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더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장 - 3.
“항상 밖으로 나돌 수만은 없겠죠. 분명 사무실에서 처리할 일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여러분이 사무실에서 다루고 처리하는 일도 분명 현장에서 시작해서 고민됐을 것이고 그 결과가 현장에 나타날 겁니다. 안 그런가요?”
“맞습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동의하는 직원들과 차례로 눈을 맞춘 도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행정의 일선 현장을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면 안 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동의하시는 분도 동의하지 않는 분도 계시겠지만, 방금 제가 말한 부분에 공감하신다면 때때로 사무실을 벗어나 현장을 살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유념하겠습니다.”
팀장이 대표로 말하자 도훈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저는 할 말 다했습니다.”
“네. 그럼 혹시 누구 덧붙일 말 있나요? 없으면 회의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시주택과 도시계획팀 회의에 참석했던 도훈이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도훈이 사무실을 나서자 자리를 정리하던 직원들이 작게 속삭였다.
“요즘 시장님이 유독 ‘현장’ 얘기를 많이 하시는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 엊그제 안전총괄과 회의에서도 비슷한 얘기 하셨다던데.”
“거기뿐만 아니라 지난주 남가동 주민센터에서도 현장이 중요하다는 말 하셨다고 하던데요.”
시선을 마주한 직원들의 말이 이어졌다.
“각 팀 회의에 참여하시는 일도 다시 늘어났고 말이죠.”
“힘들고 어려운 거 없냐고 꼬박꼬박 묻고 가시기도 하고요.”
“듣자 하니, 외부에 나가면 시민들에게 전보다 더 공손하게 행동하신대요.”
“흠, 무슨 일이 있었나? 내 기억에 특별한 사건은 없었던 것 같은데.”
“뭐, 꼭 사건이 터져야 뭔가를 깨닫거나 하는 건 아니잖아요. 원래도 우리 시장님 예의 바르게 행동하시는 분이었고, 이래저래 직원들이나 시민들과 만나는 거 열심히 하시던 분이니까요.”
끄덕, 끄덕.
팀 막내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팀장이 자리를 정리하는 말을 했다.
“어쨌거나 윗사람이 의욕적으로 일하면 나쁜 일보다 좋은 일이 많은 법이야. 특히, 그 윗사람이 능력 있고 품성이 좋은 경우에는 더 그렇지.”
“맞는 말씀이네요.”
“자, 다들 일 하자고. 일을 열심히 하면 밥도 맛있는 법이니까. 곧 점심시간이잖아.”
“네, 팀장님.”
직원들이 서류를 챙겨 각자의 책상으로 흩어졌다.
어느덧 11월, 겨울이 한층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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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운계면 주민센터 가기로 했죠?”
“네. 간부회의 참석했다가 주민센터 현장 방문하고 돌아오는 게 일정이에요.”
“1월 1일 개소에는 문제가 없답니까?”
“네. 하도 깐깐하게 감리를 해서 완공을 당기기는 어렵지만, 예정된 날짜에 개소하는 건 꼭 지킨다고 시공사 측에서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비서실로 돌아온 도훈은 소파에 앉아 지연과 일정을 확인하고 있었다.
2년 차에 접어들며 조금은 여유가 생겼던 도훈의 일정은, 최근 다시 각 부서의 회의에 참여하고 외부 현장을 순회하는 것으로 빡빡하게 채워졌다.
도훈이 일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 계기는 영배에 의해 다른 비서실 직원들에게 알려졌다.
별것 아닌 일로 마음을 다잡은 시장의 모습에 원지연이나 홍영진도 호응했다.
그래서, 업무에 좀 더 익숙해진 2년 차의 시장은 비서실 직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더욱 정열적으로 일에 임하고 있었다.
“저 없을 때 연락 온 거 있나요?”
“아, 두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하나는 시의회 의장님이 내년 예산안 관련해서 잠깐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는 거였고, 하나는 ITS 방송국에서 왔었습니다.”
“의장님은 주민센터 갔다 와서 찾아뵈면 될 것 같고, ITS요?”
“네. 시간 되실 때 연락 주시라고 하더군요. 최승범 기잡니다.”
“그럼 방송국 문제 먼저 처리하면 되겠군요. 저 제 방에서 전화 좀 하겠습니다.”
도훈이 시장실로 들어가자 지연이 옆자리의 영배에게 물었다.
“방송국에서 시장님 제안 받아들였을까요?”
