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39화 (140/279)
  • 139. 오버 액션 - 3.

    “정말요?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네. 정말 그렇게 말했습니다.”

    “와, 도훈 씨.”

    “... 왜요?”

    “돌직구 스타일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돌직구인 건 몰랐어요.”

    “하하.”

    정말 놀랐다는 표정의 세경에게 도훈이 머쓱하게 웃었다.

    토요일 점심, 대전의 한 서민적 분위기의 칼국수 집.

    그곳 구석진 자리에 앉아 3주 만에 데이트를 하는 도훈과 세경이었다.

    “그 변호사라는 사람의 반응은 어땠어요?”

    “궁금해요?”

    “무진장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이미는 세경을 향해 도훈이 수더분하게 웃었다.

    매주 데이트는 힘들더라도 격주에 한 번은 잠깐이라도 얼굴 마주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야 ‘진전’이라는 게 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도훈도 도훈이지만, 세경 역시 2주에 한 번 꼬박꼬박 주말에 데이트를 할 정도로 규칙적으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업무가 밀리는 시기에는 2주가 아니라 한 달에 한 번 보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처지.

    대신에 전화통화나 두 사람만의 ‘톡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어, 분명 ‘진전’은 있었다.

    ‘민 과장’, ‘김 시장’하던 두 사람이 ‘도훈 씨’, ‘세경 씨’라고 서로를 부르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아이, 반응이 어땠냐니까요?”

    눈을 반짝이며 답을 재촉하는 세경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던 도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엔 멍하더니, 곧 눈빛이 표독하게 변하더라고요.”

    “그럴 만도 하죠. 친하게 지내자는데 오버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얼굴이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또 금방 차분해지더군요. 역시 변호사라서 그런지 표정관리를 잘하더라고요.”

    “에이, 그건 좀 아니에요. 표정관리를 잘한다는 얘기를 들으려면 애초에 화났다는 티를 내지 말았어야죠.”

    “하하.”

    마치 품평하듯 이야기하는 세경의 모습에 도훈이 웃음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자기가 술을 좀 해서 실수한 것 같다면서 사과하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흐음?”

    “진짭니다.”

    “... 결말이 시시한데요?”

    “시시해도 어쩔 수 없죠. 그게 사실인데.”

    도훈과 세경은 자주 만나지 못하다 보니 만날 때마다 수다를 떨었다.

    도훈이 평균 3주 간격으로 하는 데이트 때마다 자기가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하고 놀랄 정도였다.

    데이트 때마다 나누는 수다의 주제는 정해진 게 없었지만, 두 사람이 한 가지 약속한 게 있기는 했다.

    수다는 수다로 끝내고 ‘웬만하면’ 가족에게도 말을 옮기지 않기로 말이다.

    그래서 어제 김형일과의 만남을 아무런 부담 없이 세경에게 이야기하는 도훈이었다.

    “그나저나 그 변호사가 꽤 마음에 안 들었나 봐요?”

    “... 조금요.”

    테이블 위에서 보글보글 잘 끓고 있는 칼국수를 뒤적이며 도훈이 말을 이었다.

    “나이가 저보다 10살 넘게 많은 양반이 갑자기 저한테 친하게 지내자고 하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건데, 그 목적이 뭐가 됐든 저를 너무 쉽게 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긴, 친하게 지내서 득을 볼 생각이라면, 친하게 지내자고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친근하게 굴어서 정말 친해지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보통이죠.”

    “그러니까요. 아마, 거래라는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마도 김형일이 그런 얘기를 꺼낸 건 도훈을 쉽게 봐서가 아니라, 거래가 통할 상대라 여겼기 때문일 터였다.

    도훈이 원칙주의자라는 소문이 나긴 했지만, 김형일이 도훈이 융통성을 보일 줄 안다고 여긴 건 아들의 일 때문이었다.

    ‘바꿔치기’ 시도가 들통이 났을 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원칙주의자라면 그 시도 자체를 문제시해야 했을 텐데, 도훈은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으니까.

    현직 시장이라는 직함을 제외하면, 도훈은 가진 게 없다고 해도 좋았다.

    대신에 김형일은 현직 정치인이 아니라는 걸 제외하면 웬만한 건 다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돈이면 돈, 오랜 법조계 생활에 근거한 영향력이면 영향력, 거기에 현직이 아닐 뿐이지 대전 지역의 유력한 신인이라는 대중적 인지도까지.

    “도훈 씨가 그런 거래를 무척 싫어한다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게 패착이네요.”

    “뭐, 패착이라고까지 할 건 없죠. 저랑 친해지지 못한다고 그 사람이 딱히 손해 볼 일이 없잖아요.”

    “글쎄요. 그건 모르죠.”

    “모르긴 뭘 몰라요. 저랑 김 변호사를 생각했을 때, 서로에게 유감을 품는다면 손해 볼 가능성은 제가 큰 게 확실하죠.”

    “흐음.”

    세경은 도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세경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혹시 앙심 품고 나쁜 짓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습니까? 제가 뭐 도리에 어긋나는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모르죠. 그런 사람들 의외로 집요하니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하게 저와 그 사람이 서로 접점이 없잖습니까.”

    “... 글쎄요.”

    세경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자 도훈이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손까지 휘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랑 엮일 일 안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저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못 믿어요?”

    “도훈 씨야 믿죠. 하지만···.”

    “그럼 이제 밥이나 먹자고요. 다 익었어요.”

    “... 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주제를 더 이어가고 싶지 않았던 도훈이 세경에게 칼국수를 떠줬다.

    “후우! 국물이 정말 시원하네.”

    “정말 그렇네요. 오늘도 잘 골랐어요.”

    “하하. 물론이죠!”

