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벌써 일 년 - 3.
- 정부가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지침으로 삼고 있는데, 정작 각급 지자체에서는 그 시행이 무척 미비하거나 아예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최근까지 정규직 전환율이 0%인 지자체는 전국 245곳 중 4분의 1인 58곳에 이르고 있고 18곳은 아예 전환 계획도 세우지 못한 상태입니다. 전환 계획이 없거나 전환율이 미비한 지자체는 대개 ‘예산 부족’을 근거로 들곤 합니다. 하지만, 일부 지자체는 이걸 핑계로 삼았을 뿐, 아예 의지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 정권이 바뀌었어도 갈 길은 참 머네.”
“... 그러게.”
7월 중순의 일요일, 시 청사 도훈의 집무실.
출근해 공부 중이던 도훈과 영배가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정규직 전환 추진 계획’이라 이름 붙여진 이 문건은 OO 시의 내부 문건입니다. 정규직 전환자들이 노조를 결성해 집단 이기주의와 노사 분쟁이 발생해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고 적혀있습니다. 쉽게 말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노조를 만들어 시끄럽게 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대흥시 바로 인근의 OO 시청이 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도훈이 뉴스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문건에는 이처럼 ‘아예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정부 지침과 정반대입니다.
“... 저기 시장 여당 소속 아니냐?”
“맞아.”
“그 왜···, 비서 때문에 우습지도 않은 일 벌였던 그 시장 맞지?”
“... 어. 술 먹고 주정도 했었지.”
“... 하하.”
시장이 여당 소속인데도, 정부의 방침을 어기고 ‘노조’ 어쩌고 타령을 하고 있다는 게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부 문건이라지만, 시장과 공무원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안 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리다니.
- 고용노동부는 ‘OO 시에 근로감독관을 파견해 비정규직 해고 과정과 정규직 전환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배경에 문제가 없는지 파악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아무리 정치인의 속성이 그렇다지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 참 많다.”
“... 그러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만 2년이 조금 넘게 지났다.
작년 말부터 ‘성과가 미비’하다는 비판이 많았고, 정부 내에서도 그걸 인정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다.
경제 사정이 나쁘다는 비판과 제발 좀 어떻게든 해달라는 호소에 ‘우리 경제가 좋았던 적이 도대체 언제냐’며 각종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야당과 편향된 보도를 일삼는 보수 언론의 책임을 들먹거렸던 정부와 여당.
국회가 정부의 각종 정책 추진과 개혁 작업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것과 보수 언론과 방송이 교묘하게 ‘비판을 위한 비판’을 행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터.
그러나 집권당 소속 시장이 저런 마인드를 갖고 시정에 임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정부 여당의 책임은 절대 가볍지 않을 터였다.
“허, 참.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
어이없어하던 영배가 문득 뇌리에 떠오른 걸 입에 올렸다.
“네 전임이랑 저 시장이랑 친구라고 하지 않았던가?”
“맞을 거야. 실제로 얼마나 친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 네 전임은 그나마 저 사람보다는 양반이었네.”
“... 글쎄.”
대흥시청에는 다행히 비정규직 직원이 없었다.
전임 시장이 임기 말에 정규직 전환 계획을 세워 시행에 들어갔고, 도훈이 취임한 작년 하반기에 전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됐으니까.
“그 막가파 양반이 그거 하나는 잘했어.”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도훈이 담담히 답하자 영배가 이죽거렸다.
“아마 선거를 염두에 두고 벌인 일이겠지?”
“모르지, 그거야.”
“정부 지침이고, 선거가 눈앞에 다가왔으니까 그랬지 않겠냐? 계획 세워서 시행한 건 잘한 거다만, 친구라는 양반을 보니까 네 전임 시장이 당선됐으면 계획을 끝까지 실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거야 추측일 뿐이고.”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잖아.”
“......”
딱히 할 말이 없던 도훈은 영배에게 대꾸하지 않고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두진은 출근하지 않고 도훈과 영배 단둘이 나와 있는 상태.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영배를 위해 두진이 꼭 붙어 있어야 하는 수준은 넘어섰다.