“글쎄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시장님 출연에 목메는 건 그쪽이니까요. 현장 출연은 안 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는 협조하겠다는데, 저라면 아쉽긴 해도 마다하진 않을 것 같네요.”
“그쵸? 정말 아쉬워요.”
“뭐가요? 생방송 패널로 안 나가시는 거요?”
“네. 시장님이 나가시면 정말 잘하실 것 같은데···.”
진정 아쉽다는 표정의 지연에게 두진이 피식 웃고는 말을 건넸다.
“원 주무관, 편집도 안 되는 생방송에 나갔다가 시장님 진짜 성격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진짜 성격이라뇨?”
“아직 원 주무관이 시장님을 다 겪어보질 않아서 그래. 거기 나가서 헛소리하는 상대를 마주하면 우리 시장님이 방송사고 안 칠 것 같나?”
“... 설마요.”
지연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며 직원들을 돌아봤다.
“진심으로 빡 치면 상대가 누가 됐든 할 소리 다 할 사람이야.”
“맞습니다.”
“그러고도 남죠.”
두진에 이어 영배, 영진이 맞장구를 치자 지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묘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한번 보고 싶네요.”
“하하. 참아, 이 친구야. 사고가 괜히 사곤 줄 알아?”
“헤헤.”
쑥스럽게 웃어버린 지연이 자리에 앉아 시장실 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는 걸 보면 그녀의 김도훈 ‘덕질’은 여전히 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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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요? 솔직히 퇴짜맞을 줄 알았는데···.”
- 하하. 저희가 먼저 제안한 거지만, 시장님이 흔쾌히 승낙할 거라는 예상은 솔직히 안 했습니다. 당연히 어느 정도 후퇴한 선에서 협의가 이뤄질 줄 알았죠.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제 예상보다는 쉬웠습니다. 저는 단번에 거절당하거나 아니면 마지막까지 밀당을 할 거로 생각했거든요.
ITS에서 도훈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현장 패널 출연 제안은 철회하되, 생방송 토론 중간중간에 주제에 따른 국민의 민심을 전하는 시간에 평가 발언을 하는 것으로.
단순한 ‘멘트 따기’ 이상인 것이, 도훈에게는 이러저러한 자료가 소개되는 것과 함께 2분 정도가 할애될 예정이란다.
“여야 양쪽을 세게 비판하게 될 텐데, 그건 괜찮습니까?”
- 당연하죠. 욕만 하지 않으신다면 상관없습니다. 전처럼 방송에서 할 말 못할 말 골라내려고 하는 정부가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됐습니다. 아, 참. 당일 토론 패널 구성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 최종 확정된 건 아닌데요. 여당 둘, 보수 야당 쪽 둘, 그 외 야당 둘 이렇게 갈 것 같습니다.
“임지희 의원님은 섭외됐나요?”
- 네. 임 의원님이 시장님이 당일에 출연 안 하신다는 것 듣고 많이 서운해하셨다고 하더군요.
“뭐, 어쩔 수 없죠. 제가 거기 나가는 건 시장 일 하는데 도움될 게 전혀 없으니까요.”
- 쩝.
도훈의 말에 아쉬운 소리를 낸 최승범은 곧 촬영 일정이나 내용 등을 상의할 작가가 연락할 거라는 얘기를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각자의 생각과 포지션이 있는 거니까.”
통화를 마친 도훈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아무리 도훈이나 영배가 ‘정치인 중에 그나마 많이 나은 사람’ 혹은 ‘훌륭한 정치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라지만, 그녀의 부탁이라고 무조건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
더군다나 요새 ‘시민’, ‘현장’이란 단어에 다시 집중하는 도훈에게는 토론에 나가 발언함으로써 대흥시 시정에 기대할 수 있는 플러스 효과가 그다지 없질 않은가.
“그래도 좀 미안하긴 하네.”
도훈이 중얼거리자 지켜보던 조상님이 입을 열었다.
- 네 말대로 각자의 인생은 각자가 사는 거다.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 말에 무조건 휘둘리면 안 되지. 신념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 맞는 말씀이죠.”
- 네가 존경까지는 몰라도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이해할 거야. 이해 못 하면 앞으로는 좋게 평가하지 마.
“... 하하, 네.”
도훈이 ‘평범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할 것을 고집하면서, 업무 시간에 조상님이 끼어드는 일은 점점 더 줄고 있었다.
