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묻어가기 싫다 - 2.
1월 말의 일요일 오후, 대흥시 운계면의 어느 공원 앞에 멈춘 소형차 안.
띠리리리, 띠리리리.
‘... 신호가 가네. 다행히도.’
어제 낮에 통화할 때만 해도 세경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는 것도, 담담하지만 좋은 느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이야기를 집중해 들어주는 것도 여느 때와 다름없었기에.
주말에 출근했다가 잠깐 쉬는 사이 길지 않게 통화했던 것이지만, 도훈과의 통화는 언제나처럼 쌓인 피로를 잠깐이나마 씻어 주는 활력소이기에 충분했다.
오늘 느지막하게 일어나 밥을 먹고 나니 도훈과 순심이가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차를 몰아 여기에 온 세경.
물론, 보고 싶다는 건 진짜였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기도 했다.
- 여보세요? 세경 씨?
“아, 도훈 씨. 혹시 자고 있었어요?”
도훈의 목소리에 잠기운이 섞인 것을 읽어낸 세경이 미안한 듯 말하자, 이내 도훈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 네. 하하, 아침 먹고 설거지랑 청소하고 잠깐 잠들었네요. 세경 씨는 밥 먹었어요?
“물론이죠.”
- 음, 그럼 지금 뭐 해요? 설마 오늘도 사무실에 나간 건 아니죠?
“아니에요. 지금 차 안이에요.”
- 차 안이요?
“네.”
- ... 설마, 그 차가 대흥시 어딘가에 주차되어 있다거나···.
도훈의 말에 세경이 과장되게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와, 도훈 씨 어떻게 알았어요? 나 정말 대흥에 와 있는데.”
- ... 진짭니까?
“네. 저 지금 도훈 씨 집 뒤편에 공원 앞이에요.”
- 정말요? 안 추워요?
“오늘 날씨 생각보다 안 춥고요. 지금 히터 켜진 차 안이라 괜찮아요.”
- ... 하하.
“날씨 괜찮은데 순심이랑 잠깐 여기로 산책 오지 않을래요? 겸사겸사 내 얼굴도 볼 겸?”
- 10분만 기다려요.
“하하, 네.”
통화를 마친 세경은 차의 시동을 끄고 내렸다.
날이 풀리기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미세먼지가 덜한 날이라 더 반가웠다.
좀 풀렸더라도 충분히 추운 날씨이긴 했지만, 도훈과 잠깐 순심이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30분은 괜찮겠지?’
잠깐 산책을 한 뒤, 전에 갔던 반려동물 출입을 허용하는 카페에 가자고 생각하는 세경.
거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시켜놓고 도훈과 마주 앉아 지난주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도훈과 함께 하는 모든 게 다 좋지만, 대화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는 그녀였다.
도훈과 세경의 데이트 코스에 이런 ‘수다 떠는 시간’은 처음부터 있었다.
두 사람이 더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 시간이 길어졌다.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보는 일도 즐겁지만, 마주 앉아 대화하는 그 시간이 더 즐거웠으니까.
화제의 제한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이니 무슨 얘기를 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도훈과 강정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슬쩍 떠볼 생각이었다.
왈왈! 왈왈왈!
익숙한 개 짖는 소리에 세경이 돌아섰다.
저만치 공원 입구에서 순심이와 함께 달려오는 도훈이 보였다.
“세경 씨!”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드는 도훈의 모습.
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밝은 모습이라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오래간만이야, 순심아.”
왈왈! 왈왈왈!
순심이를 자주 보지는 못하는 세경이었지만, 순심이는 도훈과 세경의 관계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경에게 맹렬히 꼬리를 쳤다.
“왜 나와 있어요, 안 추워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훈이 다정히 묻자 세경이 순심이를 안아 들고 일어섰다.
담담히 미소 짓는 도훈의 모습에 세경의 머릿속에서 애써 짠 데이트 계획이 사라졌다.
이 다정한 사람을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왜 화내게 했을까?
그런 세경의 생각은 곧바로 말이 되어 나왔다.
“우리 바보 사촌 오빠가 도대체 도훈 씨에게 무슨 잘못을 한 거예요?”
“... 예?”
“도훈 씨 화냈었다면서요. 내용은 모르겠지만, 바보 사촌 오빠가 도훈 씨에게 실수한 것 같다고 찜찜해 한다던데? 도대체 내용이 뭐에요?”
“... 하하.”
정색하고 묻는 세경의 모습에 말문을 잃은 도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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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에 입당하실 거라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입니다.”
“......”
