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간만의 서울 - 2.
최승범 기자가 방에 들어오고 5분 뒤
“... 벌써 준비를 하는 건가요?”
“좀 이르긴 하죠? 하지만, 방송사마다 그리고 부서마다 연말 특집기획은 다 하는 겁니다. 이건 사회부가 정치부와 함께 기획하는 프로그램이고요.”
“... 흠.”
“당장 답하실 필요 없습니다. 다만, 저희는 여야 사이에 중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이 시장님이라고 판단했고, 기획안을 접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건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제가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고 있는 건 잘 아실 텐데요?”
“네. 압니다. 하지만, 생각도 안 하시는 건 아닐 테지요.”
“......”
말없이 담담하게 바라보는 도훈에게 최승범이 씩 웃더니 말을 이었다.
“불필요한 논란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면 현명한 처신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사실 시장님께 관심 있는 웬만한 사람은 꼭 그런 정치적 발언이 없어도 시장님 성향 다 알거든요.”
“어떻게요?”
“시장님이 지금껏 시장으로서 해오신 일들을 보면 모를 수가 없죠.”
“... 음.”
행정이라고 해도 가치 중립적일 수만은 없다.
어떤 정책을 우선하느냐, 그 정책에 어떤 사람들이 혜택을 보느냐에 따라 당연히 누군가가 펼치는 행정의 목적을 구분할 수 있다.
도훈의 경우는 당연히 일반 서민의 보편적 복지 증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도훈이 언론을 상대로 정치적 발언을 안 하고 정가 사람들과 관계를 잘 안 만든다고 해도, 그나마 도훈과 친분이 있는 게 여당 혹은 진보 쪽이라는 것만 봐도 도훈의 성향은 이미 ‘확인’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조용한 도훈을 향해 최승범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말이라는 건 때와 장소에 따라 무게가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전 이번 기획에 시장님이 참여하신다면, 그 기획 프로그램이 시장님의 말의 무게로 중심을 잃지 않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건 방송국에만 좋은 거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시장님도 국민의 하나니까, 여의도 정치판에 하고 싶은 말씀이 분명 있으실 겁니다.”
“......”
“이 자리라면, 시장님의 말씀에도 충분한 무게가 실릴 테죠.”
“......”
“그래서 이렇게 섭외 요청을 드리는 거고요.”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당장 거절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는 건 솔직히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그러실 줄 압니다. 하지만, 좀 더 숙고해보시고 답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즉흥적인 제안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시장님이 적격이라고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생각해보겠습니다.”
“당장은 그거면 충분합니다.”
씩 웃은 최승범이 몸을 일으켰다.
5분만 말하고 돌아가겠다더니, 5분은 넘었으나 10분을 넘지는 않은 시점.
“들어가세요, 선배.”
“그래. 오늘 즐겁게 놀고 내일 정시에 출근해.”
“네.”
“또 뵙죠, 시장님. 아, 김 기자랑 시장님 관계는 우리 부장님이 책임지고 소문 안 나게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랍니다. 김 기자가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은요.”
“그 부분은 감사드리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최승범은 도연, 도훈과 인사한 뒤 영배에게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고, 도훈은 최승범이 놓고 간 기획서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할 거야?”
“좀 전에 내 말 못 들었냐? 생각해본다고 했잖아.”
“... 알았어.”
도훈이 살짝 퉁명스럽게 답하자, 도연이의 눈에 반짝거리던 기자의 호기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무리 예뻐‘만’하는 동생이라지만, 오빠에게까지 기자의 눈을 번뜩이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최승범이 가지고 온 출연 섭외란, ITS 방송국의 연말특집 토론회 출연 제안을 말한 것이었다.
2019년에도 국회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제1 야당은 여당과 정부의 발목을 건마다 잡고 늘어졌고, 여당은 그런 제1 야당을 제압도 못 하고 설득도 못 한 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이번 정부가 출범하면서 제시했던 목표, 사회 전반의 적폐를 청산하고 ‘개혁’이 지상과제라는 것에 국민 다수가 동의했지만, 그것도 성과가 있어야 국민이 계속 지지를 보낼 터.
