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벌써 일 년 - 1.
2019년 하반기 정기인사 발표와 함께 도훈은 다시 한 번 전 직원을 대상으로 메일을 보냈다.
작년 연말, 6개월을 맞이하여 시정을 평가했던 것처럼 다시 평가를 요청했던 것.
- 형식은 관계없습니다. 짧고 간략하게 잘하고 잘못한 것에 대한 평가가 있었으면 합니다. 당연히 개선에 대한 건의도 받습니다. 노파심에 한 마디 당부드리자면, 평가를 위한 평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굳이 할 말이 없으면 백지를 제출해도 상관없으니 중언부언 틀에 박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당부의 말.
그렇게 작성되어 수거된 평가서가 비서실로 전달됐고, 평가서들이 담긴 자루에 시선을 준 영배가 중얼거렸다.
“설마, 이번에도 투서가 있진 않겠죠?”
“없길 바라야지. 지난번에 좀 난처했잖아.”
두진이 답하자 원지연이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지난번 투서 때문에 잠시 난처했던 건 맞지만, 결국 교육지원청이랑 관계가 돈독해졌잖아요. 그래서 유치원 일이 있을 때 손발을 잘 맞출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틀린 말은 아닌데요. 그런 우여곡절이 없더라도 손발 잘 맞추는 게 더 좋겠죠.”
반년 전의 투서 때문에 교육지원청이 홍역을 앓았고, 그 때문에 시청 직원과 교사들 사이에 잠깐 분위기가 안 좋은 적이 있었다.
그걸 해소하기 위해 도훈과 교육장이 함께 나서 조직을 다독였고, 그 와중에 제법 친목이 쌓인 것도 맞았다.
다만, 도훈과 함께 직원들 및 교사들을 상대했던 영배는 당시의 그 꺼림칙한 분위기를 절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해요? 저희가 확인하고 분류해요?”
“아뇨. 시장님 책상에 가져다 놓으면 됩니다. 시장님이 하나씩 다 확인하실 거에요.”
“호호, 시장님답네요.”
영배가 자루를 들고 시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며 원지연이 중얼거렸다.
그녀가 비서실 근무를 시작한 지 오늘로 겨우 사흘.
공식 인수인계 기간은 아예 없이, 퇴근 후 도훈이 야근하는 사이 정임과 대화를 나누더니 첫날부터 거의 완벽하게 일하는 그녀였다.
어제 도훈이 자기보다 원지연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는 영배에게 ‘어떠냐’고 물으니 영배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니 더 말해 뭐할까.
“그나저나 슬슬 날씨가 더워지네요.”
“올해는 그나마 느린 것 같은데. 작년에는 7월 초부터 장난 아니지 않았나?”
“매년 무더위가 더 길어지는 느낌이죠. 지구가 화를 내는 느낌이에요.”
“화를 낼만도 하지. 인간들이 너무 막살고 있잖아.”
두진과 지연이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도훈이 영배와 함께 시장실에서 나오더니 소파에 앉았다.
“실장님, 올해도 주간 순찰 준비하라는 지시 내려갔죠?”
“네. 작년에 했던 경험이 있으니 올해는 좀 더 꼼꼼히 할 수 있을 겁니다.”
날이 더워지니 작년처럼 하루 중 가장 더울 때 농촌 지역을 순찰할 준비를 하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파출소와 안전센터에도 이미 협조공문을 보내 혹서기 대비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이 지났네요.”
그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연속으로 회의와 외부 일정을 소화한 탓에, 수요일인 오늘 오후는 외부 일정이 없었다.
소파에 앉은 채 커피잔을 손에 든 도훈은 좀은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이었다.
“그간 잘하셨는데, 앞으로 3년이 남았네요.”
“휴우. 운이 좋았죠.”
“운이 좋았던 것도 있지만, 노력 많이 하셨잖아요.”
“노력은 누구나 하는 거고,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영배의 말에 도훈은 정색하고 답했다.
사건 사고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형’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었다.
‘건설 비리’, ‘인사 문제’, ‘화학물질 유출’, ‘산불’, ‘의회와 대립’, ‘지역 유지와 갈등’ 등.
단어 자체는 ‘헉’ 소리가 나올만한 것들이지만, 스케일이 다행히 크지 않았고 어떻게든 감당해냈다는 건 분명 ‘운’이 작용했다고 도훈은 판단했다.
