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47화 (148/279)

147. 있는 그대로 - 2.

12월 첫 주 금요일 저녁, 진주네 집.

“옛다, 안주.”

“야, 살살 내려놔. 그릇 깨지겠다.”

“내 그릇이거든?”

“누가 아니래? 네 남편이 못 온다는 건 남편 상관한테 불평하라고. 나나 네 그릇 말고.”

“... 망할.”

진주가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았고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진주가 내려놓은 닭꼬치 구이를 집어 들었다.

옆에 앉은 영배 부부가 소리 죽여 키득거리는 가운데, 도훈이 캔맥주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펜션 예약은 취소했냐?”

“... 당근이지. 으휴. 위약금은 물었다만.”

“위약금으로 끝난 게 다행이지. 생각해봐라. 네 남편의 변덕쟁이 상관이 막 출발하려는 순간 지시를 내릴 수도 있었고, 토요일 아침에 불렀을 수도 있잖아. 그건 더 끔찍하지 않아?”

“... 상상하기도 싫어. 여하튼, 새로 온 대대장이 준수 아빠를 너무 굴려.”

“그만큼 믿으니까 그렇겠지.”

“...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아무리 군인이라도 한 달에 한 번은 온전히 쉬는 주말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더러우면 네 남편더러 빨리 진급해서 대대장 되라고 해.”

“... 에휴.”

원래 오늘 오후에 진주는 준수를 데리고 경기도 북부의 어느 펜션으로 놀러 갈 계획이었다.

남편인 박 소령이 주말 내내 쉴 수 있다고 해서 3주 전에 잡은 계획.

집에 잘 내려오지는 못해도 자신이 부지런히 운전해 오간 덕에 가족들이 얼굴은 잊지 않고 산다고 투덜거리던 진주도, 아빠를 무척 따르는 준수도 매우 기대했던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출발 24시간을 앞두고 취소됐다.

박 소령의 상관이 갑자기 무슨 지시를 내려서 박 소령이 주말에도 꼼짝없이 부대에 붙어있게 됨으로써 말이다.

덕분에 도훈과 영배 부부가 진주 가족이 펜션에 놀러 가 즐길 술과 안주를 소비하러 급하게 섭외됐다.

크게 실망해 대성통곡하고 시무룩해진 준수를 달래기 위해 순심이가 섭외된 것처럼.

“애들은 잘 자고 있지?”

“응. 좀 전에도 확인했어.”

“음, 좋아. 아주 좋아.”

“쯧, 안 마시라고 안 할 테니까 적당히 마셔.”

“예, 마님!”

영배 부부가 진주의 눈치를 보며 소곤거렸지만, 진주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늘의 자리는 순전히 풀 죽은 준수를 달래기 위해 급조된 것이었다.

사람이라도 좀 와서 북적거리면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다행히, 의도가 맞아떨어져서 준수는 순심이, 영배 부부의 남매와 어울려 놀다가 사이좋게 자고 있었다.

“야, 시간 다 됐다. TV 틀어 봐.”

“리모콘 형 옆에 있네요.”

“아.”

영배가 리모콘을 집어 TV를 켰다.

화면 위쪽에 ‘연말특집’ 어쩌고 하는 작은 글씨가 있는 가운데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너 저기에 나온다며?”

“응. 녹화했으니까.”

“뭐라고 했냐? 오늘 주제를 보니까 대차게 비판했을 것 같은데, 맞냐?”

“대차게는 아니고, 적당히 했다.”

도훈이 진주의 질문에 답하는데, 영배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야, 두고 보면 안다. 녹화할 때 카메라 감독이 ‘팩폭을 제대로 하시네요.’하고 감탄하더라.”

“팩폭?”

“팩트폭격.”

“아.”

진주가 묘한 표정으로 도훈에게 시선을 주는 순간, 광고가 끝나고 토론이 시작됐다.

출연한 패널들의 소개에 이어 사회자가 첫 주제를 말했다.

- 첫 주제는 ‘2019년 대한민국 정치,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입니다. 가볍게 참여한 토론자들이 각자의 생각을 짧게 이야기를 해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이어 패널들이 차례로 발언했다.

물론, 정치적 입장 차이에 따른 아주 상반된 평가였다.

- 국회가 제대로 기능을 못 함으로써, 정부 정책이 매번 제동이···.

- 정부와 여당의 독선적인 국정운영에 제동을 거는 것은 당연한 야당의···.

- 거대 정당들이 정치적 이권을 놓고···.