“총선을 눈앞에 둔 이 시기, 모든 정당이 참신한 인재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총선은 선택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물갈이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국민에게 준비된 새로운 인재를 내보이는 것은 정당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시장님도 아시겠지만요.”
“... 그래서 저더러 민의당에 입당하라고요?”
“네.”
썩어들어가는 표정으로 묻는 도훈에게 자신 있는 미소를 머금고 답하는 오정민.
“시장님도 우리 정부의 성공을 바라실 거라고 믿습니다.”
“......”
“정권 출범 직후부터 지금까지 국회가 제대로 역할을 못 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
“정권 후반기라도 국회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정부의 일에 조금은 탄력이 붙을 겁니다. 지금껏 국회에서 판판이 막혀온 개혁이나 경제정책에 힘이 실릴 테고요. 정부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드디어 만들어지는 거죠.”
“......”
“그래서 저희 당은 참신하고 소신 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도훈이 아무런 반응이 없음에도, 오정민은 무슨 노래라고 부르듯 자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 저 사람이 인재영입위원회 위원이 됐지.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재선인 오정민은 당내에서도 기획, 전략에 능하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다.
함께 일해본 적이 있는 도훈이 보기에도 그런 쪽의 일을 능숙하게 하는 인물이기는 했다.
다만, 정당에 소속될 생각이 없다고 진즉부터 밝힌 도훈에게 입당하라는 그의 논리에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다.
‘정권의 성공을 위해 입당하라고? 미친···.’
냉정하게 말해, 여당에 참신한 인물이 많이 들어가 그들이 총선에 출마한다면 의석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통령 지지율이 간당간당한 상태이니, 지난 지방 선거 때처럼 압도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당연히 총선 승리를 위해 갖은 전략을 고민하고 추진하는 게 정상일 터.
다만, 도훈은 거기에 자신이 대상이 된 게 마뜩잖을 뿐이었다.
“... 시기도 좋습니다. 지금 입당해 총선 승리에 이바지하면 나중에 분명 그 공을 인정받을 수 있을···.”
“누구 생각입니까?”
“... 네?”
“저 입당하라는 거 말입니다. 누구 생각이냐고요?”
정색하고 묻는 도훈에게 오정민이 답했다.
“제가 생각해 냈고, 당 대표님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
“강정문 도지사님께 저와 김 시장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분이 바로 당 대표님이십니다.”
“... 휴우.”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는 오정민을 매섭게 노려보더니 버럭 고함을···.
“잠깐, 잠깐. 그런 적은 없어요.”
“... 엥? 아니에요?”
금요일 오전, 오정민과 있었던 일을 재연하던 도훈은 앞서나가는 세경의 말을 끊었다.
“지연 씨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큰소리가 났었다고 하던데요?”
“에? 지연 씨에게 확인전화까지 했었어요?”
“아, 참. 이거 비밀로 하기로 했는데···.”
무의식중에 비밀을 말해 버린 세경.
그녀는 어제 오후 사무실에 나가 밀린 일을 하다가 도청 청사 내에서 강정문과 마주쳤다.
강정문은 어두운 표정으로 걷다가 세경을 보고 좀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그냥 얼버무리고 지나가는 강정문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그녀는, 친분이 있는 강정문의 비서실장에게 무슨 일이냐 물었다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 도지사님이 대흥시 김도훈 시장에게 뭔가 실수를 하신 모양인데, 김도훈 시장이 이번엔 아주 냉랭하게 반응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민 과장 눈치를 보는 것 같군요.
낮에 도훈과 통화했을 때 전혀 그런 기색을 읽지 못했던 세경은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지난번 회식을 통해 제법 친해진 원지연에게 전화했던 것.
그래서 오정민의 방문을 받고 그와 잠시 단둘이 만났던 도훈이 무척 불쾌해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던 것이다.
“아, 도훈 씨. 이거 지연 씨가 알려준 거 모른 척해주세요. 나 지연 씨 얼굴 못 봐요. 네?”
당황해 부탁하는 세경을 잠시 바라보던 도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난 모르는 것으로 하죠.”
“... 고, 고마워요. 헤헤.”
“대신 세경 씨도 지연 씨 귀찮게 하기 없습니다?”
“네. 약속할게요. 저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처음으로 그랬던 거에요.”
가슴에 손을 얹고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을 한 세경에게 도훈이 담담히 미소를 보였다.
일할 때는 빈틈이 없다는 사람이, 가끔 이렇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런데 콩깍지가 씌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 허술한 모습이 전혀 싫지 않은 도훈이었다.
“아, 참. 금요일에 화내지 않고 어떻게 했어요?”
“하하. 별다른 말 없었어요. 더 듣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가달라고 했죠.”