산불이 훨씬 더 큰 규모로 날 수도 있었고, 겨울만 되면 날아드는 철새를 반갑게만 생각할 수 없게 하는 ‘조류독감’이 지난겨울엔 조용했다.
시의회 의원과 마찰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소수였고 전반적인 협력은 큰 문제가 없는 상태.
도지사와 지역 국회의원도 도훈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크게 시정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최근에 있었던 유치원 문제도 정부가 적극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와중에 원장 하나가 다행히도 매각을 결심했기에 잡음이 커지지 않았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애쓴 것도 있지만, 시정이라는 걸 전혀 몰랐던 초짜치고는 분명 운이 좋았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잘하신 건 맞아요.”
원지연의 말에 도훈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잘해야죠.”
두진이 도훈의 말에 찬성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무슨 뜻인지 도훈도 잘 알았다.
도훈이 시장인 상태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 사이클이 돌았다.
모든 것이 1년 단위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행정업무는 어느 날 갑자기 확 변하지 않는다.
꾸준히 계속해야 하는 업무가 대다수인 가운데, 큰 방향 변화보다는 자잘한 수정이 계속 가해지는 게 일반적이다.
또한, 시장 한 사람의 결정으로 바뀌는 부분은 아무리 좋게 쳐줘도 ‘일부’일 뿐.
그런데도 시민은 불편을 겪거나 문제가 생기면 불평하고 비판한다.
그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일 터.
여론조사 같은 걸 할 수 없지만, 도훈이 접하는 시민들의 시정 평가는 ‘이만하면 무난하다’, 혹은 ‘초짜치고 잘하고 있다’는 정도.
시장 김도훈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할 터.
6월 말의 환송회 겸 환영회 내내, 도훈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비서실 직원들에게 말하고 또 말했던 것이기도 했다.
영배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시민에게 약속한 성과를 내기 위해 혹은 궁극적으로는 ‘재선’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다만, 두진은 도훈이 재선에 도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느낌을 받은 듯했는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제부터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공감한 상태.
“다음 일정 뭐···.”
띠리리리.
도훈이 다음 일정이 뭐냐 묻는데, 비서실 유선전화가 울렸고 원지연이 전화를 받았다.
“시장 비서실입니다.”
상쾌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은 지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건 순식간의 일.
“뭔데 그래요?”
지연의 표정 변화를 포착한 도훈이 묻자 그녀가 수화기는 귀에 대고 송화기 부분을 입에서 멀리한 채 답했다.
“환경미화 차량이 사고를 당했답니다.”
“네? 어디서요?”
“금선면 관사 단지 앞 도로에서요. 화물차와 충돌해 옆으로 넘어졌답니다.”
벌떡.
놀란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섰고, 다른 직원들도 눈을 크게 떴다.
차량이 넘어질 정도라면, 사고 당시 가해진 충격이 컸다는 의미.
차가 문제가 아니라 차에 타고 있던 이들이 중상을 당했기가 십상이 아닌가.
“부상자는요?”
“운전자 포함 탑승했던 세 명 중 둘은 대전으로 이송할 계획이랍니다. 아무래도···.”
“... 부상이 심한 모양이네요.”
걱정스러운 표정의 두진이 입을 열었다.
대흥시에도 응급실을 갖춘 병원이 있긴 하지만, 중상인 경우 대전의 종합병원 응급실로 바로 이송하는 게 안전센터의 방침.
도훈이 업무용 핸드폰으로 안전센터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저희 직원들 사고 얘기 들었습니다. 여유 되실 때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은 다급하지만, 혹시나 업무에 방해될 수 있기에 메시지를 보낸 것.
다행히, 곧바로 안전센터장에게 전화가 왔다.
“김도훈입니다.”
- 안전센터장입니다.
“부상 정도가 어떻습니까?”
- 운전자는 경상입니다. 다만, 뒤에 탔던 두 사람이 좀 많이···.
통화하는 도훈의 표정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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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다행으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 휴우, 네.”
환자들이 이송된 대전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간 환경위생과 직원의 말에 도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정확한 상태가 어떻습니까?”
