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오버 액션 - 1.
-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방침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핑계로 정규직 전환을 하지 않기로 내부 방침을 정한 OO 시 소식 기억하십니까? 고용노동부에서 감사를 벌였고, 계약이 연장되지 않은 형식으로 실질적으로는 해고된 거나 다름없는 노동자들이 OO 시의 현 조민구 시장을 비판하는 얘기를 전해드렸었는데요. 결국, 노동자들이 시장을 고소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점입가경이네.”
“그러게.”
어느덧 9월 초.
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은 건 태풍이 얄밉게도 한반도만 살짝살짝 비켜 가던 작년과는 다르다는 것.
오늘도 북상하는 태풍의 영향으로 하늘이 흐린 가운데, 도훈과 영배, 두진이 시장실에서 주말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비상연락망 점검은 끝났죠, 실장님?”
TV에서 시선을 돌린 도훈이 묻자 두진이 답했다.
“어제 원지연 주무관이 일일이 다 확인했네. 완벽해.”
“그거라도 완벽해야죠.”
“흠, 지난번 같은 일은 없을 거야.”
“부디 그래야죠.”
두진이 미간을 찌푸리고 대꾸하는 건 보름쯤 전 지나간 태풍 때의 일 때문이었다.
보름 전, 태풍이 지나가며 전국적으로 비가 많이 내렸고 대전, 충남 일대에도 무척 많은 비가 내렸었다.
대흥시도 그로 인해 농지 일부가 침수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물을 빼려고 시에서 보관했던 펌프를 동원했는데 현장에서 일부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때마침 도훈이 현장에 있다가 그런 광경을 보고 오래간만에 화를 냈다.
여름을 준비하며 시의 재난대비 상황을 점검했을 때, 그중에 분명 긴급복구용 장비 일체의 점검이 있었고 이상 없다는 보고를 받았었으니까.
나중에 확인해보니, 담당자가 건성으로 슬쩍 살피고 이상 없다고 보고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훈은 담당자와 팀장을 문책하고는 전 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 아무리 가벼운 일이라도, 업무에 소홀한 직원은 ‘세금도둑’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싸다. 징계위원회에서 더 엄중한 징계를 결정하지 않은 게 유감이다.
도훈은 중징계를 원했는데, 징계위원회에서 너무 가혹하다며 경징계인 ‘감봉’ 판정을 권고했다.
도훈은 위원회의 권고를 무시하지 않고 감봉 처분을 내렸지만, 더 엄히 징계하는 걸 원한 자신의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제법 시장에게 익숙해졌다고 여긴 직원들이 정신을 번쩍 차린 건 당연지사.
일부 직원이 해이하거나 흐트러진 언행을 보인다는 얘기가 싹 사라졌고, 시청 청사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라?”
영배가 이상한 소리를 냈기에 도훈이 고개를 돌리니 TV에 여전히 옆 동네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왜?”
“저 변호사, 기억 안 나?”
인근 OO 시 시장을 고소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리인이라는 남자.
“모르겠는데?”
“... 너 차 바꿔준 그 사람이잖아.”
“그래?”
대전에서 제일 큰 법무법인 ‘공영’의 대표변호사이자 정치인의 꿈을 키운다는 인물.
그의 아들이 엄마 차를 몰래 타고 나와 술까지 마시고 운전하다 주차된 도훈의 차를 들이받고 도망쳤었다.
도훈은 가까스로 달려드는 차를 피했지만,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고 낡았으나 정든 구형 SUV는 폐차 신세.
사고를 낸 학생의 아버지인 변호사는 무면허 음주운전을 한 아들 대신 아들 친구가 운전했던 것으로 일을 꾸몄다가 들통이 났었다.
발각되자 바로 포기하고 수습에 나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거나 하지 않았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
덕분에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그의 야심 찬 계획에 상당히 큰 균열이 갔다고 들었다.
“... 저 사람 이름이···?”
“김형일일 걸세.”
두진이 끼어들어 이름을 말해줬다.
“단순한 변호사 업무의 일환은 아닌 것 같은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부 지침을 어긴 게 드러났음에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여당 소속 시장.
그리고 그런 시장을 고소한 해고 노동자들을 대리하게 된 여당 공천을 노리는 변호사.
“정치 행보 재개인가?”
“아마도요? 그런데 어떤 목적인지 잘 감이 안 잡히네요.”
“그러게.”
