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묻어가기 싫다 - 3.
- 미안하게 됐어요, 강 지사. 그 친구가 그런 고집이 있는 줄은 내가 잘 몰랐네요. 괜한 짓을 한 모양이에요.
“대표님이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챙기시겠습니까? 인재영입위원회에서 좀 더 잘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 허허, 어쨌든 이거 참 면목이 없게 됐어요.
미안해하는 당 대표를 오히려 위로한 강정문.
‘좋은 일’이라고만 용건을 밝힐 때 ‘그런가 보다’ 하지 말고 확실히 확인하지 못한 게 후회됐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간 상황.
어찌 일이 이렇게 된 게 대표의 책임이겠냐 싶었지만, 강정문도 나름 할 말이 있었다.
“그리고 위원회에서 저나 김용진 의원에게 의견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부분은 좀 많이 아쉽습니다.”
- 흐음.
“아무리 새 인물을 당에 영입하기 위한 독립위원회라지만, 이런 일까지 비밀리에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원 자격을 가진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 전부 물갈이 대상인 건 아니잖습니까.”
- 휴우.
“내부에 사정이 있는 건 압니다만, 상식적인 과정을 밟는다면 잡음이 더 나올 일이 없지 않을까요?”
- ... 그건 강 지사 말이 맞네요. 내가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네, 들어가십시오.”
통화를 마친 강정문이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 어찌 이리 어리석은지···.”
정당 내부의 문제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한국 사람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파벌’, ‘정파’ 혹은 ‘계보’.
당이라는 것이 출신과 이해, 생각이 다른 수많은 이들의 집합체이다 보니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한 당 안에 공존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지금 둘로 나뉜 보수 야당은 지난, 지지난 정권을 공동으로 운영했던 이들이었다.
두 번이나 대통령을 연속 배출하는 등, 절대 무너지지 않을 듯한 강력한 모습을 보이던 그들은 전임 대통령의 탄핵 문제가 불거졌을 때 분열하며 갈라졌고 아직도 분열된 상태.
현 정부 들어 보수 정당의 지리멸렬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게 대오가 분열되어 있다는 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 남 얘기할 때가 아니야.”
강정문은 보수 정당의 분열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여당 내에도 복수의 계파가 있다.
현 대통령을 중심에 놓고 친-, 반- 세력으로 크게 나뉘지만, 세세히 따져보면 더 다양한 분류가 가능했다.
계파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당권 혹은 권력 장악을 위해 벌이는 활동 중에 분명 방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특정 인물을 과도하게 비난한다거나, 특정 인물을 비난하는데 동참하지 않는다고 ‘적’으로 몰아가는 그런 일이라던가.
거기에 총선을 눈앞에 두고 각자의 계파에 속하는 이를 더 많이 선거에 출마시키려는 경쟁 같은 것도 포함시킬 수 있을 터.
현재 민의당 인재영입위원회에서 그런 치열한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강정문도 모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되는데···. 대표님도 부쩍 힘들어하시는 모양인데.”
사실, 당 대표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상황이 심각했을 터.
현 당 대표는 과거 진보 정권에서 장관도 하고 총리도 하고 국회의원을 몇 번이나 걸친 여권 내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주 무게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당 대표가 은퇴하기 전 마지막 일이라 스스로 다짐하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일이, 당 내부 계파 간 알력다툼의 확산을 막고 안정적인 당 운영에 주력하는 일.
당 대표와 그의 당 운영방침에 동의하는 이들이 상당하기에 그나마 이 정도였지만, 점점 잡음이 흘러나오는 것이 조짐이 좋지 않았다.
“쩝, 당분간 중국관에서 술 마시는 건 꿈도 꾸지 말아야겠네.”
찾아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던 중국관 사장을 떠올리며 강정문이 입맛을 다셨다.
대흥에 가서 도훈과 주거니 받거니 입씨름하는 것도 즐겁지만, 맛있는 안주를 놓고 즐기는 부담 없는 술자리는 긴장을 푸는 데 최고였다.
더 자주 못 가는 게 아쉽기만 할 따름인데, 그 동네 시장인 도훈이 자신의 괜한 부탁으로 아주 불쾌한 만남을 해야 했으니···.
