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43화 (144/279)

143. 더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장 - 1.

“어이, 시장님. 쌀 수매가 좀 높여주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어르신도 아시잖습니까?”

“알지. 아는데 답답하니까 해보는 소리여.”

도훈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고, 노인 한 분이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작년에는 쌀값이 그래도 좀 높게 형성되더니 올해 다시 떨어졌다.

물량 부족으로 인해 쌀값이 올라간 걸 정부가 안정시키려고 하다가 농민들에게 비판도 많이 받았고, 어떤 몰지각한 인사들은 하도 북한에 쌀을 퍼줘서 쌀이 부족해졌다고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했었다.

“시 공공기관이 구내식당이나 자체 소비하는 쌀을 대부분 관내에서 구매하려고 노력하는 건 아시죠?”

“... 알지.”

“그리고 시 관내의 일반 식당들에도 그런 홍보를 하는 것도 아실 테고요.”

“... 그것도 알지.”

“저희도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르신들이 보시기에는 만족스럽지 않으시겠지만요.”

“... 흐음.”

“죄송합니다만, 여러 방안을 놓고 고민 중이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에휴.”

부족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까지 하는 시장에게 어르신의 요구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발언하실 분 또···. 아, 예. 저기, 마이크 좀 갖다 드리세요.”

공중파 연말특집 섭외 같은 것도 신경 써야 할 일이지만, 도훈은 언제나 그렇듯 시장 업무에 더 집중했다.

그래서 오늘도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나는 장날 외지 상인들 몰리는 것 좀 얘기하려고 하는데···.”

“말씀하세요, 어르신.”

도훈이 자리한 곳은 유서면 주민센터 강당.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장과 시민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올 4월부터 만들었다.

시청에서는 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참여를 독려할 뿐, 주제를 제한하지 않아서 참여한 시민은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좀 엉뚱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쌀값 문제처럼 시청이 해결할 수 없는 얘기가 나온 적도 있지만, 도훈은 물론 함께 참여한 시 공무원들은 시장 방침대로 묵묵히 듣고 성실히 답변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니까, 일찍 차를 가져다 대고 자리를 맡아놓는 외지 상인들 때문에 번번이 좋은 자리를 못 잡으신단 말씀이죠?”

“맞아요, 시장님. 아무리 우리가 대흥에 살지만, 아직 버스도 안 다니는 새벽에 자리 잡으러 나갈 수는 없잖아요.”

“잠시만요, 할머님.”

도훈은 하소연하던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배석했던 지역경제과 팀장 하나를 일으켜 세웠다.

“장날 우리 지역 시민에게 고정으로 배정된 자리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맞습니다, 시장님.”

“그럼 저 할머님이 말씀하시는 건 도대체 무슨 얘깁니까?”

도훈의 표정과 목소리가 달라졌다.

사근사근하고 따스한 것에서 담담하지만 서늘한 것으로.

당연히, 팀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답했다.

“저, 그게 미리 배정한 자리가 항상 모두 차는 게 아니어서요.”

“계속해 보세요.”

“여름에 너무 덥거나 날씨가 흐리거나 하면 배정된 자리가 안 차는 일이 연속으로 생기고, 그럼 현장에서 조정하기도 해서···.”

“... 현장 판단으로 자리를 줄였단 말입니까?”

“그, 그런 것 같습니다.”

도훈이 담담한 표정이나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더위나 악천후로 자리가 비더라도 조정하는 건 그때뿐이어야죠. 요즘엔 그럴 일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가을이라 시민들이 장날에 물건 내놓을 것도 많을 텐데 미리 반영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습니까?”

“다음 장날부터 즉각 조치하겠습니다.”

팀장이 쩔쩔매며 답했고 도훈이 말을 이었다.

“다음 장날에 현장에 이동 시장실 설치할 테니까 그것도 고려하세요.”

“네, 시장님.”

팀장과 대화를 마친 도훈이 기다리던 할머니에게 말했다.

“이렇게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어떠십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시장님.”

“천만에요, 어르신. 그리고 주민센터장님.”

“네, 시장님.”

도훈의 시선이 할머니에 이어 옆에 앉은 유서면 주민센터장을 향했다.

“혹시 이런 사정 들으신 적 있으십니까?”

“아뇨, 처음입니다. 들었으면 진즉에 말씀을 드렸겠죠.”

“그렇군요.”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참석한 주민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방금 들으셨죠? 꼭 제가 아니라 주민센터장님에게 말해도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주민센터에 꼭 찾아가실 필요도 없어요. 전화해서 사정을 잘 설명하시면 다 주민센터장님께 전해지니까요. 설사 주민센터장님의 판단만으로 해결이 안 될 문제라 해도 제게 전달이 됩니다. 그러니까 뭐가 됐든, 오늘처럼 제가 찾아오는 거 기다리지 마시고 주민센터에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그러라고 있는 게 주민센텁니다. 아시겠죠?”