TV에 시선을 두고 한마디씩 한 세 사람.
“뭐, 두고 보면 알겠지. 그리고 굳이 우리에게까지 영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영향이 없을 거로 단정할 수도 없어. 분명히 너한테 감정이 있을 테니까.”
도훈이 ‘바꿔치기’ 시도를 눈치채 아들은 응분의 처벌을 받았고, 아버지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영배의 걱정은 당연할 터.
“어쨌든 당장 고민할 거리는 아니야.”
그렇게 넘긴 도훈은 다시 일에 집중했고,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김형일이라는 인물의 움직임에 대한 근거 있는 해석은 점심때 우연히 식당에서 만난 안준식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 기초단체장이요?”
“네. 대전시 지역위 사람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 그 김형일 변호사, 국회의원 공천을 노리고 뛴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맞아요. 아직 포기하지는 않았다나 봅니다. 다만, 아들 사건 때문에 당원들에게 이미지가 나빠졌어요. 전보다 공천받을 확률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포석을 두고 있다고 봐야겠죠.”
“... 흠.”
도훈이 예상 밖이라는 표정을 했고 안준식이 말을 이었다.
“사실, 해고 노동자들 사건 맡은 것도 나쁜 건 아니에요. OO 시 조민구 시장이 정부와 당의 방침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니까요. 그래서 OO 시 지역위원회도 말이 많은가 봅니다. 대전도 그렇고요. 김 변호사는 말하자면, 당내 이단자에게 맞서게 되는 겁니다. 약자를 돕는 일이기도 하니까, 당연히 대중적 이미지의 재고를 노린 것일 테고요.”
“그럼 OO 시 다음 시장으로 출마할 수도 있다는 건가요?”
영배가 끼어들어 묻자 안준식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답했다.
“글쎄요. 정확한 속셈이야 모르죠. 하지만, 내년 총선 때 공천을 받기 위해서라도 대중적 인지도를 높이고 당원들 사이에서의 이미지를 개선해야 하는 건 맞죠. 그리고 기초단체장은 대전의 구청장도 있고 OO 시도 있고···.”
“우리 시도 있죠.”
“네.”
지난 지방 선거 때 패배한 민의당 시장 후보는 2019년 전반기 기초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했다가 또 낙선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가 50%대를 간신히 회복하고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에서, 대흥시 기초의원 보궐 선거 당선자는 여당도, 제1 야당도 아닌 놀랍게도 진보정당 소속이었다.
여하튼, 시장 후보였던 인물이 시의원 보궐 선거에도 낙선하며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3년이 채 남지 않은 다음 지방 선거 때 여당 시장 후보는 현재로써는 유력한 주자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영배가 안준식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자, 안준식이 그 의미를 알아채고 과장되게 손을 내둘렀다.
“저 그렇게 보지 마세요. 당장은 시장 되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요.”
“... 진짭니까?”
“하하, 최소한 다음 선거 때 시장으로 출마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이후라면 모를까.”
“......”
도훈이 영배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가 유력한 후보 중 하나라지만, 아무리 지방 소도시 시장 후보라도 본인이 원한다고 그냥 되는 게 아니고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고 끝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3년 가까이 남은 일인 데다가, 나서든 나서지 않든 간에 그건 본인의 자유의사.
도훈이나 영배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의장님.”
“아닙니다. 하하.”
도훈이 옆구리를 찌른 이유를 깨달은 영배가 사과했고 안준식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넘겼다.
식사를 마치고 안준식과 헤어져 시청으로 돌아오는 차 안.
“형, 아까 좀 오버했어.”
“알아. 그러니까 재깍 사과했지.”
“안 의장이 사람이 좋아서 좋게 넘어갔지. 웬만한 사람이라면 얼굴을 붉혔을 거야.”
“... 쩝.”
“좀 차분해져.”
“할 말 없네. 알았다, 인마.”
뒷좌석에서 말없이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진이 끼어든 것은 그때.
“뭔 꿍꿍인가?”
“네?”
“안 의장과 예전에도 저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네. 그때는 조 비서관 자네도 무덤덤했었지. 아까와는 다르게 말이야.”
“......”
“그새 뭐가 변한 거지?”
역시 두진의 눈치는 보통이 아니었다.
도훈과 영배가 정치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뒤, 영배가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훈의 경쟁상대로 여기고 반응한 건 처음이었다.
그 미묘한 ‘변화’를 두진은 즉각 잡아낸 것이다.