- 아직 검사가 다 끝난 게 아니라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다만, 응급실 의사 선생의 말이 최소한 전치 8주 이상은 나올 거라고 합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확인된 부분까지 부상자들의 상태를 전해 들은 도훈이 말을 이었다.
“... 가족들은 연락됐죠?”
- 네. 한 분은 저와 함께 도착했고, 다른 한 분은 지금 오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가족분들 잘 다독이시고, 다친 분들 잘 살펴 주세요.”
- 알겠습니다.
“수고해 주세요.”
통화를 마친 도훈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스피커폰으로 통화해서 직원들도 모두 내용을 전해 들은 상태.
“불행 중 다행입니다.”
“... 네.”
쓰레기 수거를 위해 뒤에 타고 있던 미화보조원 두 사람이 차가 넘어지면서 중상을 입었다.
환경미화 차량 운전자는 단순 타박상과 깨진 유리에 좀 긁힌 정도고, 가해 트럭 운전자 역시 충돌 순간 핸들을 틀며 운전석이 아닌 조수석 쪽이 부딪혀 크게 다치지 않았다.
“8주 이상이라면 꽤 큰 부상인데, 후유증이 없으려나 모르겠습니다.”
“... 그러게 말입니다.”
도훈이 두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다친 분들에 대한 지원 정도 좀 파악해 주세요. 공무상 장해라고는 해도 두 분 다 무기 계약직 신분이라니까 신경이 쓰입니다.”
“알겠습니다.”
두진이 핸드폰을 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고, 도훈의 시선이 원지연을 향했다.
“오늘 당장은 좀 그럴 것 같고···. 내일 오전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확대간부회의가 있고, 점심을 시의회 의장님과 함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오전에는 어렵겠네요. 오후에는요?”
“음, 4시에 자치행정과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신 것뿐입니다. 병원에 병문안 가시려고요?”
“가봐야죠. 우리 식구들인데.”
“점심 드시고 회의 전에 다녀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시간으로 정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지연과 대화를 마친 도훈은 영배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사고 정황이랑 우리 직원들과 가해 차량 운전자 신상 정보 좀 알아보세요.”
“정황은 알겠습니다만, 신상 정보는 왜요?”
“우리 시민일 수도 있잖습니까. 일부러 사고를 낸 것도 아닐 텐데요.”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두진, 지연, 영배가 제각기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하는데, 다시 비서실 유선전화가 울렸다.
띠리리리.
도훈이 전화를 받으려는 지연에게 손짓해 말리고는 직접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대흥시장 비서실입니다.”
- 저, 세무회계과 징수팀 안형민 계장입니다.
“아, 안 계장님. 저, 시장입니다.”
전화기 너머 직원의 얼굴을 떠올린 도훈이 말을 이으려는데, 직원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 큰일 났습니다, 시장님.
“... 큰일이라뇨?”
- 지, 징수팀장이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훈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제각기 통화하던 이들의 시선이 도훈을 향했다.
- 징수팀장이 오전에 출근했다가 몸이 안 좋다고 조퇴했습니다. 그런데 조, 조금 전에 연락이 왔는데 집에서 쓰러져서 구급차를 불렀답니다.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이라고 합니다.
“... 무슨 증상이랍니까?”
- 통화한 게 아니라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봤는데, 통화가 안 됩니다. 아마···.
“... 통화할 정신이 아닌 거겠죠.”
- ...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이 굳어진 도훈이 말을 이었다.
“어디로 간다던가요?”
- 대전으로 가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
잠시 말문을 잃었던 도훈은 두진, 영배, 지연의 시선을 의식하고 정신을 차렸다.
“상황이 파악되는 대로 알려주세요. 혹시, 이쪽에서 먼저 알게 되면 징수팀으로 연락하겠습니다.”
- 네,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안전센터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 네, 안전센터장입니다.
“김도훈입니다. 혹시 지금 대전으로 환자 이송 중인 구급차 있습니까?”
- 어떻게 아셨습니까? 한 대가···.
“... 저희 직원입니다.”
- 네?
놀라 되묻는 안전센터장에게 도훈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이송 중인 환자가 저희 직원이라고요.”
- ... 이런···.
취임 1년을 맞이해 더 잘하자는 의지를 다지던 도훈.
비서실 직원들의 놀라 바라보는 가운데, 안전센터장과 통화하는 도훈의 표정이 침통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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