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38화 (139/279)

138. 오버 액션 - 2.

“아이고, 변호사님은 어쩜 그리 어려운 법률 용어를 쉽게 풀어서 하신답니까?”

“하하, 저도 법정에서나 다른 법률가들과 대화할 때는 법률 용어 많이 씁니다.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일상적인 표현을 택했을 뿐이고요.”

“그것도 능력이지요. 어떤 분들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시던데요.”

“칭찬 감사합니다.”

“한 잔 받으세요. 오늘 강연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초로의 노동자에게서 정중히 술을 받는 말쑥한 사내.

대전에서 가장 성공한 변호사, 대한민국 전체를 놓고 봐도 자수성가했다고 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능력 있는 변호사.

귀향한 뒤, 사회의 불공정과 인권 문제에 뒤늦게 눈을 뜨고 관심을 가져 대중적 인지도까지 쌓아가는 사람.

그의 이름은 김형일이라고 했다.

“그나저나 술이 입맛에 맞으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다 평범한 것들뿐인데···.”

“그 무슨 말씀을요. 이런 게 정말 맛있는 것들이죠.”

“변호사님은 비싼 술에 좋은 안주 드시지 않으십니까?”

“에이, 그게 다 허울만 좋은 겉치렙니다. 제가 그런 자리 안 가본 건 아닙니다만, 즐기지는 않습니다. 마음 편한 게 최고죠.”

“하하, 역시 남다르시네요.”

“저도 예전 어떤 대통령 말처럼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하하하!”

노동자들의 말에 수더분하게 웃는 김형일.

강연을 마친 뒤풀이 자리에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김형일은 성공한 변호사였다.

사법연수원 졸업성적이 상위 5% 안에 들었을 정도로 좋았지만, 검사나 판사가 아닌 변호사를 선택해 국내 2위의 법무법인에 들어갔다.

법무법인의 지원으로 미국으로 2년간 유학을 다녀왔고, 국내 복귀 후 7년간 법무법인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그가 국내 1위 로펌을 바짝 뒤쫓는 2위 로펌의 에이스 자리를 포기하고 개업한 것은,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야망 때문.

동료 하나와 함께 ‘공영’이라는 이름의 법무법인을 세우고 미리부터 준비했던 일을 벌여나갔다.

기업의 인수합병 작업, 국가의 비효율적 행정으로 인한 기업의 손실 보상, 기업 간의 특허 분쟁 등.

크게 품위나 명성에 손상이 가지 않으면서 돈이 되는 분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나름 성공했다.

그런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야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김형일이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온 이유는, 함께 공영을 운영하던 동료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져 사망한 뒤 분과 초를 다투며 살아가는 성공한 변호사 생활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법조계에서의 성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키우기 위해 귀향을 선택한 것이었다.

대전으로 공영 본사를 이전하고 서울 사무소를 지사로 만든 김형일은 정치인이 되기 위한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정치계 유력인사와 친분을 다지며 여권의 일반적인 정치 성향을 자신의 오랜 신념인 것처럼 은근히 알려 나갔고, 큰 힘은 없어도 시민 사회에 영향력 있는 단체 활동을 조력하는 등으로.

정치인이 되는 계획의 1차 관문은 2020년 총선에 지역구 혹은 전국구 의원으로 공천을 받는 것이었고, 그 계획은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엇나간 아들놈이 미친 짓을 벌이기 전까지는, 아니 그런 것도 자식이라고 외면하지 못하고 보호하려다 들통이 나기 전까지는.

“... 저기, 변호사님. OO 시 일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글쎄요. 그게 참,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정부 방침이 있긴 하지만, 그게 필히 시행해야 한다는 강제성이 있는 게 아니라 각급 지자체가 자율적으로 시행하라는 것이어서 말이죠.”

“노동부 조사도 있었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게 압력 수단이지, 강제 수단까지는 못됩니다. 지방자치제도를 엄연히 시행 중이고 현 정부는 지자체의 자율성과 권한 강화를 약속했었잖아요. 그런데 자율 규정을 위반했다고 어떤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흠.”

“노동자분들 사정이야 무척 딱합니다만, 소송도 당장 어떤 강제적 해결을 기대하고 하는 게 아니거든요.”