“변화는요. 그런 거 아닙니다. 임기가 3년 가까이 남은 현직 시장을 앞에 놓고 다음 어쩌고 하는 말이 계속되니까 제가 좀 오버한 거에요.”
“... 그래?”
“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실장님.”
“... 흠.”
다행히, 두진은 더 캐묻지 않고 넘겼지만, 영배는 도훈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아직 결정도 하지 않은 것을 섣부르게 다른 이에게 알리지 말자고 약속했었으니까.
‘... 쩝.’
머쓱한 표정의 영배가 입맛을 다시는 가운데, 도훈의 차가 시청으로 빠르게 복귀하고 있었다.
모두의 머릿속에 도훈의 예비 경쟁자를 의식하는 마음이 더는 전혀 없는 채로.
-----
며칠이 지난 수요일 아침, 대흥시청 비서실.
도훈은 두진에게 비서실에 모여진 각 부서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던 두진이 어떤 안건을 입에 올리기도 전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 왜 그러십니까?”
“아, 그게 좀 신경 쓰이는 보고가 올라와서요.”
“뭔데 그러세요?”
“우리 무기계약직 직원들 노조 있잖습니까?”
“노조가 왜요?”
“노조에서 다음 주 금요일에 초청강연을 여는데, 그때 강사로 초빙된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라뇨?”
“김형일 변호사 말입니다.”
“아, 예. 그런데 그게 왜요?”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고 두진이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이번 강연 제안은 OO 시 비정규직 노조를 통해 들어왔다고 하더군요.”
“......”
“그 변호사가 와서 무슨 얘기를 할지 신경이 쓰이네요.”
“노조활동이나 무기계약직 직원들 처우와 관련한 얘기겠죠. 당연히 노조원들이 관심 가질만한 사항 아닙니까?”
“명목상이야 그런 것일 테고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만···.”
두진이 말끝을 흐렸고, 잠시 그런 두진을 바라보던 도훈이 웃으며 두진의 속내를 짚어냈다.
“설마, 주말에 안 의장 하고 밥 먹으면서 들었던 얘기 신경 쓰시는 겁니까?”
“... 네.”
“실장님이나 조 비서관이나 참···.”
“......”
“오버하시는 겁니다. 아시죠?”
“... 쩝.”
두진이 머쓱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 강연에 시장님께서 축사를 해주실 수 있는지 노조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외부에서 손님이 몇 사람 온답니다.”
“인사만 하는 거라면 가야죠.”
전혀 고민할 거리가 아니라는 듯 즉답하는 도훈의 모습에 두진은 쓰게 웃고 말았다.
“축사하실 거라고 노조에 전하겠습니다.”
“네.”
“보고는 이게 전부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10분 정도 있다가 오늘 일정 시작하도록 하시죠.”
“네.”
두진이 비서실로 나간 뒤, 혼자 남은 도훈이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장님이 뭔가 감을 잡으신 것 같긴 한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반응이 나올 리가 없다고 판단한 도훈.
“나만이라도 오버하지 말아야지.”
가만히 중얼거리며 다짐한 도훈이 회의 자료를 챙겼다.
그에게는 2년 넘게 남은 선거와 관련한 고민보다 당장 오늘의 업무가 더 중요했으니까.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도훈이 대흥시 무기계약직 노조에서 주최한 강연회에 축사를 하는 날이 왔다.
-----
“안녕하세요, 의원님.”
“안녕하세요, 시장님.”
보궐 선거로 시의원이 된 진보평화당 소속 시의원 신길영과 반갑게 인사한 도훈.
나이는 50에 가까우나 항상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푸근한 미소를 잃는 법이 없는 그는,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 온 농민단체 출신이었다.
도훈의 성향이 자신과 멀지 않음을 알아서인지 신길영은 도훈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도훈은 신길영 외에도 강연장에 자리한 외부 손님과 인사하다가 드디어 문제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이분이 오늘 강사십니다, 시장님.”
노조 지부장이 소개한 말쑥한 인상의 남자가 바로 김형일 변호사.
“반갑습니다, 변호사님. 김도훈입니다.”
“반갑습니다, 김형일입니다.”
웃는 낯으로 내민 도훈의 손을 김형일이 맞잡았다.
‘응?’
꾸욱.
손에 느껴지는 ‘과한’ 압력에 도훈이 살짝 눈가를 좁혔다.
씨익.
김형일이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내며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 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