“쩝.”
‘당분간 보지 말자’는 얘기를 한 뒤에는 전화도 받지 않아서 메시지로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했다.
- 능력과 신념이 있는 집단에 소속되어 도움을 받는 것도 좋겠습니다만, 집단에 소속되면 분명히 제 뜻과 반대로 ‘휘둘리는’ 때가 오겠죠. 대흥시 살림을 더 잘 사는 데 굳이 그런 불합리함까지 감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번 대흥에 왔을 때, 살짝 술기운이 오른 도훈과 단둘이 담배를 피울 때 ‘아직도 당적을 갖는 것에 거부감이 있느냐?’ 물었을 때의 대답이었다.
그런 대답을 들을 거로 생각하고 던진 질문이었고, 그래서 그 영락없는 답을 하는 도훈이 새삼스러웠다.
“참, 고집스럽게도 한결같은 친구란 말이야···.”
강정문이 본 도훈의 첫인상은, 기존의 질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권위를 필요 이상 의식하지 않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
도훈과 이런저런 만남을 늘려가며, 그의 지향점은 진보적이지만 현실에서의 책임을 더 무겁게 여긴다는 것도 확인했다.
즉, 말로만 장밋빛 미래를 떠드는 이상주의자가 절대 아니라는 말.
거기에, 기본적인 능력도 출중하지만 필요한 지식을 광범위하게 습득해 현실에 적용하는 것도 비범하게 잘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작은 시라도 그곳 행정이 논문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그렇게 능력도 좋은 친구가 젊기까지 한 데다가 적이 아닌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공손하기까지 하다.
‘... 정치인으로서 아주 좋은 재목이야. 하지만···.’
강정문은 도훈이 잘 성장하면 훌륭한 정치인이 될 거라고 진즉에 결론을 내렸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로 훌륭할지 그냥 적당히 훌륭하고 말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기대되는 청년이었다.
‘... 진심으로 정치하기 싫어한다는 게 좀 그렇지만···.’
뭐, 그거야 자신이 선택할 부분이니 강정문은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부추길 생각이 없었다.
최소한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은.
‘어떤 무리에 소속되는 건 쉽지만, 뜻을 함께하는 무리를 만드는 건 어렵지. 하지만, 그 친구라면···.’
그렇게, 도훈에 관해 생각하던 강정문이 불현듯 뭔가를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투덜거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눈치 보여서 같이 술 먹자고 하지도 못할 판국에···. 일이나 하자, 일이나.”
강정문이 ‘도지사 모드’를 회복하고 책상 위에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는 데이트로 즐겁고, 누군가는 일로 바쁜 어느 늦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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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늦은 저녁, 서울의 모처.
회의실 비슷한 공간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문이 열리고 역시 정장 차림인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다녀왔습니다.”
“어서 와요.”
“회의가 길어졌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오정민이 들어서자 남자들의 대화는 멈췄다.
오정민 외에 실내에 있던 네 명 모두 전, 현직 국회의원.
거기에 이들 모두가 여당인 민의당 소속인 이들이었다.
“대표님이 무슨 특별한 이야기라도 하신 겁니까? 갑자기 회의를 소집하셨는데.”
“네.”
자리에 앉는 오정민에게 상석에 앉은 남자가 물었고 오정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앞으로는 인재영입위원회에서 모든 절차를 공식적으로 처리하랍니다.”
“...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처럼 위원 개인이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건 금지한다는 겁니다.”
“... 음. 위원장이나 당 대표의 동의를 얻어도요?”
“네.”
“위원회 활동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로군요.”
“좀 이르지만, 그런 것 같습니다.”
총선을 대비한 인재영입위원회이지만, 아직 위원회가 본격적인 공개활동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오정민이 도훈을 만난 것은, 위원회가 백지상태에서 본격적 활동을 시작하지 않기 위한 사전 접촉의 일환이었다.
위원들이 제각기 추천한 이들 중 일부를 위원장과 당 대표의 동의를 얻어 먼저 접촉해, 활동 개시 발표와 함께 ‘이미 이 정도의 인물을 영입하는 성과를 거뒀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 아쉽게 됐네요.”
