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각자의 신념 - 1.
일요일 저녁 늦은 시간, 서울 ‘출장’을 다녀온 조상님은 그 대가로 평소보다 몇 배나 풍요로운 제사상을 받았다.
- 어우, 이제 좀 기운이 돌아오네.
“... 좀요?”
- 그래, 인마. 서울이 좀 머냐?
“멀긴 멀어도 딱히 기운 쓰실 일은 안 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조상님은 사람에게 뭔가를 할 때 기운을 많이 소모한다.
물리적으로 먼 거리를 오간다고 크게 기운이 소모되는 건 아니라는 얘기.
도훈에게서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없어서 그렇지, 서울쯤 오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렵지 않다고 해서 공치사를 청할 수 없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 어라? 설마 아까워? 나 서울 보내놓고 네놈은 데이트했다며? 그 데이트를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게 내 덕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면 싸게 먹혔다고 생각하지 않냐?
“... 무척 싸네요.”
거의 평균적인 제사상의 세 배에 가까운 푸짐한 만찬에 시선을 준 도훈이 살짝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급히 조달한 배달 야식들이었지만, 여하튼 제대로 한 상을 즐기고 난 조상님의 결론은 이랬다.
- 절대 가까이하지 마라. 동지로든, 적으로든 가까이할 가치가 없는 놈이기도 하지만, 하는 짓거리로 봐서는 만만찮게 위험한 놈이 될 것 같으니까.
짧게 말하면, 근묵자흑이라는 말.
좀 길게 말하자면, 색깔이 검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폭발’의 위험을 떠안고 있다고나 할까.
혼자서 폭발하는 게 아닌 주변을 초토화할 수도 있는 위험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니, 도훈은 그 말을 듣고 더는 오정민에 대해 생각지 않기로 했다.
조상님에게 오정민이 했던 일과 말에 관해 설명을 들었지만, 몇 가지를 제외하고 다 귓등으로 흘렸다.
제법 길었던 설명 마지막에 조상님은 다시 한 번 도훈을 주의시켰다.
- 너 나중에 정치하더라도 절대 그런 놈이랑은 같이 하지 마라.
“물론입니다.”
오정민이 어느 계파에 소속되어 이런저런 ‘작업’을 한다는 걸 강정문이나 김용진에게 은밀히 알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그 당의 문제이고 그 당이 자력으로 해결하는 게 맞을 테니까.
도훈은 그 당 사람이 아니고 그 당 사람이 될 생각도 없질 않은가.
‘... 잡생각 말고 내 일이나 열심히 하자.’
도훈의 결론은 그랬고 조상님도 옳은 판단이라고 찬동했다.
그렇게 조상님의 출장 보고가 끝나는가 싶었는데, 조상님이 웬일로 말을 길게 가져갔다.
- 넌 인마, 사회적으로 봤을 때 성과가 거의 없어.
“... 지금 후손이 무능력자라고 비난하시는 겁니까?”
- 그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기준이 그간 네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는 걸 말하는 거야.
“사회적 인정이요?”
- 그래. 사회적 인정. 솔직히 사회적으로 보기에 번듯하게 이룬 건 없잖아. 안정적인 직장이라던가, 모아놓은 재산이라던가. 그게 아니면 어떤 일에 한우물을 파서 성공했다고 인정받는다던가.
“...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조상님의 의도를 알지 못한 도훈이 의아하게 묻자 조상님이 타이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 비난하거나 훈계하려는 게 아니야. 너 열심히 산 건 나도 인정하니까. 아버지 잘 모셨고 동생 잘 가르쳤으니 그게 어디냐? 또, 불행한 건 아니었잖아. 사는 재미도 나름 있었고.
“... 그런데요?”
- 네가 정치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건 이제 ‘사회적 인정’이라는 기준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야. 안 그러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었고,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한 것이니까.
“... 그렇겠죠.”
- 당연히 뭔가 성과를 내야 해. 맞냐, 안 맞냐?
“... 맞겠죠.”
발언의 ‘의도’를 몰라 좀 불만스러운 후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조상님이 말을 이었다.
- 네가 지금 ‘사회적 인정’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이룰 수 있는 성과가 뭐겠냐?
“... 시장 일 잘하는 거요?”
