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가지각색 - 1.
“와, 이 의리 없는 오빠 같으니. 거기 초대된 걸 말도 안 해?”
“말하면 뭐할 건데? 동네잔치에 초대된 것도 아니라 널 데려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닌데. 안 그래?”
“그래도···.”
“네가 다른 일 하면 또 모르겠다. 하지만, 초청차가 동행 데려가고 싶다고 하면 한 명쯤 허락한다고 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방송국 기자를 그 가운데 앉힐 리가 없잖아?”
“... 쩝.”
만찬이 끝나고 도훈은 도연이를 만났다.
미리 일정이 있어 서울에 간다고 얘기는 했지만, 그 일정이 ‘무려’ 청와대에서 있다는 얘기는 안 했었다.
동생이 자취하는 곳 인근 호프집에 마주 않은 가운데, 부럽다는 표정이 역력한 도연이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대통령이랑 사진은 찍었어?”
“당연히 찍었지. 하하.”
“... 어우, 얄미워.”
대통령은 행사를 마친 뒤 초청된 사람 모두와 함께, 그리고 열 명씩 앉도록 한 만찬장 테이블별로도 기념사진을 찍었다.
“너도 언젠가는 기회가 있겠지. 기자는 일반인보다 대통령 만날 기회가 많을 거 아니야.”
“난 사회부거든? 정치부에서도 운이 좋아야 청와대 출입하는 거라고. 그리고 청와대 출입해도 대통령 얼굴 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야.”
“하긴, 괜히 대통령이 아니겠지.”
“그래서 만찬 때 얘기는 많이 했어?”
“취재하는 거냐?”
“취재는 무슨. 거기 담당 기자가 알아서 기사 쓰겠지. 그냥 궁금해서 묻는 거야.”
“나 말고도 사람 많았잖아. 다들 열심히 이야기해서···.”
“발언 기회도 없었어?”
“... 그건 아니었지.”
송년 만찬 참가자는 전국에서 뽑힌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일반인.
100명의 만찬 참가자 중에 경찰관이나 소방관, 군인 등의 공무원이 몇 있었지만, 선출직 공무원은 도훈이 유일했다.
당연히 참가자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시선을 끌 수밖에.
- 아, 그 테이블에 대흥시 김도훈 시장님도 계시네요. 여기서 대통령님 말고는 유일하게 ‘어공’이신데,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우연히 도훈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에게 발언 기회가 주어진 다음, 사회자가 먼저 도훈에게 발언을 권했다.
도훈은 일장연설을 하는 대신, 행정에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데 정부 대응이 조금씩 늦는 것 같아서 아쉽다는 얘기를 짧게 했다.
-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그런 아쉬움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정부는 좀 더 능력을 키워야 할 테고, 국회와의 협력에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김 시장님은 젊은 나이에 무소속이신데도 시의회와 관계가 좋은 것 같습니다.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요?
- 제게 비결이 있는 게 아니고 단순히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다행히, 대흥시 의회도 젊고 참신한 분들이 다수입니다. 차이는 인정하되 현안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어떤 사안이든 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춘 분들이거든요.
- 허허, 정말 부럽네요. 저도 열심히 할 테지만, 김 시장님도 좋은 시정 보여주세요. 기대하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발언권이 다른 테이블로 넘어가며 도훈의 발언은 끝났고, 그게 만찬장에서 도훈이 한 말의 전부였다.
불만은 없었다.
사전 미팅 때 충분히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처음 인사할 때 대통령 부부의 따뜻한 표정과 눈빛도 좋았으며, 밥도 맛있었으니까.
도훈이 만찬을 되새기고 있는데, 도연이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전체적인 소감은?”
“응?”
“청와대 가서 대통령 만난 소감이 어떠냐고.”
“음, 별것 없어. 그분은 그분 역할 잘하셨으면 좋겠고, 나는 내 일 열심히 해야겠다, 뭐 이런 거지.”
“에이, 너무 심심하잖아.”
“기삿거리 취재하냐? 심심하다고 불평하게?”
“그런 건 아닌데, ‘무려’ 대통령이잖아.”
“네 말뜻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나도 ‘무려’ 시장이다.”
“......”
장난기 어린 도훈의 말에 도연이 밥맛 떨어진다는 표정을 했다.
동생 앞이었기에 꺼낸 말이었지만, 장난인 것만은 아니었다.