업무 시간에는 도훈이 요청하지 않는 이상 일에 관해 말하지 않지만, 퇴근해 집에 돌아가면 이런저런 잔소리를 듣는 건 예전과 같았다.
상인들과 짧은 만남을 가졌던 날, 시민과 현장에 다시 치중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후손을 조상님은 아주 오래간만에 칭찬했다.
- 행정에 임하는 관리는 누구나 처음에는 시민을 위해, 현장에 근거해 일하겠다고 다짐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일을 경험하면서 그 목표가 참 멀다는 걸 깨닫게 돼. 정치나 행정이라는 건 부조리를 단숨에 뒤집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까마득히 먼 거리를 매일매일 꾸역꾸역 가야 하는 거에 가깝지. 목표가 멀면, 속도가 느려지기도 하고 방향을 잃고 똑바로 가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는 일도 생긴다. 그러다 끝내 엇나가는 경우도 많고. 계기가 뭐가 됐든, 자기가 현재 발 딛고 선 자리를 확인하거나 처음에 품은 목표를 되새기는 건 아주 중요하고도 당연한 일이야.
조상님이 온화하게 격려하던 말을 떠올린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머쓱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조상님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 그래서, 제대로 깔 생각이냐?
“당연하죠.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토론에 참여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니까요.”
- 뭐, 그건 그것대로 이런저런 소리 듣기 좋을 것 같다만.
“그것까지 신경 쓰지는 않으렵니다. 그리고 당일 유명한 분들이 여럿 나와서 싸울 테니, 그쪽에 더 관심이 집중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런 프로그램을 다른 방송에서도 할 것 같고요. 한소리 듣더라도 잠깐 그러다 말겠죠, 뭐.”
- 뭐, 알아서 해라. 방송이란 건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뭐라 해줄 말도 없다.
조상님이 물러났고 도훈은 비서실로 나가 웃으며 말했다.
“점심 먹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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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조금 늦은 시각, 대흥시 시의회 건물 의장 사무실.
“... 아, 그래요? 확정된 겁니까?”
“네. 원래는 패널로 출연해 달라고 했는데, 제가 그건 사양해서요.”
도훈의 말에 안준식이 놀라고 부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허허. 시장님 활동 영역이 점점 지역구에서 전국구로 넓어지는 느낌이네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긴, 요새 좀 더 바빠지셨다는 얘기가 들리긴 하더군요.”
“그렇죠, 뭐.”
“쩝. 좀 적당히 열심히 하세요. 저나 의원들이 눈치가 보입니다.”
“의장님도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시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괜한 엄살 아닙니까?”
“하하.”
안준식이 별다른 대꾸 없이 웃어넘기자 도훈도 소리 없이 웃었다.
이후, 두 사람은 안준식이 원했던 예산에 관한 부분을 이야기했다.
안준식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시의회 의원들의 의견을 수렴해 도훈에게 전달하는 그런 자리였다.
“소방서 관련해서는 의원님들이 별다른 말 없었습니까?”
“딴소리할 게 따로 있죠. 또 안전과 관련한 부분은 시장님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는 걸 의원들도 잘 압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요. 시장님 본인만 모르고 있지 다른 사람은 다 압니다.”
내년에 안전센터가 확장되어 ‘대흥 소방서’가 정식으로 설립된다.
땅이 녹자마자 공사에 들어가 상반기 내에 완공될 예정이었고, 국비와 도비 말고도 시 예산에 관련 비용이 반영되어 있었다.
“경찰서도 얼른 생겨야 할 텐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안전센터는 당장 내년에 정식으로 소방서로 확장되지만, 지구대는 아직 계획조차 없었다.
엄연히 행정구역상 ‘시’이지만, 대흥시는 아직 부족한 게 많았다.
금선면 군인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국방부에서 관리하는 마트를 제외하면 아직 대형마트가 없고, 들어설 계획도 없는 곳이 아닌가.
“갈 길이 멉니다.”
“물론이죠.”
안준식과 도훈이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는데, 안준식이 뭔가를 갑자기 생각해내고는 입에 올렸다.
“그러고 보니까 대전시 쪽에서 어떤 안건을 고민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는데요.”
“안건이요?”
“네. 대전과 인근 지자체가 협력해야 할 사항이라고···.”
“좀 자세하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니까···.”
안준식이 지인에게 들었다는 얘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차분했던 도훈의 얼굴이 점점 더 경직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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