“그러게요.”
“흐음.”
상석의 남자가 먼저 말했고 다른 이들이 맞장구를 쳤다.
이 모임이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은 따로 있었지만, 최소한 이 자리에서는 상석의 남자가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오정민은 그다음, 다시 말해 전체 계파로 따지면 ‘넘버 쓰리’라고나 할까.
그가 ‘아쉽다.’ 말함으로써, 당 대표가 영입위원회 회의에 전한 이제부터 개별 접촉을 금한다는 방침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기야, 그들 계파의 수장이라고 해도 지금의 당 대표를 함부로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
특히, 그것이 상식에 반하지 않는 결정일 때는 더욱 그러할 터.
“오 의원이 고생했는데, 아쉽게 됐어요.”
“아닙니다. 제가 너무 자신만만했던 것 같습니다.”
상석의 남자가 위로하는 투로 말했지만, 본의는 꼭 그렇지만은 않을 터.
오정민과 상석의 남자는 모두 현역 재선의원으로, 계파 내 영향력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둘 중 그 크지 않은 영향력의 차이를 더 많이 의식하는 건 오정민이 아니었다.
“위원회 차원에서 또 그 사람과 접촉을 한답니까?”
다른 사람이 화제를 돌렸고 오정민이 답했다.
“확신할 수는 없는데, 제안이 최소 한 번은 가겠죠.”
“설마 그때는 다른 말을 하는 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절 대했던 태도를 생각하면요.”
“흐음.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좀 그렇군요.”
오정민은 이들에게 이미 도훈과 만나서 있었던 일을 단 하나도 보태거나 빼지 않고 설명했었다.
도훈이 칼같이 제안을 거절했다는 걸 빼면 크게 문제될 게 없는 만남이었다는 걸 이들도 알았다.
“... 살짝 건드려보는 건 어떻습니까?”
“누굴요? 그 시장을요?”
“네. 혹시라도 우리 말고 다른 쪽에서 선을 대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
“듣자 하니, 충남 도지사랑 그 지역 국회의원이랑은 제법 친하다는 것 같던데요.”
이 모임에서 도훈을 영입하자고 처음 말한 것은 오정민이지만 다른 이들이 동의한 것은, 현재 당내 다수라 할 수 있는 개혁 성향 계파에 소속된 이들과 가깝다는 점을 고려한 결과였다.
도훈이 국민적인 인지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일로 좋은 이미지를 가졌고 그런 이가 다른 계파에 합류하는 걸 막기 위한 양수겸장이라고나 할까.
“흠, 제 생각에 아직은 아니에요. 괜히 조용한 사람을 건드렸다가 역풍 맞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살짝’이라고 한 겁니다.”
“완벽하게 수위를 조절하기 어렵잖아요. 지난번에도 플러스 효과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상석의 남자와 오정민이 침묵하는 가운데 다른 이들이 가볍게 입씨름했다.
입씨름은 상석의 남자가 입을 연 뒤에야 끝났다.
“제가 알기로는 그쪽에서는 영입 제안은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그 사람이 진심으로 무소속을 고집하는 것 같다는 얘기, 큰 비밀도 아닙니다.”
“... 맞습니다.”
아는 얘기였기에 오정민도 맞장구를 쳤다.
오정민의 표정은 담담했으나 속이 쓰렸던 이유는, 얻을 이익이 크다면 끝끝내 고집하지 않을 거라고 오정민이 주장했었기 때문.
“일단은 지켜보죠. 내 생각에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누가 됐든,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합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식으로 다시 마주치게 될지 모르니까요. 아직 우리도 그 친구를 잘 모르니 다른 때에 기회가 있을 수도 있죠. 안 그렇습니까, 오 의원님?”
“맞습니다, 의원님.”
오정민이 상석의 남자에게 동의하자 입씨름하던 남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안건이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 하필, 이렇게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곳일 줄이야. 난 여기 보내놓고 이놈의 자식은 뭐 하고 있을꼬?
아주 오래간만에, 서울까지 ‘출장’ 온 누군가가 허공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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