“예상했던 말과 거의 다르질 않네.”

“그러게. 날도 아주 잔뜩 세웠어.”

“총선 몇 달 안 남았잖아. 지금 저 사람들 다 선거 모드야.”

진주, 선아, 영배가 한마디씩 하는 와중에도 도훈은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 네, 이렇게 각 당 대표들의 평가를 들어봤는데요. 우리 국민은 이런 정치인들의 평가에 얼마나 공감하는지, 과연 생각이 비슷한지 들어보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에 이어 자료 영상이 나왔다.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의 짧은 평가였다.

- 솔직히 혐오스러워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길 바라는 것 같아요.

- 정치 뉴스를 보면 화부터 납니다. 도대체 전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어요.

- 정말 싫어지려고 해요.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안 두면 더 나빠질 것 같아서 일부러 더 정치 관련 뉴스를 찾아보기는 합니다.

시민들의 인터뷰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정치 잘하는 것 같지 않고, 관심을 두는 것도 싫어진다는 것.

여야 중 한쪽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수는 엇비슷했다.

“일부러 균형을 맞춘 거겠지?”

“아마도. 실제로는 좀 달랐겠지만.”

화면에 아나운서가 등장해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했다.

- 우리 국민 중 올 한 해 정치권이 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 사람은 30%를 넘지 못했습니다. 70%를 넘는 사람이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한다는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 볼까요? 자, 정치가 제 역할을 못 한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뒤이어 나온 그래프를 본 영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이것도 크게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

“그러니까.”

야당, 여당, 대통령.

국정 지지도나 정당별 지지율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순서대로 잘못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

이어, 설문조사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더니 마지막에 도훈이 등장했다.

담담하게 인사하고 행정 현장에서 느낀 2019년을 짧게 말한 도훈이 핵심을 찔렀다.

- 야당은 꾸준히 말해왔습니다. 대통령과 여당의 정책 방향부터가 잘못됐다고요. 방향이 틀렸으니 실패를 인정하고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고요. 안 그러면 나라가 망할 거라고요. 매번 그렇게 반대하며 각을 세웠죠. 야당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정책에 따른 각종 법안은 절대로 통과시키면 안 되는 것들일 겁니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올 한 해를 보면, 정부 여당이 제출한 법안들은 시기는 지체됐어도 끝내 통과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노선이 틀렸다고 지적했으면 노선을 바꾸게 하는 게 맞죠. 시간 끌면서 얻을 것 다 얻고 못 이긴 척 통과시켜 주는 건 왜 하는 겁니까? 나라를 그토록 위한다는 분들이면 소속 의원 전원이 삭발하든 단식을 하든 끝까지 막는 게 옳지 않습니까?

도훈의 비판 대상이 이번에는 여당을 향했다.

- 매사에 야당에 발목 잡혀서 성과를 못 낸다고 하는데, 그거 모르는 국민이 어디에 있습니까? 법안 통과가 그렇게 절실하면 제1야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과 합심해서라도 통과시키는 게 맞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못 했는지는 성찰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제1야당이 걸림돌이 된다면, 여론을 통해 제압을 하든지 아니면 질질 끌려가다가 뒤늦게 타협하지 말고 일찍부터 줄 거 주고 얻을 건 얻는 타협을 하는 게 맞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국민을 위한 성과에 목매는 분들이 왜 그 성과를 제때 내기 위해서 싸우려 하질 않는 겁니까? 모양 좋게 점잔이나 떨려고 여당 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여당 안에 있는 개혁 입법에 소극적인 분들 왜 가만히 놔두세요? 발목 잡는 야당만 잘못이고, 여당 내에서 눈치 보는 분들은 잘못이 아니랍니까?

담담한 말투였지만, 도훈의 말은 꽤 신랄했다.

- 마지막으로 여의도에서 정치한다는 모든 분께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정책이 제대로 성과를 못 낸 책임은 서로에게 미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이 봅니다. 올 한해 제가 평가하는 대한민국 정치는 책임 소재만 열심히 따졌을 뿐, 책임지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세력이 없었다고 느낍니다. 뭐, 올 한 해의 일만은 아니겠습니다만.

화면 속의 도훈이 잠시 쉬었다 말을 이었다.

- 지금 바뀌지 않으면 언제 바뀌려고 그러십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훈의 모습이 사라지고 토론자들이 자리한 스튜디오 영상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끝내 잘랐네.”

“그러게.”

영배와 도훈이 중얼거리듯 말하자 진주가 끼어들었다.