하지만, 국회가 입법으로 받쳐주지 못하니 온갖 사회 현안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한두 발씩 늦을 수밖에.
당연히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50%에서 간당간당하는 수준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정치’가 제 기능을 못 하는 현실에서 내년에 총선이 벌어진다.
- 저물어가는 2019년, 다가오는 2020년. 무엇을 평가하고 무엇을 계획하며 다가오는 총선을 바라봐야 할 것인가?
이런 주제로 벌어지는 연말특집 토론 프로그램에 도훈이 패널로 참여할 것을 제안받은 터.
심야시간대이긴 해도 2시간이 배정된 데다가 여당 쪽 둘, 보수 야당 쪽 둘, 그 외 셋.
도훈은 ‘그 외’ 중 한 명으로 섭외된 것이었다.
도연이나 영배나 말은 안 해도 어떻게 할 생각인지 궁금한 모양이었지만, 엉뚱한 주제로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과의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는 도훈이었다.
불청객이 10분 정도 다녀갔지만, 훈훈한 저녁 식사 자리는 아무런 문제 없이 계속됐다.
“윗사람들이 갈구거나 하지는 않냐?”
“갈구기야 하지. 하지만 이유가 있지.”
“이유 없이 갈구지는 않는다는 거지?”
“요즘이 어떤 시댄데. 그리고 내가 그런 일을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할 것 같아?”
“... 하긴, 넌 김도훈 동생이지.”
“뭐야, 그 어이없는 납득은?”
“어이없긴 뭐가 없어. 나나 진주에게 그것보다 더한 이유는 없을 텐데.”
“와, 은근 기분 나쁘네.”
“칭찬이야, 칭찬.”
영배와 도연이 실없는 대화를 하는 것을 도훈은 잔잔히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어느 순간.
위이잉.
업무용 핸드폰의 액정을 확인한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전화를 받았다.
“김도훈입니다.”
- 아, 시장님. 저 신길영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말씀하세요.”
- 지금 서울에 계신 것 맞죠?
“네. 그렇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진보평화당 소속 대흥시 시의원 신길영.
- 어, 저도 갑자기 연락을 받아서···, 좀 당황스럽긴 한데요.
“뭔데 그러십니까?”
신길영이 우물쭈물했고,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리고 예상 못 한 답이 들려왔다.
- 저희 당 의원님 한 분이 시장님께 전화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라 갑자기 전화하면 무례가 될 수 있다고 제게 먼저 전화를 부탁하시더라고요.
“저한테요? 의원님이라니 누가요?”
- 임지희 의원님이요.
“... 진짜요?”
- 네.
놀란 도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임지희는 진보정당의 다선 의원이자 지난 대선 때 진보 후보로 출마했던 여성 의원.
대한민국 진보정당 역사의 한 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었다.
쉽게 말해, 같은 국회의원이지만 대흥시와 인근을 지역구로 한 김용진과는 ‘체급’이 완전히 다르달까.
“그분이 왜요?”
- 그 이유까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시장님이 마침 서울에 계신 걸 알고 잠깐이라도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는 하시더군요.
“... 저를요? 오늘 말입니까?”
- 네.
“......”
도훈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자신의 정치적 성향은 민의당보다는 진보정당에 가깝다.
아마 진평당 사람들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지만, 대흥시에서 활동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간 접점이 전혀 없었다.
민의당 소속 도지사와 국회의원이 꽤 자신에게 관심을 지속적으로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소속인 도훈을 분명 ‘영입’ 혹은 ‘연대’의 대상으로 생각했었을 법한데도 말이다.
그걸 의아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뭐가 그리 잘났다고 ‘자뻑’이냐고 스스로를 타박하고 말았었지만.
“전화하라고 하세요.”
- 아, 괜찮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들어는 봐야죠.”
- 감사합니다, 시장님.
신길영이 확 밝아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고 도연과 영배가 궁금한 표정을 했다.
“누군데 그래?”
“뭔데 그러냐?”
“아무것도 아니야. 밥 먹고 있어. 나 잠깐 전화통화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그냥 하지, 왜?”
“나가서 하고 올게.”