미간을 찌푸린 채 말하는 김형일의 모습은 영락없이 자신이 대리하는 해고 노동자들을 걱정하는 듯했다.

“변호사님이 잘 좀 도와주세요.”

“물론이죠. 애초에 그러려고 맡은 일인데요.”

진지하게 답하는 김형일의 모습에 마주 앉은 초로의 시의원 신길영이 웃으며 되물었다.

“하하. 소문처럼 당내 반발이 심상치 않은 모양이네요.”

“그렇죠, 뭐.”

조진구 시장이 내부적으로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안 하겠다 결정한 것도 모자라, 들통이 난 뒤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으며 정부 방침을 거스르고 나선 일에 대해 OO 시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민의당 당원들이 심상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조 시장과 함께 과거 보수 지역정당에서 활동하다 민의당에 합류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징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강경한 사람들은 그를 ‘출당’ 시켜야 한다고 말하며 도지사 강정문과 지역구 국회의원 김용진을 압박하는 상황이니 더 말해 뭐하겠는가.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에는 좀 뭐하네요, 하하.”

“이해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이력을 가졌다지만, 아직 김형일은 여당 내 유력 정치 신인일 뿐이었다.

오늘의 뒤풀이 자리에 민의당 사람이라고는 저만치 떨어져 노동자들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의회 의장과 그 동료 두엇뿐이었지만 자신이 어디서나 입조심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그는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이 사건을 맡은 게 충남권의 젊은 당원들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런 일은 앞장서서 발언하기보다는 묵묵히 약자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보이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도 했고.

“OO 시 직원들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시장 복이 있어요.”

“그래. 맞는 말이야. 전임 시장이 성격이 좀 개떡 같긴 했지만, 그래도 막판에 우리 정규직 전환 계획을 만들었잖아.”

“그 양반이 선거에 떨어지고 지금 시장님이 시장 된 것도 복이죠. 지금 시장님이 전임 시장이 만든 계획, 여유 있다고 후딱 해치워 버렸잖아요.”

“그것뿐인가? 시장님처럼 우리 챙겨주시는 양반이 또 어디에 있어? 우리 마누라도 시장님처럼은 날 안 챙겨주는데.”

“하하, 그 얘기 형수님한테 해도 돼요?”

“예끼, 이 친구야. 누구 쫓겨나는 꼴 보고 싶어?”

“하하하!”

같은 테이블에 자리한 노동자들의 대화에 김형일은 담담히 웃기만 했다.

계약 연장 거부라는 형태로 해고된 OO 시 비정규직 직원에 비하면, 대흥시 무기계약직 직원의 환경은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척 좋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의 무기계약직 전환이 완료되었을뿐더러, 시장이 그들의 처우에 대해 계속 신경을 쓰고 정기적으로 직접 만나 대화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당연하게도,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시장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인 것 일색.

“아마, 조금 이따가 또 얼굴 비치러 오실 걸요?”

“아마가 뭔가? 분명히 올 거야. 시장님이 정직원들 회식은 걸러도 우리 회식할 때는 안 빠지시잖아.”

“그렇죠. 일정 때문에 못 오시면 대신 비서실 사람이라도 보내서 격려금 주시고 가시니까요.”

“하하, 자기 업무추진비나 다른 공금은 그렇게 깐깐하고 칼같이 쓰는 양반이 우리 챙겨주시는 건 참···.”

직원의 말처럼, 도훈은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회식에 빠지지 않고 격려금을 보냈다.

소소한 몇 사람의 술자리는 못 챙겨도 부서 혹은 노조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잡은 회식이라면 취임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빠트린 적이 없었다.

그 금액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런 지속적인 관심은 누구나 보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당연히 무기계약직 직원들의 평가가 좋을 수밖에.

“사람만 좋은 게 아니잖아. 전국 어디에 내놔도 우리 시장처럼 일 열심히 잘하는 양반 거의 없을걸?”

“그럼요. 괜히 유명하신 게 아니죠.”

“맞아. 다 이유가 있으니까 방송이나 신문에서 자주 다루는 거지.”

김형일은 그런 직원들의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대놓고 티를 낼 정도로 어설픈 사람이 아니었다.

“시장님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네요.”