“뭘 잘랐는데?”

“원래 도훈이 마지막 멘트가 저게 아니었어. 저 다음이 있었어.”

“그래? 그게 뭐였는데?”

진주가 묻자 영배가 도훈을 흘끔 하고 답했다.

“본인에게 물어봐.”

“뭐였어, 도훈아?”

“그게 궁금해?”

“응.”

“저도요, 도훈 씨.”

진주와 선아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자 도훈이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조금 전 TV 속의 자기 모습을 흉내 냈다.

싸늘하게 눈을 빛내며 도훈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도 선거 때가 되면 또 기회를 달라고 하실 테죠? 우리를 지지해야 대한민국이 달라진다고 하실 테죠? 마치, 여러분만이 대안인 것처럼 선택을 강요하실 테죠?”

“......”

“참으로 뻔뻔하기도 하십니다.”

말을 마친 도훈이 소파에 등을 기대고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너 정말 방송국 카메라에다 대고 뻔뻔하다고 말했어?”

“어. 그래서 잘렸잖아.”

“야, 그게 나갔으면 어쩌려고?”

“틀린 말도 아닌데, 뭐.”

심드렁하게 답하는 도훈에게 진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맞는 말이라고 사람들이 다 ‘그렇구나’ 하는 줄 아냐?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얘기가 왜 있겠냐? 양쪽에서 미움 사면 어쩌려고 그랬어?”

“아, 방송 안 됐잖아. 잔소리는 거기까지만 해라.”

“그래. 어차피 편집될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세게 말했겠지. 다 지나간 일인데 이제 타박해서 뭐하냐.”

영배가 도훈의 편을 들자 진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한숨을 쉬더니 중얼거렸다.

“시장 일은 그렇게 안 하는 애가 왜 방송에만 나가면 위태위태한 거지?”

피식.

진주의 말에 웃고 난 도훈이 대꾸했다.

“난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이야. 그걸 곡해하거나 왜곡하는 건 내 책임이 아니지. 안 그러냐?”

“... 그렇긴 하지.”

“내 말이 있는 그대로 해석되지 않으니까 내가 언론에 나가기 싫은 거야. 뭐, 이번은 달랐지만.”

“쩝, 네 일은 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진주가 맥주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

“네 출연은 저걸로 끝이야?”

“아마도?”

녹화 날을 떠올려 본 도훈이 답했다.

그 날, 30분 정도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앞서 말했던 것들을 반복해서 찍느라 시간이 걸렸지, 여러 주제를 말하느라 그랬던 것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도훈의 예상과는 달리 ‘깜짝 출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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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S 연말특집 토론, 지금까지 2시간 넘게 각 당을 대표한 의원님들과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제작진이 준비한 마지막 영상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오랜 시간 시청해주신 시청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사회자의 멘트에 이어 화면에 등장한 것은 도훈이었다.

- 선거 때가 되면 또 기회를 달라고 하실 테죠? 우리를 지지해야 대한민국이 달라진다고 하실 테죠? 마치, 여러분만이 대안인 것처럼 선택을 요구하실 테죠?

“어?”

도훈도 놀랐고 다른 사람들도 놀랐다.

토론에 집중하느라 열심히 마시지 않아서 다들 취하진 않은 상태.

“... 설마?”

“... 아이고?”

‘뻔뻔···’이라는 말이 나올 거로 생각한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는데, 다행히 다른 화면이 이어졌다.

- 우리가 왜 그래야 합니까?

- 왜요?

- 도대체 왜요?

- 왜요?

- For what?

- Why?

인터뷰에 등장했던 시민 여럿이 ‘왜’라고 묻더니, 마지막 화면에는 자막이 등장했다.

-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할지 지켜보겠습니다.

자막이 사라지고 광고가 나오자 진주네 집 TV 앞에 굳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숨을 쉬었다.

“휴우. 깜짝 놀랐네.”

“...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

영배와 진주가 말했고, 도훈은 쓰게 웃기만 했다.

녹화 후 최승범 기자와 통화하면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장면은 편집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아슬아슬한 가위질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아쉽네.”

도훈이 중얼거렸고 영배가 물었다.

“뭐가?”

“마지막에 잘린 게 핵심인데 말이지.”

“... 틀린 말은 아니네.”

도훈과 영배는 그렇게 웃어넘겼지만, 한 가지 모르는 게 있었다.

패널로 참여한 이들 중 일부는 도훈의 인터뷰 영상을 끝까지 봤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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