“... 그냥 가던가요?”
“제가 큰소리는 아니고, 잠깐 목청을 높이긴 했어요. 이런 일로 낭비할 시간 없다고 말이죠.”
“호오?”
“그 말을 듣고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있다가 갔죠.”
“그럼 도지사님에게 화가 난 건···?”
세경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엄밀히 말하면 화를 낸 건 아니고 어떻게 됐냐며 전화하셨길래 당분간 공적인 일이 아니면 연락하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은 했어요. 금요일 날 그 의원이랑 만난 게 도지사님 부탁이었거든요. 도지사님은 민의당 당 대표에게 부탁을 받았긴 했다지만요.”
“... 아.”
강정문은 오정민의 용건을 모르고 도훈에게 전화했다가 냉대를 받고 화들짝 놀라 오정민에게 확인전화를 걸고 나서야 뒤늦게 알았다.
오정민이 쥐고 있던 카드는 ‘입당’과 여당 내 ‘인재심사위원회 위원 위촉’ 두 가지였다는데, 두 번째는 아예 언급도 못 하고 ‘쫓겨났다’는 얘기를 듣고 도훈에게 오정민과 만나달라 부탁했던 걸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일은 벌어진 뒤.
그걸 씁쓸해하며 신경 쓰고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세경을 보고 움찔 놀랐던 것이었다.
도훈과 세경의 사이가 점점 발전해가고 있다는 걸 잘 알았기에.
“... 그런데 그렇게 당적을 갖는 게 싫으세요? 시장 일에 유리한 점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이 화제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기에 세경이 조심스럽게 묻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무소속이라고 해서 크게 불편한 점은 없었어요. 다행히 도지사님이나 지역 국회의원, 그리고 시의회 분들까지 업무상 마주쳐야 하는 분들이 합리적인 편이라서요.”
강정문, 김용진, 안준식으로 꼽을 수 있는 도훈의 업무 관계 인맥은 아주 다행스럽게도 ‘우리 당이면 더 잘 해주고 아니면 말고’ 식의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러니 꼭 민의당에 입당하지 않더라도 ‘대흥시장’으로서 일하는 데 별다른 지장이 없었다.
“사실, 오정민 의원이 차라리 시정을 펼치는 데 도움이 되니까 입당하는 게 어떠냐는 식으로 얘기했다면, 그렇게까지 짜증이 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네? 무슨 뜻이에요?”
“여당에 새 사람, 참신한 사람 영입하겠다는 생각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여당 지도부가 생각하기에 좋은 분들에게 얼마든지 제안할 수 있죠. 승낙하고 말고는 개인의 자유지만 말이에요. 그렇죠?”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왜···?”
궁금하다는 표정의 세경에게 도훈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김도훈이라는 개인이지만, 대흥시 시장이기도 해요. 오정민 의원은 개인으로서의 저보다는 시장으로서 이런저런 이미지를 가진 절 원했던 거겠죠.”
“... 그렇겠죠.”
“제 이미지를 통해 득 볼 생각만 한 거죠. 입당해서 얻을 이익이 크다면 저도 거절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고요.”
“음, 그 의원이 너무 계산적이었다 이 말인가요?”
“그것도 있지만, 제가 당적을 갖지 않을 거라 말한 건 공약이거든요. 이미 약속한 것인데, 입당하면 약속을 깨는 게 되잖아요.”
“흐음.”
“제가 그런 얘기 싫어하는 거, 저와 만나본 사람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오정민 의원도 제가 시장 되고 두 번째로 만난 건데, 얻는 게 크면 그 정도야 깨도 되지 않냐고 생각하더라고요. 시장으로서의 제가 필요하다면서 시장인 제가 우선시하는 걸 전혀 존중하지 않는 데 대화가 필요하겠어요?”
“... 그렇구나.”
세경이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도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 그냥 무리에 묻어가는 것보다 몇 안 되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고민하며 일하는 게 더 좋아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세경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 걸 입에 올렸다.
“그 좋은 사람들 리스트에 당분간 바보 사촌 오빠는 빼요.”
“하하. 빼라고요?”
“예. 도지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좀 더 신중해야죠.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말이에요. 도훈 씨를 위해서도 오빠가 좀 긴장할 필요가 있겠어요.”
“하하! 그래도 되는 거예요? 가족인데?”
“그게 맞는 거니까요.”
고민할 거리조차 안 된다는 듯 단언하는 세경의 말에 도훈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우리 뭐할까요?”
눈을 반짝이며 말을 잇는 세경을 도훈이 다양한 감정이 깃든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일요일 오후의 즐거운 데이트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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