또한, 영배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두진이 아닌 도훈이 설명해 줄 수도 있었다.
어쨌든, ‘공부’가 목적이라면 항상 함께해야 했던 두진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TV의 볼륨을 줄이고 두 사람이 각각 서류에 집중하길 얼마.
도훈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던지다시피 내려놓고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 휴우.”
“... 왜?”
“... 답답해서.”
영배가 도훈이 내려놓은 서류를 흘끔 했다.
무기계약직 직원의 처우를 규정하는 법과 조례, 그리고 타 자치단체의 사례가 적힌 문서.
대전 종합병원에 입원한 직원들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도훈이 지시해 기획감사실 법무팀이 정리해 올린 자료였다.
새로운 게 아닌, 지금껏 도훈이 최소한 한 번씩은 확인했던 자료.
무기계약직 직원의 처우 개선에 꾸준히 신경 써왔던 도훈이었기에 법무팀이 확보한 자료의 양도 많아 제법 두꺼운 서류 여러 개가 도훈 앞에 놓여 있었다.
“손댈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
“......”
“... 병원에서 다친 분들하고 했던 얘기는 나도 실장님께 들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냐?”
“... 좀.”
“좀이 아닌데, 뭐.”
영배의 말에 도훈은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대흥시가 아무리 작은 시이긴 해도 시장쯤 되면 꽤 힘 있는 사람이잖아?”
“최소한 시 안에서는 그렇겠지. 시 대빵이잖아.”
“그런데,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별로 없네.”
“그거야 당연한 거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도 견제를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대통령이라도 마찬가지야, 그건. 몰라서 묻냐?”
“모르지 않지.”
“......”
말없이 도훈을 바라보던 영배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는 진지한 표정을 했다.
“뭐가 불만인 거야? 네 맘대로 안 되는 거?”
“글쎄. 그렇게만 얘기하면 내가 무슨 투정부리는 애 같잖아.”
“안 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매달리는 건 대개 ‘애’ 아니냐?”
“... 쩝.”
정곡을 찔린 도훈은 한층 진해진 쓴웃음을 입에 물었고, 영배도 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잘하고 있으면서도 뭔가 불만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만, 그게 좀 쌓이긴 쌓인 모양이구나.”
“불만? 내가?”
“그래. 권한이라는 게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하면 할수록 아쉬운 거니까. 네가 융통성을 발휘하거나 묘수를 써서 해결하고 넘어간 일들이 어디 한둘이냐?”
“... 그런가?”
“그럼. 의회와의 관계도 그래. 안 의장이 흔들림 없이 자기 소신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고, 다행히 그 소신이 네 것과 일맥상통해서 그나마 충돌이 덜한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예를 들어 서태기 의원이 의장이었다면 지금 너와 의회 사이가 어땠을 것 같냐?”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고 말을 이었다.
“그래도 초선이 절대다순데?”
“초선이라 소신이 강할 수도 있고 정치인 때가 덜 묻을 수도 있지만, 노련한 사람에게 휘둘리기도 쉽지.”
“하긴, 이권이 걸린 일에 그 초선이 엉뚱한 마음을 먹었을 때,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것도 있지.”
“그래. 지난 1년간 운이 좋기도 했지만,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지.”
영배의 말에 도훈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피식 웃었다.
“... 왜?”
“아니, 그냥 운이 좋았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서.”
“어떤 게?”
“도지사랑 지역구 국회의원도 자기 당 소속이 아닌 내게 무척 관대하잖아. 그런 도지사, 국회의원 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지.”
“아마 그들과의 관계 때문에 의회가 날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 않겠어?”
“분명 그럴 거다. 그리고 그건 강 도지사나 김 의원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고.”
“... 흠.”
도훈은 뭔가 생각에 잠겼고, 영배는 그런 도훈을 방해하지 않으려 입을 다물고 지켜보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도훈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영배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묻는 영배에게 도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
“그냥··· 좀 더 진지하게 일해볼까 하고.”