- 그래. 딱 그거뿐이야. 당장 돈을 겁나게 벌어 많은 직원을 먹여 살리며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변호사같이 삐까뻔쩍한 자격증을 따내 힘든 사람들 돕는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
- 그러니 딴생각 말고 시장 일부터 잘해. 그래야 정치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가능하다. 네가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는데, 얼렁뚱땅 시장 된 놈이 시 살림을 망쳐놨다고 생각해 봐라. 정치할까 말까 고민하는 게 가당키나 하겠냐?
“... 그러네요.”
- 어디 함부로 묻어가지 않겠다는 생각은 옳은데, 그것도 다 네가···.
“사회적 기준으로 따졌을 때 ‘정치인’으로 값어치가 있어야 한단 말씀이네요.”
- ... 오냐.
잠시 조상님의 말을 되새기던 도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시장의 책임을 잘 마무리한 뒤 정치를 할지 말지 선택하자고 생각했는데, 이건 서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조건이 아니었다.
성공한 시장이 되어야 ‘선택’이 가능하게 되는 그런 문제였던 것.
“... 진즉에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 뭐, 알아서 깨닫게 되리라고 생각했지.
“... 그래도···.”
- 네가 일은 슬렁슬렁하면서 허튼짓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렇게든 일에 집중하면서 이런저런 상황을 겪다 보면, 언제가 됐든 깨달으리라고 생각했다.
“......”
도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인자한 표정이던 조상님이 표정을 바꿨다.
진지하고도 진지한 것으로.
- 그리고 이왕 잔소리한 김에 하나만 더 하자.
“... 네.”
- 너무 원론적이다만, 정치라는 건 어디까지나 이(利)를 따지는 일이 아니다.
“물론이죠.”
- 정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게 맞아. 그나마 이 나라에서 훌륭하다고 인정받는 정치인들은 그런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더 크게 ‘변화’를 이뤄보겠다는 신념이 있었지.
“... 네.”
- 지금의 네겐 그런 게 없어.
“......”
조상님이 보기에도 도훈이 똑똑하고 포괄적으로 능력이 매우 뛰어난 건 맞다.
일반인이라면 그것만으로도 뭐가 됐든 잘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터.
하지만 혹여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면 조상님이 생각하기에 도훈에게는 분명 부족함이 있었다.
- 꼭 신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세상의 온갖 유혹과 휘둘림에서 자신을 지킬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정치인도 사람인데, 사람에게 올바른 신념만큼 강한 무기가 없거든. 이해돼?
“... 네, 이해했습니다.”
일일 평가 외에 오래간만에 듣는 조상님의 잔소리였지만, 도훈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으니까.
사실, 전혀 몰랐다기보다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게 더 맞겠지만.
“이거, 앞으로도 제사상을 푸짐하게 차려야겠습니다.”
- 오!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왜?
“그래야 조상님께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죠.”
- 엥? 인마! 이게 일반론이라서 네 귀에 쏙쏙 들어가는 게 아니야.
“그럼요?”
- 똑같은 얘기라도 더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있는 거지. 아마 다른 때였다면, 너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가지 않았겠냐?
“... 그랬을 수도 있겠죠.”
- 기름진 것 먹는다고 항상 살이 되는 게 아니잖아. 난 네 조건과 상황에 따라 필요한 얘기를 하는 것뿐이야.
도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그럼 제가 새겨들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이런 충고를 계속 안 하셨을 수도 있겠네요?”
- 당연한 거 아니야? 입 아프잖아.
“......”
간만에 귀에 쏙 들어오는 진지한 충고를 들어 살짝 감동했던 도훈이 다시 어이를 잃는 순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건’을 마친 조상님은 편안하게 허공에 드러누우며 말을 이었다.
- 어쨌거나 넌 지금 ‘닥일’이야.
“... 통닭 한 마리요?”
- 그게 아니고 닥치고 일이나 열심히 하라고.
“......”
- 뭐가 됐든, 그다음이란 걸 명심하고.
“... 네.”
조상님이 말이 멈췄고, 도훈이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기운 잃은 음식들을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 담던 도훈이 조상님을 흘끔 하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살아서 저 양반을 말로 이길 수 있는 날이 오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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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의 일상이 이어졌다.
간부회의를 주관하고, 각 부서의 회의에 돌아가며 참석해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다양한 시민과 만나 요구를 듣고 대화하며 이해를 구하는 등.