“그럽시다!”

“알았어요.”

농촌 지역인 유서면인지라 참석자 대부분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어르신들의 답에 도훈이 활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또 말씀하실 분 계십니까? 네, 저 오른쪽에 손든 분께 마이크 전해주세요.”

도훈의 말에 영배가 얼른 무선 마이크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중앙정치, 여의도 정치가 어쨌든지 간에 시민을 상대하는 대흥시 시정은 오늘도 그렇게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

행사를 마치고 유서면 주민센터장 및 센터 직원들과 점심을 먹고 시청으로 돌아온 도훈.

“이제 좀 자리를 잡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시장님?”

“네. 이젠 권한 밖의 이야기 하시는 분이 많지 않잖습니까. 그것만 해도 어딥니까.”

“하하, 그러게요.”

시장과 시민이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정례적인 자리를 기획하고 열린 첫 번째 자리에서는 정말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왔었다.

오른다고 해서 사놓은 땅값이 안 오른다는 얘기에 주민센터에 스티커도 안 붙인 쓰레기 수거해 달라고 민원 냈다가 거절당한 얘기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시의원이 건방지다고 화를 내기도 했었다.

시장이 ‘아랫사람’을 잘 감독하지 못한다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어이없어할 정도의 말이었고 도훈이 시의원은 시장의 아랫사람이 아니라고 잘 설명했지만, 끝내 도훈은 그 어르신께 ‘잘 타이르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 간담회 때 나온 말은 퇴근 전까지 정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연관 부서에 연락해 피드백은 주중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네.”

지연의 말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비서실 일에 완전히 적응한 그녀의 일 처리는 정임 만큼이나 꼼꼼하고 깔끔했다.

실수가 거의 없고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

이 판단에는 도훈뿐만 아니라 두진, 영배, 영진 모두가 동의했고, 영배가 회식 때 우스갯소리로 ‘고정임 2’라고 얘기했다가 지연에게 항의를 들었다.

자기가 고정임 2가 아니라 고정임이 원지연 2라나?

“ITS에서 연락 왔나요?”

“아직요. 조만간 오겠죠.”

“궁금하네요. 그 얘길 받아들일지 말지.”

“저도 그렇습니다.”

지연의 말에 도훈이 맞장구를 쳤다.

도훈은 지연의 아이디어를 수용해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는 건 못하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의견을 밝히는 건 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최승범은 아쉬워했고 자기네 부장도 비슷한 반응이라는 얘기를 했지만, 도훈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거기에 낄 ‘급’이 아닌 것 같다고 이해를 구했다.

뭐, 패널 아닌 다른 방식의 의사 표현은 협조하겠다는 얘기를 했으니 그걸 수용할지 말지는 ITS에서 고민할 일.

“영상편지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진과 영배의 말에 지연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토론 프로그램이라고 다를 게 있겠냐며, 분명 국민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소개할 텐데 ‘영상편지’ 형식으로 하고 싶은 말 간략하게 하는 게 어떠냐는 게 지연의 생각.

거창하고 신통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그걸 선택함으로써 한해의 국회, 여의도 정치를 평가하는 거창한 일에 참여할지 말지 길게 고민할 필요가 없어 도훈은 만족스러웠다.

“그나저나 다음 장날에 이동 시장실 나가면 또 빡센 하루가 되겠습니다.”

“그럴 테죠.”

장날 운계면 사거리에 이동 시장실을 설치한 적은 전에도 있었다.

운계면 사거리 유동인구가 제일 많은 날이 장날이다 보니 나가면 전처럼 많은 시민을 상대하느라 무척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될 터.

“날씨 미리 살펴서 준비 잘합시다. 비라도 오면 더 힘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시장님.”

“네.”

“자, 다음은 뭡니까?”

오후 일정을 시작하는 도훈과 비서실 직원들.

그중 누구도 다음 장날에 맞이할 황당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장은 일찍부터 북적거리는 터라, 비서실을 지킬 원지연을 제외한 도훈과 비서실 직원들이 열린 시장실을 시작한 시간도 출근 시간보다 빨랐다.

천막 아래 긴 테이블 두 개가 놓인 열린 시장실은 장날 제일 좋은 자리 바로 옆, 그러니까 대흥 시민들에게 배정된 사거리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아직, 옆자리가 빈 상태로 도훈과 직원들이 천막 아래 자리를 잡고 앉기가 무섭게 찾아온 사람 셋.

“그러니까 빈자리에 왜 좌판을 열지 못하게 하냐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습니다.”

기분 나쁘다는 티를 팍팍 내는 세 사람은 오늘 장에 물건을 팔러 온 외부 상인.