“좀 더? 네가 일할 때 진지하지 않은 적이 있기는 했냐?”
뭔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의 영배에게 도훈이 작게, 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뭐라 답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깜빡거리며 반응이 없던 영배가 뒤늦게 눈을 크게 떴다.
“... 지, 진짜? 정말로 그렇게 마음을 먹은 거야?”
“그런 건 아니고 무조건 외면하지 않고 좀 더 고민해 보겠다는 거야.”
“야, 그것만 해도 어디냐. 상전벽해라는 말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네.”
“호들갑 떨지 마.”
“호들갑이라니? 그간 네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 없어.”
“......”
도훈이 영배의 말을 잘랐고, 영배가 ‘절친’의 진지하고도 단호한 말에 입을 다물었다.
도훈이 영배를 향해 좀 풀린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당근이지. 이런 얘길 누구한테 하겠냐?”
당연하다는 듯한 영배에게 도훈이 말을 이었다.
“형도 고민해.”
“응? 나도? 왜?”
“나 혼자 하게 할 거야?”
“... 뭐?”
“만약 한다면, 같이 할 건지 아니면 나 혼자 하게 할 건지 미리부터 고민하라고.”
“... 아.”
“시청 들어올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진지하게 고민해. 언제가 됐든, 결론 내면 말해주고.”
“... 알았다.”
절친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이기도 하다는 걸 깨달은 영배의 표정이 아주 심각하게 변했다.
그런 영배를 바라보며 피식 웃은 도훈이 덧붙였다.
“당장 어쩌자는 게 아니잖아. 아직 우리한테는 3년이라는 시간이 있어. 충분히 여유를 갖고 고민해도 돼. 당장 결론을 내려야 하는 일이 아니라고.”
“... 그렇긴 하지.”
“여하튼, 그런 줄 알고 다시 공부나 하자고.”
도훈이 그렇게 말하고 서류를 집어 들었고, 영배가 같은 행동을 하려다 멈추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오늘 공부 끝나고 한잔, 콜?”
“한잔? 왜?”
“야, 네 입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는 말이 나왔잖아. 이게 어디 보통 일이냐? 기념이라도 해야지.”
“하, 뭐 그런 걸···.”
“충분히 기념할만한 일이야, 인마.”
‘술 먹자’는 얘기를 너무나도 진지하게 하는 영배의 모습에 도훈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다시, 서류에 시선을 돌린 도훈이 지나가듯이 말했다.
“1차, 간단하게는 마실 수도 있겠지.”
“오호? 약속한 거다?”
“약속은 무슨, 봐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아, 왜 또 갑자기 술이 고파졌어?”
“됐고. 오늘은 슈퍼 앞 평상에서 쥐포에다 캔맥주 마시는 거야. 오늘은 분명 기념할만한 날일 테니까.”
“... 형이 낸다면 그러지.”
“어우! 내가 낸다, 내가 내.”
별것도 아닌 일로 아이처럼 툭탁거리는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지켜보던 조상님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그간 후손이 이런저런 고민을 속으로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던 조상님이었지만, 그와 관련한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었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으면, 겪게 될 고난과 역경이 더 힘들 테니까.
‘... 정치를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 보겠다니···. 저놈치고는 장족의 발전이네.’
정치인이 되겠다는 게 아니고 정치라는 행위에 임하는 것이라고 단서를 달긴 했지만, 큰 변화임은 틀림없었다.
후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거린 조상님이 다시 혼자 중얼거렸다.
‘완전한 결정은 아니지만, 반 보라도 앞으로 걸은 게 어디야.’
고민 끝에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도훈은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 터.
그리고 그 결론에 근거한 이후의 행동은 아마 지금보다 훨씬 무게가 실릴 터였다.
‘... 3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지. 어쨌든,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겠어.’
각자의 생각에 집중한 두 사람과 귀신 하나가 자리한 시장실.
7월의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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