“물론이죠. 나이는 젊지만, 아주 속 깊은 사람이에요.”

김형일의 말에 노조 지부장이 입을 열었고, 김형일과 마주 앉은 시의원 신길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저도 오래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시장으로써나 개인으로써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호? 아주 높이 평가하시네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하하. 다른 걸 다 떠나서 믿을 수 있다고 여겨지거든요.”

“믿을 수 있다?”

김형일의 반문에 신길영이 웃으며 답했다.

“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애초에 하지 않고, 약속한 건 어떻게든 지키려고 하는··· 언행일치가 되는 그런 사람이에요. 아, 이건 저 혼자만의 평가가 아닙니다.”

“흐음···.”

“그리고 상대가 누가 됐든지 간에, 그 태도가 변하지 않는 것도 있고요.”

“......”

김형일이 담담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가 오늘 강연 강사를 수락한 건, 도훈에 대한 강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년 총선을 노리고 민심을 닦는 작업을 하고 있다지만, 대전 시내도 아닌 위성도시 무기계약직 공무원 노조 강연에 응하는 건 ‘시간 낭비’에 가까울 터.

그 시의 시장이 여당 소속 도지사에, 역시 여당 소속인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큰 호의를 보이는 인물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철없는 아들 녀석이 하필 그런 인물과 엮이지 않았더라면, 그런 인물에게 바꿔치기 시도가 들통나지 않았더라면, 김형일은 이렇게 서민적인 사람인 척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까.

‘... 지역뿐만 아니라 중앙당의 일부 유력인사들도 관심이 있다고 했지. 나하고도 엮인 게 있고···.’

뿌득.

개인사를 떠올린 김형일이 조용히 이를 악무는 순간, 음식점 문이 열리더니 직원들이 예상한 것처럼 문제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장님!”

“아이고, 오셨습니까!”

입구 가까운 곳에 앉은 이들의 환대에 식당에 들어선 도훈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염치 불구하고 한잔 얻어먹으러 왔습니다.”

“하하하! 시장님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환대를 받으며 웃고 있는 도훈에게 시선을 고정한 김형일의 눈에 다시 묘한 빛이 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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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쯤 뒤, 뒤풀이 장소에서 좀 떨어진 어느 카페 구석진 자리.

“그때는 직접 만나 사과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야 해서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해합니다. 그래도 대리인을 통해 필요한 건 다 전달받았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감사합니다.”

도훈은 마주 앉은 김형일에게 무덤덤한 표정을 보이고 있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나에게 분명 감정이 있는 것 같았는데···.’

아주 사교적인 미소를 띤 저 얼굴에 불과 몇 시간 전, 묘하게도 비릿하게 느껴지는 미소가 걸렸던 걸 도훈은 잊지 않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뭡니까, 변호사님?”

이 자리는 김형일이 요청해 만들어졌다.

술도 깰 겸 커피 한 잔 같이 하겠냐는 그런 요청.

분명, 용건은 커피가 아닐 테지만 도훈에게는 김형일의 의도가 아직 잡히질 않았다.

“그냥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함이라면 어떻습니까?”

“개인적인 친분이요?”

“네.”

도훈은 어이없는 표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김형일은 곧 쉰을 바라보는 나이, 다시 말해 도훈과 열 살 이상 차이가 난다.

게다가 아무리 도훈이 현직 시장이라지만, 시장이라는 직함을 떼놓고 보면 로펌 대표변호사인 김형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의 커리어를 가졌다.

당연히, 김형일은 김도훈 ‘개인’이 아닌 ‘시장’이라는 직위에 주목한 것일 터.

하지만, 지금까지 들었던 것대로라면, 대흥시장 김도훈과 친분을 갖는 게 정치인을 지망하는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나랑 친하다고 해서 이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게 뭐지?’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기보다는 우연히 다가왔다가 냅다 찔러본다는 느낌.

한참 말없이 김형일을 바라보던 도훈은 뭔가를 떠올리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지금 좀 오버하시는 것 같습니다, 변호사님.”

“... 오버요?”

“네, 오버요.”

“......”

담담하지만, 또박또박 답하는 도훈의 눈앞에서 김형일의 사교적 미소에 균열이 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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