상인이라도 다 똑같은 이들이 아니라 이곳저곳의 장날을 따라 움직이는 전문 ‘이동 상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곳이 우리 시 시민들 몫으로 항시 지정된 곳이라는 건 여러분도 아시잖습니까?”

“지금 비어있잖아요!”

셋 중 한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동 시장실 옆으로 좌판 두 개를 열 수 있는 공간이 아직 비어있었다.

듣고 있던 직원들이 얼굴을 굳혔지만, 도훈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잠시 후에 누군가 저 자리에 좌판을 열 수도 있습니다.”

“누가 언제 올 줄 알고 저 좋은 자리를 비워둡니까?”

“......”

전혀 공손하지 않은 불량스러운 말투였기에 도훈을 제외한 직원 전체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하루 장사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기나 하세요?”

“......”

“시장님이야 장날 하루 매상에 목숨 거는 사람이 아니니까 모르시겠지만, 우리 같은 장사치한테는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요.”

“......”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건, 상인들의 태도가 불량스럽긴 해도 그들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저 자리가 계속 비어있다면 외부 상인에게 내어드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안 됩니다.”

“... 그럼 언제 줄 건데요?”

“글쎄요. 한 10시나 11시? 그 시간 정도면 물건 팔러 나올 수 있는 분은 다 나오시겠죠.”

“젠장, 그렇게 늦게 장에 나오는 장사치가 어디 있다고.”

상인 하나가 확 인상 쓰며 투덜거렸지만, 도훈은 담담히 대꾸했다.

“여러분은 전문가이시지만, 저 자리는 전문가가 아닌 분들을 위해서 준비한 겁니다. 이건 제 독단이 아니고 우리 시 내부적으로 합의된 부분이고요. 잘 아실 텐데요?”

장날 목이 좋은 곳에 대흥시 상인이나 시민을 위한 자리를 배정하도록 한 건 벌써 몇 년이나 전에 시의회나 상인연합회와 논의해 결정된 일.

상인들이 모를 리가 없었지만, 항의하는 이들의 심정도 이해가 됐기에 도훈은 담담히 말하고 넘겼다.

“일단 알았어요. 그때도 비어있으면 넘겨주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그제야 상인 세 사람이 물러났다.

멀어지는 이들이 다 들리는 소리로 욕을 섞어 투덜거렸기에 시청 직원들이 날 선 눈빛으로 노려봤다.

직접 그들을 상대했던 도훈이 오히려 직원들을 다독였다.

“그러지 마세요. 저분들에게는 중요한 일일 수 있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태도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쩝.”

도훈이 아무것도 아닌 양 넘겼기에 더는 별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곧 열린 시장실로 시민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기에 계속 인상을 쓰고 있을 수도 없었고.

“커피 마셔도 돼요?”

“물론입니다.”

이동 시장실 한쪽에 온수기와 봉지 커피를 준비해 놓고 누구나 편하게 마실 수 있도록 했기에 찾아드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그렇게 들렀다가 도훈이나 다른 직원과 수더분한 대화를 나누는 건 이제 자연스러운 일상.

“아, 그래요? 혼 좀 났겠습니다.”

“어휴, 말도 마세요. 애 아빠가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린다고 길길이 날뛰는 걸 말리느라 혼났어요.”

“저런···.”

고등학생 아들이 담배를 피우다 아빠한테 들켰다는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건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

10시까지 비어있는 곳은 외지 상인들이 좌판을 벌이게 해도 좋다는 얘기는 진즉에 했었다.

“그놈의 담배가 하여튼 문제에요. 우리 남편도 재작년에야 간신히 끊었거든요.”

“아, 예.”

본인이 흡연자인지라 도훈이 뭐라 적극적으로 말을 못하고 듣고만 있던 순간.

삐이이익, 삐이익!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이동 시장실 뒤편 도로를 경찰관들이 달려 지나갔다.

“... 어머?”

“무슨 일 났나 봐.”

“그러게.”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도훈이 영배에게 눈짓하자 영배가 얼른 상황을 알아보러 나갔다가 곧 돌아왔다.

“무슨 일이랍니까?”

도훈의 말에 영배가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

“상인들이 자리 때문에 싸우고 있습니다.”

“자리요?”

“네. 이 옆 빈자리 말입니다.”

“......”

“온갖 쌍욕을 하며 싸우는데, 듣기가 참···.”

내내 담담하던 도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건 바로 그때.

때마침 도훈이 상대하던 시민이 없었기에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죠.”

천막을 빠져나온 도훈이 영배와 함께 큰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런 개···.”

“야, 이 씨···.”

듣기 민망한 온갖 욕설과 가까워질수록 도훈의 눈빛이 싸늘해지고 있었다.

# 14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