오늘도 마찬가지, 도훈은 주민센터에 회의실에서 열린 ‘주민과의 대화’ 행사를 마치고 마지막까지 남은 몇몇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 너무 보기에 딱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그 양반이 고집이 또 보통이 아니에요. 무조건 남에게 신세 지기 싫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거든. 병원도 못 가시고 집에서 끙끙 앓으시면서도 말이죠.”
“알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한 번 찾아가 뵙도록 하죠. 분명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 드립니다만, 최소한 이야기는 나눠 볼 수 있겠죠.”
“그거라도 어디에요. 고마워요, 시장님.”
“천만에요. 저희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 하라고 월급 받는 사람들인데요.”
도훈의 말에 동네 이웃의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던 아주머니가 반가운 표정을 했다.
빌라에 전세 들어 혼자 사는 노인이 있는데, 재산을 물려받은 뒤 분가한 자식들이 전혀 챙기지를 않는다는 얘기.
전에는 그나마 몸이라도 성해 이런저런 일을 하며 생활을 했는데, 최근 무릎이 안 좋아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려운 처지라는 노인을 혹시 도와줄 수 없냐는 얘기였다.
“직원이 곧바로 찾아뵙게 하겠습니다. 근영빌라라고 하셨죠?”
“맞아요. 거기 2층에 사세요.”
“알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시장님.”
마지막 사람들이 떠나자, 도훈이 옆에 앉은 주민센터 직원에게 시선을 줬고 직원이 담담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나서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긴급복지제도를 통하면 될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임 씨 여전하네요.”
“저 원래 일 잘했어요. 그나저나 방법이 있는데 아직 모르는 분들이 많네요.”
“정부정책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잖아요.”
긴급복지제도는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으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저소득층 가구를 대상으로 정부가 생계비, 의료비, 전기료, 교육비 등을 지원하는 제도.
이 제도는 이미 2006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런 제도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편찮으시다니까 병원부터 모시고 가는 게 맞겠죠? 복지팀에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완고하신 분이라니까 화를 내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좀···.”
“조심스럽게 행동해야죠. 그리고 이건 국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혜택이라고 설명도 해야 할 테고요. 저희도 다 알아요, 시장님.”
“... 하하, 네.”
정임의 똑 부러진 말에 도훈이 웃었고 듣고 있던 두진과 영배도 웃었다.
주민센터 총무팀에서 일하고 있지만, 오늘 행사 진행을 돕기 위해 자리한 정임은 다른 부서의 일이라고 모르지도 않고 떠넘기지도 않았다.
비서실에서 일할 때 보여주던 업무에 관한 ‘빠삭한 이해’는 주민센터에 나와서도 여전했다.
괜히 도훈이 그녀가 자리를 옮길 때 아쉬워했던 게 아닌 터.
“밥이라도 같이 먹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일정이 있어서요.”
아쉬워하는 도훈에게 정임이 웃으며 말했다.
“호호, 일정 없으면 이상한 거죠. 음, 이건 어때요? 이번 달 비서실 회식 때 제가 깜짝 손님으로 가는 거?”
“오! 좋네요. 회식 날짜 잡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도훈보다 더 반색하는 건 영배.
지연도 업무 쪽으로는 정임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지만, 취임하고 이리저리 허둥대던 영배는 정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다.
당연히 그만큼 ‘정’이 들었을 수밖에.
“수고하세요, 정임 씨.”
“네. 시장님도 수고하세요.”
정임을 포함한 주민센터 직원들과 인사를 교환하고 차에 오르자 두진과 영배가 차례로 입을 열었다.
“센터장에게 들었는데, 고 주무관 활약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어찌나 깐깐하게 비용 처리를 하는지 총무팀 팀장이 아직도 쩔쩔맨다고 하더군요.”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하하, 정임 씨답네요.”
“아마 다음 인사에 승진 추천될 것 같다고 귀띔하더라고요.”
“그럴 때가 됐죠.”
다음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정임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비서실 근무 후 승진하는 관행을 깨겠다는 도훈의 방침에 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당찬 사람.
큰 무리가 없다면 다음 인사 때 그녀를 승진시키겠다고 도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불과 이틀 뒤, 그녀에 대한 격렬한 민원이 들어올 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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