남에게 일 잘하라고 비판하고 충고할 수는 있겠지만, 그보다 더 도훈이 집중해야 할 건 대흥시 시장으로서의 일일 테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정을 비판할 권리도 중요하겠으나 대흥시 시장으로서 시정에 무한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새삼 되새겼다고나 할까.
청와대 다녀오기 전에는 싱숭생숭한 마음이라 잘 몰랐는데, 만찬을 끝내고 청와대 경내를 빠져나오자마자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었다.
“진짜 별것 없었어. 만찬 끝나서 청와대 나오기가 무섭게 나도 우리 시민들 얘기를 더 열심히 들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 나도 만찬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민 초청해 회식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흠? 오빠는 요즘도 저녁마다 시민들 모임 찾아다니고 하지 않아?”
시정에 주민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시작했던 도훈의 시민 모임 찾아다니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시기마다 현안은 달라도 시민들 모임을 찾아다니며 설명하고 호소하고 양해를 구하는 등, 아무리 못해도 1주일에 시민 모임 두 개 이상은 여전히 찾아다니는 도훈이었으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굳이 자리 만들어 초청할 필요 없지. 예나 지금이나 초청받지 않고서도 빨빨거리며 잘도 돌아다니는 것 같던데.”
“빨빨거려? 누구한테 들었냐?”
“진주 언니.”
“... 쩝.”
도훈이 떫은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고 도연이 피식 웃고는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며 도훈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자꾸 오빠한테 개기는 것 같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개기는 게 아니고 누구한테 들은 얘기를 ‘들은 그대로’ 전한 것뿐이네요.”
“... 흠, 아무리 햇병아리라도 기자는 기자다 이건가? 최소한 말빨은 전보다 나아진 것 같네. 물론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다는 건 아는지 모르겠다만.”
“헤헤.”
도연이 도훈의 눈치를 보며 헤실거렸다.
아무리 이제는 버젓이 직장생활을 하는 성인이라지만, 오빠가 자신을 반쯤은 업어 키웠고 단순히 오빠 이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한 마디로, 아직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잘 안다고나 할까.
“참, 그 언니랑은 잘 지내고 있어?”
“... 세경 씨? 잘 지내고 있지.”
“어디까지 갔어?”
“......”
청와대 얘기를 물을 때보다 도연이의 눈이 훨씬 반짝였다.
도훈은 담담히 동생과 시선을 교환하다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남의 연애에 신경 끄세요. 김도연 기자님.”
“오오! 연애? 방금 연애라고 했어? 이야! 이거 대사건···.”
“김도연.”
도훈의 담담한 말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과장되게 놀랍다는 몸짓을 하던 도연이 멈칫했다.
“... 왜?”
“... 너 계속 그렇게 까불면 후회한다.”
“... 후, 후회라니?”
“오래간만에 흑역사 대방출 한 번 해봐? 너 중학교 들어가서도 캐릭터 빤스만 입던···.”
“스, 스탑! 항복!”
도연이는 초등학교 때 ‘꽂힌’ 어떤 만화 캐릭터를 너무나 좋아해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한동안 그 캐릭터가 그려진 속옷을 입었었다.
도훈이 그걸 아는 이유는, 동생의 요청으로 그 속옷을 사다 준 사람이었기 때문.
질린 얼굴로 냉큼 항복 선언을 하는 도연에게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진주처럼 날 놀려먹으려면 20살쯤 더 먹고 다시 시도해봐라.”
“......”
단숨에 도연을 제압한 도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찌 됐든,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내 일부터 열심히 하자’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고 돌아가 곤혹스러운 일과 마주할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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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의 마지막 월요일.
시청에 출근한 도훈은 예상했던 질문을 받아야 했다.
“청와대 밥은 맛있었습니까?”
“들어가 보니까 어떻던가요?”
“사진 찍으셨죠? 좀 보여주세요!”
비서실에 들어서자마자 도훈을 맞이한 직원들의 일성.
매일 순심이부터 받아 안던 두진마저 ‘밥맛’을 묻고 있었다.
예상은 했어도 이 정도일 줄 몰랐던 도훈은 순심이를 내려놓고 답했다.
“커피 한 잔씩 들고 소파에 모이세요. 한 번에 얘기하죠.”
제각기 찻잔을 들고 소파에 모여 앉은 비서실 직원들에게 도훈이 ‘청와대 방문기’를 풀어놓은 건 약 5분 정도.
