뿐이에요. 내가 보기엔 마누라 말고 그 사람이 더 급해 보였으니까.”
“......”
“항상 시민을 우선해야 한다는 그런 소신, 나한테 없었어요.”
“......”
“그러니까 그 날 이후에 주변에서 괜한 얘기를 하니까 내가 견디질 못했지요.”
갑자기 자신의 얘기를 읊조리는 도 노인에게 도훈은 뭐라 단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시장님은 뒤늦게라도 준칙을 세웠으니 그걸 잘 지키려고 노력만 하면 돼요.”
“......”
“그럼 성공은 못 해도 최소한 중간은 갈 수 있거든.”
“......”
한결 편해진 얼굴로 담담하게 말하는 도 노인을, 도훈이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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