    칼국수 집을 고른 도훈이 세경의 칭찬에 해맑게 웃고는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그런 도훈을 빤히 바라보며 세경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도훈 씨가 현직 시장이고 지역 여당 유력인사들과 가까우니까 당장 어쩌지는 못할 거야. 아마 그 변호사라는 사람도 그걸 노리고 친분 운운한 거겠지.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 과연 세 번째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세경은 김형일을 모르고 만나본 적도 없지만, 도훈을 나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접근방식이 좀 잘못되었다지만, 목적을 갖고 친하게 지내자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모두에게 대놓고 ‘오버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는 건 도훈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일례로, 강정문 도지사만 해도 좀 방식은 달랐어도 일방적인 관심에서 시작해 도훈과 꽤 친해지지 않았는가.

    여당에 영입하려는 ‘목적’을 갖고 접근했던 바로 그 강정문과 말이다.

    다시 말해, 도훈이 그렇게 대놓고 거절했다는 건 김형일을 어떤 식으로든 가까이하지 않을 사람으로 판단했다는 얘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세경은 여러 면에서 도훈을 인정했고, 사람을 평가하는 눈도 그중의 하나였다.

    “쩝쩝. 세경 씨, 안 먹어요?”

    “먹어야죠.”

    칼국수에 집중한 도훈의 모습은 일에 열중할 때의 진지함과는 많이 차이가 났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가며 순수하게 맛에 감탄하는 게 마치 애와 같달까?

    하지만, 그 모습 역시 콩깍지가 쓰인 세경에게는 매력의 하나일 뿐.

    ‘내 남자를 믿지만, 때로는 비상한 방법이 필요할 수도 있지.’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세경이 속으로 일순 단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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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 특별한 게 없군.”

    “네. 지난번에도 조사했었지만, 그다지 흠이 될만한 게 없습니다. 시장이 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니까요.”

    “... 그랬지.”

    조금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형일.

    법무법인 공영의 널찍한 대표 사무실, 아주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은 그는 심복이나 다름없는 부하 변호사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뭐, 당장 뭔가 해야 하는 게 아니긴 한데···.”

    김형일의 말에 보고하던 변호사가 살짝 얼굴을 폈다.

    혹시나 만족하지 못한 그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는 김형일이지만, 그가 ‘꽂힌’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완벽을 추구하는 걸 모르는 직원이 없었으니까.

    특히, 지금의 보고가 어떤 인물에 대한 두 번째 주변 조사 결과인 것을 보면 꽂혀도 제대로 꽂혔다고 할 수 있었다.

    “여동생이 ITS 방송국 기자일 확률이 높다? 확인은 끝내 못한 건가?”

    “본인들은 물론 주변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군요.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노출될 위험이 있고···.”

    “아아, 알았네. 나가 보게.”

    심복을 내보낸 김형일은 서류와 자료 일체를 금고에 보관했다.

    금고 안에는 방금 넣은 서류 말고도 여러 개의 서류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언젠가, 비장의 카드로 쓰일 날을 기다리는 그런 용도로.

    다만, 방금 집어넣은 도훈에 관한 자료는 비장의 기회를 노렸다기보다는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친하게 지내는 게 어떠냐는 자신의 말에 도훈이 ‘오버’를 언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말 친하게 지내자는 게 목적이었다면, 분명 다른 식으로 목적을 이루었을 터.

    김형일은 그런 얘기를 꺼냈을 때 도훈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었다.

    김형일에게 그 제안은, ‘너는 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던 것.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답으로 도훈을 판단할 수 있을 거로 자신했다.

    그가 지금껏 겪어온 수많은 사람이 그러했듯이.

    물론, 결론은 나왔다.

    그리고 그 결론 덕분에 김형일은 도훈에 대한 두 번째 주변 조사를 지시했고.

    ‘상종하지 않는 게 최선이고, 혹시나 엮이게 되면 완전히 밟아버리는 게 좋은··· 그런 유형이라는 게 문제지.’

    변호사가 되고 자신의 로펌을 갖게 된 이후, 그런 유형의 인물을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희귀하게 그런 인물과 엮였을 때도 굳이 밟는 것보다 피하는 걸 택했던 게 대부분.

    그들은 대부분 김형일보다 돈이든 권력에서든 더 많은 걸 가진 강자들이었으니까.

    다만, 이번 상대인 도훈은 김형일이 회피를 선택했던 이들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게 달랐다.

    당장에, 시장이라는 직함만 떼면 굳이 김형일이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는 ‘하찮은’ 일반인일 뿐이니까.

    ‘... 쓰든 쓰지 않든,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두 번의 조사에서 신통한 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도훈의 임기는 3년 가까이 남았고 더 이어질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야 크지 않다지만, 도지사와 지역 국회의원이 꾸준히 관심을 보내는 걸 보면 여당 소속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아무리 개인이 깨끗하고 정의롭길 원한다고 해도, 정치판이라는 곳은 그런 개인‘들’을 단번에 혹은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곳.

    그런 도훈의 변화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형일은 꾸준히 도훈에 대한 자료조사를 의뢰할 생각이었다.

    개인적인 유감을 언젠가는 풀어버리기 위해서, 혹은 유력한 카드로 성장하면 그때 가서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자만이 성공할 수 있지.”

    김형일이 자신의 좌우명을 중얼거렸다.

    성공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은 김형일의 오랜 습관.

    설사, 그 준비가 당장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을 대비한 든든한 보험과도 같은 것이니 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시작이 늦었지만, 꽃은 피워봐야지.”

    정치인으로서의 도전이 좀 늦었던 만큼, 그 정치인으로 꼭 성공하겠다는 강한 욕구가 그의 혼잣말에 여실히 묻어났다.

    그는 스스로 폭탄을 키우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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