간략하게, 핵심만 딱딱 짚으며 이야기를 마치자 지연이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시장님, 시장 되기 전에 글 쓰셨다는 거 거짓말이죠?”
“... 왜요?”
“아주 길고도 재미있게 얘기할 수 있는 소재를 어쩜 그렇게 간략하게 요약정리를 해 버리세요?”
“... 하하.”
뭔가 거창하고 재미있는 얘기를 기대했던 지연이 그렇게 불만을 표하자 다들 웃었다.
애초에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필요가 없는 화제를 접하면, 핵심만 딱딱 짚고 빨리 마무리하는 게 도훈의 성향이라는 걸 잘 아니까.
“청와대라는 걸 빼면 특별한 거 별로 없었습니다. 뭐, ‘나는 내 일 열심히 해야겠구나’하는 다짐을 다시 하고 왔으니까 가길 잘했던 것 같고요. 그게 핵심입니다.”
“... 하하. 하고 싶은 말씀은 다 하셨어요?”
“네. 사전 미팅 때 충분히 했습니다. 초청된 분들 다 열심이어서 거의 토론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방송국 토론에 비교해서 전혀 내용이 부족하지도 않았고요.”
“네.”
도훈의 청와대 방문기 설명이 그렇게 금방 끝나고 조회를 시작하려는데, 예상 못 한 사람이 비서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 감사팀장님이 왜···?”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굳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감사팀장의 모습에 도훈뿐만 아니라 직원 모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감사팀의 업무 특성상, 팀장이 저렇게 얼굴을 굳히고 나타난 것은 절대 좋은 징조일 리가 없었으니까.
도훈은 두진에게 눈짓한 뒤 말없이 몸을 일으켜 시장실로 들어갔고, 두진과 감사팀장이 뒤를 따랐다.
“무슨 일입니까?”
시장실 소파에 세 사람이 앉자 도훈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감사팀으로 진정이 들어왔습니다.”
“진정이요? 무슨 내용인데 그러십니까?”
“금선면 주민센터 어떤 직원이 일을 처리하면서 접대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직원이 접대를 받았다고요?”
“네.”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잃자, 두진이 끼어들었다.
“진정을 넣은 사람은 접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자신도 접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몇 번이나요?”
“정확한 횟수는 말하지 않았고 두 번 이상이라고만 했습니다.”
“접대뿐입니까? 금품을 받았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그 사람은 접대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진정을 넣은 사람의 말로는 자신만 접대한 건 아니라고···.”
“......”
두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다물었고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땠길래 접대라고 하는 겁니까? 비싼 술집에 가서 양주라도 마셨답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드문드문 만나서 밥이나 술을 마시면서도 단 한 번도 돈을 낸 적이 없답니다. 그리고 밥 먹고 술 마시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항상 그 직원이라고 합니다.”
“......”
도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한 번 그런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반복적으로 그랬다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인데, 매번 먼저 요구했다?
게다가 한 사람에게만 그런 것도 아니다?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처음 밥을 산 게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답니다.”
“진정 넣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접대했다는 사실은 조사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 얘길 들은 게 어제저녁입니다. 직접 만나서 세세하게 얘길 들었고, 사실확인 차원에서 접대했다는 다른 사람들을 지금 직원들이 찾아갔습니다.”
“... 신빙성이 높다는 얘기네요?”
“네. 좀 더 알아봐야 하겠지만, 일단 진정을 넣은 사람의 말은 대부분 사실인 것 같습니다.”
“... 휴우.”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두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간 큰 직원이 도대체 누굽니까?”
“금선면 주민센터 황상돈 산업팀장입니다.”
“... 황상돈 팀장이요?”
“네.”
두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고 도훈이 표정은 담담하나 눈빛을 싸늘하게 빛내며 물었다.
“전에 의회 사무과장이었던 그분 맞습니까?”
“맞습니다, 시장님.”
의회와 관련한 학위까지 따서 대흥시 최고 의회 전문가라고 불렸던 인물.
일부 의원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 내부 정보를 정기적으로 전달해 두진이 절대 의회에 계속 놔둬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 이동시켰던 직원.
첫 인사발령 때 무척 고민했던 부분인지라 도훈도 자세히 아는 직원의 이름이 나오자 시장실 분위기가 더욱 가라앉았다.
“... 휴우.”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두진과 감사팀장이 침묵을 지켰다.
연말을 맞이한 시청에 ‘한파’가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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