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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시장 되다-149화 (150/279)

149. 송년 만찬 - 1.

세경과 강정문이 다녀간 며칠 뒤 월요일.

두진, 지연과 점심을 먹기 위해 자신의 차를 몰고 시청 청사를 나서는 도훈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런 도훈의 표정이 변한 것은 두진이 입을 연 직후.

“어제 종일 쉬었는데 뭐하셨습니까?”

“그냥요. 하하.”

운전대를 잡은 도훈이 제대로 답도 하지 않고 웃자, 조수석에 앉은 지연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제 뭐 했냐는 질문이 그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네?”

“답도 안 하고 웃고 계시잖아요.”

“그랬나요? 하하.”

실없이 웃는 도훈의 모습에 뒷좌석의 두진은 짐작이 간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데이트라도 하신 모양이네요.”

“... 그렇죠, 뭐.”

“좋을 땝니다. 안 그런가, 원 주무관?”

“그러게요. 호호.”

핀잔 섞인 농담에도 도훈이 해맑게 실실 웃는 이유는 일요일인 어제 오후, 실제로 세경과 데이트를 했기 때문.

“뭐 하셨는데요?”

“하하. 데이트가 다 그렇죠, 뭐. 밥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고, 서점에 가서 책 구경도 좀 하고 또 차 마시고···. 별일 없었습니다.”

“없었던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뭘.”

“하하하!”

원래는 세경이 바빠서 만날 계획이 아니었는데, 오후 이른 시간에 시간이 났다며 세경이 연락해 와 둘은 대전에서 만났다.

저녁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며 데이트를 해서 기분이 좋은 것도 있지만, 기분에 영향을 끼친 가장 큰 사건은 도훈이 어제 세경을 집 앞까지 차로 바래다주자 그녀가 작별 및 감사의 인사를 겸해 도훈의 볼에 뽀뽀해 준 것이었다.

키스도 아닌 뽀뽀였고, 입술도 아닌 볼이었다.

키스를 처음 해 본 것도 아니고 여태껏 ‘모태 솔로’였던 것도 아닌 도훈이니 이성 관계의 다양한 ‘경험’이 있지만, 세경의 가벼운 뽀뽀 한 번에 아직도 싱글거리고 있는 것.

- 네가 이 정도로 해롱거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좋냐?

‘누가 정신을 못 차린다고 그러십니까?’

- 쯧. 거울이나 보고 얘기해라, 인마.

‘커, 커험.’

조상님의 장난기 어린 말에 도훈이 답하는 순간, 사거리의 신호가 바뀌어 도훈이 차를 세웠다.

거치대에 꽂아놨던 업무용 핸드폰이 진동한 건 그때.

위이잉.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도훈 시장님. 여기는 청와···.

“죄송합니다만, 제가 지금 운전 중이니 잠시 후에 다시 전화해 주시겠습니까?”

- ... 네?

“제가 운전 중이고 지금 잠깐 신호대기 중이거든요. 금방 끝낼 통화가 아니면 이따가 다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

도훈의 말에 상대가 말을 못 잇더니 좀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했다.

- 그, 그러겠습니다. 이따가 다시 연락드리죠.

“네, 죄송합니다.”

뚝.

도훈이 핸드폰 액정을 건드려 통화를 마쳤는데 조수석의 지연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입을 열었다.

“시장님. 방금 ‘청와···.’ 어쩌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나요? 전 못 들었습니다.”

“청와? 설마 청와대에서 전화 온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청와···, 청화관? 아니면 청화 반점에서 전화한 게 아닐까요?”

“청화관이나 청화 반점이요? 그게 어디에 있는 곳인데요?”

“글쎄요. 저도 모르죠. 그냥 찍은 거니까. 하하. 어쨌든 청와대에서 제게 전화할 이유가 없잖아요.”

도훈이 웃어넘기는데, 두진이 고개를 불쑥 내밀고 말했다.

“‘청화’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청와’였어요.”

“맞죠, 실장님?”

“응.”

두진과 지연이 말없이 도훈을 바라봤지만, 도훈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에이, 설마요.”

“......”

“......”