아무래도 도연이나 영배 앞에서 통화하는 게 부담스러워 도훈은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실외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희라고 합니다.
“... 네.”
담담한 목소리의 임지희와 통화하는 도훈의 마음이 콩닥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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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청객은 불청객이긴 한데··· 싫어할 수가 없네.’
통화하고 두 시간 가까이 지난 마포구의 어느 뒷골목 주점 안.
진평당 당사가 있는 여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훈은 홀로 앉아 있었다.
한 30분 정도면 된다고 해서 도연과 영배는 근처의 호프집에 따로 자리하고 있는 상황.
누구를 만나러 오는지 얘기해 주질 않아서 무척 궁금한 모양이긴 했지만, 도훈은 끝내 임지희를 만날 거라고 얘기하지 않고 이 자리에 나와 있었다.
‘... 아무리 동생이라도 방송국 기자와 함께 만날 수는 없지.’
공개된 장소니 비밀 만남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기자의 눈은 피하고 싶을 터.
상대도 혼자 나오겠다고 했으니 도훈도 혼자 왔다.
‘... 시간이 다 됐는데···.’
어묵탕과 꼬치, 소주를 시켜놓고 앉은 도훈은 멀쩡한 정신으로 상대를 만나기 위해 침만 삼키고 있었다.
사실, 그답지 않게 조금 긴장해 여러 번 물로 입을 축이는 중이었다.
드르륵.
“어서 오세요. 아, 의원님.”
“오래간만이에요, 사장님.”
안으로 들어선 수더분한 인상의 여성이 주점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요즘 바쁘셨나 봐요?”
“아닌 게 아니라 좀 그랬어요.”
웃으며 대화하는 임지희와 주인은 제법 친분이 깊어 보였다.
인사를 마친 임지희의 시선이 곧 도훈을 발견했고 도훈이 반사적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임지희가 빠르게 다가와 도훈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럽게 연락했는데, 시간 내줘서 정말 고마워요, 시장님.”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 서울에서 자고 내려갈 계획이었거든요.”
“아, 그럼 혹시 다른 일행이 있어요?”
“네, 동생이랑 친구가 인근에 있습니다.”
“이런,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잠깐인데요.”
진심으로 미안한 표정을 한 그녀가 곧 도훈과 마주 앉았다.
“술집에서 만났으니 건배는 해야겠죠?”
“물론입니다.”
챙.
소주잔을 채운 두 사람이 건배하고는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임지희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도훈은 전혀 예상도 못 한 용건을.
“... 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하하, 정치 오래 하다 보니까 나도 웬만한 기자들하곤 잘 알아요. 그래서 진즉에 얘길 들었고요.”
“......”
임지희의 용건은 ‘영입’도 ‘연대’도 아닌, 방송출연과 관련한 것.
그것도 도훈이 불과 두 시간 전에 제안서를 받았던 ITS의 연말특집 토론 프로그램과 관련한 것이었다.
“어떻게 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죠?”
“... 네. 일단 부정적입니다.”
“그래요?”
“네. 저 같은 사람이 끼어들기에는 판이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최승범은 토론 프로그램 섭외 대상이 여가 됐든 야가 됐든, 중진급 이상의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도훈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커리어를 가진 이들일 터.
아무리 그런 자리의 무게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왠지 거기 앉아서 쓴소리하는 자신이 상상이 잘 안 되는 게 사실.
문전박대를 할 수 없어서 최승범에게는 생각해보겠다고 했지만, 굳이 긴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프로, 기획대로라면 각 당에서 재선 이상의 말 잘하는 현역들이 대거 나올 거에요.”
“... 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해지네요.”
“아마 나도 거기에 나갈지 모르고요.”
“아, 네.”
임지희야 그럴 수 있겠고 자신은 더 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도훈이 하던 순간.
자세를 바로 한 임지희가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난 김도훈 시장님이 출연해 주셨으면 해요.”
“... 네?”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되묻는 도훈에게 임지희가 반복했다.
“출연하는 게 어떠냐고요.”
“......”
깜빡, 깜빡.
말문을 잃은 도훈이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도훈을 향해 임지희가 잔잔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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