도훈의 ‘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30분쯤 뒤, 세 사람이 점심을 먹고 차에 오른 직후.

위이잉.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도훈 시장님. 여기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아까 말이 중간에 잘렸던 걸 의식해서인지, ‘청와대 비서실’이라는 말을 아주 또박또박 발음하는 남자의 목소리.

“... 어디··· 시라고요?”

-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청와대 비서실이요?”

- 네, 저는 의전비서관실 조영민 행정관입니다.

“......”

- 여보세요? 김 시장님?

“... 진짜 청와대란 말씀이죠?”

- 하아, 네. 청와대 맞습니다.

깜빡, 깜빡.

“... 설마, 아까 전화하셨던 것도···?”

- 네. 제가 전화했었습니다. 운전 중이시라고 해서 다시 전화를 드린 겁니다.

“......”

- 설마 지금도 운전 중이신 건 아니죠?

“... 운전 중인 건 아니지만, 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인 건 맞습니다만···.”

- ......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아무 생각 없이 답한 도훈은 비슷한 표정의 두진, 지연의 그것과 마주쳤다.

‘왜 그렇게 말하냐?’는 듯 눈이 동그래진 두 사람.

- 정확히 1시에 다시 전화 드리면 될까요? 그때는 확실히 통화가 가능하시겠습니까?

“... 아, 네.”

- 알겠습니다. 1시에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 수고하세요.”

뚝.

살짝 사무적으로 변한 목소리가 끊기자 지연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고 말했다.

“... 시장님, 지금 청와대 전화를 두 번이나 까신 거예요?”

“... 까요?”

“운전해야 한다고 나중에 전화하자고 하셨잖아요.”

“... 그, 그랬나요?”

“상대는 그렇게 들었을 걸요? 안 그래요, 실장님?”

“... 그랬을 거야.”

두진이 동의하자 지연이 도훈을 말없이 바라봤다.

“... 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걸 상대가 어떻게 알겠어요.”

깜빡, 깜빡.

도훈이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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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시청 비서실.

도훈이 말없이 시장실에 들어간 직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비서실을 지키던 영배가 두진과 지연의 묘한 표정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두 분 표정이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 있었지.”

“... 있었죠.”

거의 동시에 두 사람이 답하더니, 지연이 부연 설명을 했다.

“... 했어요.”

“... 진짜요?”

“네.”

“... 하하,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두 번이나 깠다고요?”

“일부러 그러신 게 아니라 처음에는 몰라서, 두 번째는 놀라서 그러셨던 것 같긴 한데···. 결과적으로는 두 번 깐 게 맞죠.”

“... 하하하.”

영배도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이 됐다.

하기야 아무리 대담하고도 심드렁한 성격의 도훈이라지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운전해야 하니 나중에 통화하자’고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를 깔 수 있을 리가 없질 않은가.

“그런데 왜 전화했답니까?”

“모르죠. 나중에 통화하자고만 얘기했으니까요.”

“아, 그랬다고 했죠, 참.”

영배가 시장실 문에 이어 벽에 걸린 시계에 시선을 줬다.

어느덧 오후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시장실 책상에 홀로 앉은 도훈.

그 앞 허공에 뜬 조상님이 말없이 혀를 차며 업무용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후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 청와대가 별거냐? 대통령이 직접 한 것도 아닌데 사과는 무슨 사과?

“그렇죠? 하하, 제가 놀라긴 정말 놀란 모양입니다.”

- 네 녀석도 별수 없는 게지. 청와대가 별거긴 한 가보다.

“... 그러게 말입니다.”

조상님의 이율배반적인 말조차 깨닫지 못하는 도훈.

핸드폰 액정의 시계가 1시를 가리킨 직후,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잉, 위이잉, 위이이잉.

두어 번 심호흡한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시장님.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네.”

- 저는 전화 드렸던 조영민 행정관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말씀하시죠.”

- 휴우, 다행입니다.

“네?”

-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통령께서 시장님을 청와대 송년 만찬에 초청하고자 하셔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 초청이요?”

- 네.

“... 저를요?”

- 하하, 네. 대흥시 김도훈 시장님을요.

‘드디어’ 용건을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인지 어쩐지 모르겠지만, 여유를 되찾은 행정관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청와대로 초청받은 사람이 심심치 않게 이런 반응을 보이기 때문일 터.

그러나 이어진 도훈의 말까지 사람들이 자주 하는 건 아니었나 보다.

“... 왜요?”

- 네? 그, 글쎄요. 하, 하하.

잠깐 말문이 막혔던 게 머쓱했는지 행정관이 얼른 말을 이었다.

- 초청장을 비서실로 보내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네.”

- 초청장에 설명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이번 송년 만찬은 주로 전국에서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일반 시민을 모시고 대통령님과 대화하는 자리로 기획된 것입니다. 딱히 어떤 주제가 있거나 한 건 아니고요.

“... 네.”

- 초청 대상은 100분 정도입니다. 시간은 1시간 반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 네.”

- 날짜는···.

행정관은 송년 만찬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좀 멍했던 도훈은 그렇게 행정관이 설명하는 사이, 평정을 회복할 수 있었고 곧 설명이 끝났다.

- 혹시 궁금한 게 있으십니까?

“아뇨. 어떤 행사인지 이해됐습니다.”

- 네. 참석해 주실 거지요?

이어진 도훈의 말은 아마, 아니 분명 행정관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 터.

“... 글쎄요.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 ... 네? 네?

살짝 놀란 듯한 행정관의 반응에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참석 가부를 지금 바로 답해드려야 하는 겁니까?”

- 아,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럼 하루 이틀 생각을 좀 해보고 답해도 괜찮을까요?”

- 무, 물론이죠. 하하. 그, 그럼 언제 연락을 드릴까요?

“번거롭게 그러실 필요 없이 제가 연락을···. 아, 청와대 직원 연락처를 외부에 알리면 안 되나요?”

-아, 아닙니다.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업무 때문인 걸요.

“다행이네요.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수요일 오전까지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제 핸드폰 번호는 메시지로 넣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 ...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핸드폰을 내려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가 하나 왔다.

- 청와대 비서실 의전비서관실 행정관 조영민입니다. 010-XXXX···.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은 의자를 돌려 창밖에 시선을 줬다.

“... 청와대 송년 만찬이라···.”

송년 만찬이 됐든 송년회가 됐든, 한 해를 마무리하는 행사는 초청자를 바꿔 가며 복수로 열릴 터.

도훈은 왜 자신이 초청됐을지 가늠해 봤지만, 딱히 짚이는 게 없었다.

“도대체 날 왜 불렀지?”

일반 국민에게 지명도가 꽤 있다지만, 도훈은 영향력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대흥시 혹은 도훈 개인과 관련된 사안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있으나, 도훈이 의도한 것이 전혀 아니질 않은가.

- 대통령이 가감 없이 일반 국민의 눈에서 작년의 국정 평가를 듣고 싶은 것일 수도 있지. 국민과의 소통을 무척 중요시하는 사람인 것 같던데?

“그럴 수도 있겠죠.”

전 정부를 반면교사로 생각한 현 정부는 국민의 눈높이, 국민과의 소통을 무척 중요시했다.

국정 현장, 민생 현장을 쉬지 않고 찾는 대통령의 모습은 임기 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정치권이나 행정부 관료들에게도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고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 것을 여러 차례 이야기한 바 있었다.

“가만있자.”

며칠 전, 강정문이 찾아와 물었던 질문이 갑자기 생각난 도훈.

- 언제 어디서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속에 있는 말을 있는 그대로 할 겁니까?

‘당연하다’고 답했었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게 더 문제 아니냐고 반문까지 해가며.

“이거 설마···?”

강정문의 그 물음과 송년 만찬이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서 ‘가감 없이’ 지난 1년의 국정 평가를 듣고 싶어 한다질 않는가.

정말로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말할 것 같아서 자신이 초청됐을까?

“... 설마···.”

- 큭큭큭. 너 인마, 대통령 앞에서도 그럴 자신 있어?

“......”

- 아무래도 상대는 그걸 기대한 것 같다만?

“......”

- 이야, 이거 기대된다. 안 그러냐? 큭큭큭.

“......”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조상님에게 도훈은 아무런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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