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과유불급 - 2.
“저는 시장님이 이대로 쭉 개혁적인 입장을 밀고 나가셨으면 좋겠어요. 굳이 거대담론이 아니고, 우리 대흥시의 시정에서도 개혁은 분명한 화두가 될 수 있잖아요. 정책을 일일이 뜯어고쳐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정책의 방향성부터가 참된 시민복지를 향해야 한다는 거죠.”
“......”
살짝 상기된 얼굴이나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공무원 임용 2년 차 28세 여직원에게 도훈은 잠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옆에 앉은 두진이 웃음을 참는 얼굴을 감추려 슬쩍 고개를 돌렸고, 도훈은 생각 끝에 짧게 답했다.
“...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난 1년, 무척 잘해오셨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더 잘하실 거고요.”
“... 고맙습니다.”
“빈말 아니에요, 시장님. 그래서 비서실에서 꼭 일해보고 싶습니다. 안 되면 아쉽긴 하겠지만, 앞으로도 업무에 최선을 다할 거고요.”
“하하. 네. 정말 고맙습니다. 더 하실 말씀 있나요?”
“아뇨. 이게 전부입니다.”
“그럼 이걸로···.”
“아, 부탁은 하나 있습니다.”
“... 뭔데요?”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주세요.”
“......”
찰칵.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면담 내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던 직원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씩씩하게 인사하고 나갔고, 그녀를 직접 배웅한 도훈이 시장실 문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 왜 그러십니까, 시장님?”
“몰라서 물으세요?”
“하하, 네. 잘 모르겠습니다.”
“저 직원, 의욕이 아주 충만해서요.”
“그럴 때긴 하죠.”
두진이 웃으며 말했고, 도훈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으며 소파로 돌아와 다시 앉았다.
“이제 공무원 된 지 1년 반밖에 안 된 직원이니까, 아직 청운의 꿈이 빛바래기에는 이르죠. 게다가 그중 1년은 시장님과 함께 근무했으니 그 영향도 있을 테고요.”
“어찌 됐든, 부담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나중에는 막 저한테 좀 더 일 열심히 하라고 다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하, 설마요.”
“농담이긴 한데요. 잠깐 실제로 상상해보긴 했어요.”
“열정적이긴 하더군요.”
“... 하하.”
쓰게 웃고 난 도훈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는 좀 부정적입니다.”
“이유는요?”
“경력이 짧습니다. 비서실 업무야 어차피 새로 익혀야 한다지만, 기존 부서 업무를 대충 가늠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흠.”
“어떤 일을 어느 부서에서 담당하고, 어떤 분야의 자료에 대해서는 어느 팀에 요청해야 하는지 아직도 헷갈릴 때 아닙니까? 조 비서관이 방금 그 친구를 차근차근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은 아직 못되잖아요.”
“... 네. 아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시장님.”
“그게 신경 쓰이는 겁니다, 저는.”
두진은 도훈의 우려를 바로 이해했다.
도훈이 취임했을 때 비서실장인 두진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지만, 도훈과 영배는 말 그대로 생초짜.
특히 영배는 정임이 빈틈없는 모습으로 자리를 지킨 덕을 정말 많이 봤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짧은 직원에게 영배가 정임만큼의 역할을 해주기는 일렀다.
홍영진도 비서실 소속이긴 하지만, 사무실 업무에 많이 관여하지 않으니 논외로 해야 했고.
분명 적응하고 숙달하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런 여유를 허락하기에는 비서실 업무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게 문제.
“이거 참···.”
“난감하시겠습니다.”
“저만 난감한 겁니까? 실장님 직원이기도 하다니까요.”
“저도 좀 난감하긴 한데, 난감한 것보다 재미있다는 생각이 커서요.”
“... 하하.”
최종 후보 3인을 모두 만났다.
문제는 세 사람 모두 비서실에 두기가 꺼려진다는 것.
첫 후보는 도훈이나 두진이나 ‘무난’하다고 봤는데 조상님이 반대했다.
- 흠, 안 그런 척하고 있다만 뭔가 크게 기대하는 게 있어.
그 말에 짚이는 게 있어, 앞으로 비서실에서 다른 부서로 이동할 때 승진이 관행처럼 주어지지 않을 거고 정임도 그럴 거라고 말했더니 잠깐이지만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했었다.
두 번째 후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야근이든 주말 근무든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사람이었다.
후보로 올릴 때는 그다지 문제 될 게 없다고 여겨졌는데 도훈과의 미팅 전에 영진이 전해온 현 부서 동료들의 평가가 신경 쓰였다.
“너무 완벽주의자랍니다. 바로 위 선배가 학을 뗄 정도라는데요.”
“일 철저히 하겠다는 게 결격사유는 아니잖습니까?”
“그게 적당하면 그런 얘기가 나오겠습니까? 선배뿐만 아니라 부서장이 눈치를 볼 정도랍니다.”
“... 흠.”
“오죽하면 그 친구가 비서실 지원했다는 얘길 듣고 부서 동료들이 반색했다는 얘기를 제가 들었겠습니까.”
도훈이 생각하기에 일을 철저히 하겠다는 건 장점에 속하지만, 비서실의 경우에는 다를 수 있었다.
이런 걸 준비하다가 무산되거나, 저런 걸 시도했다가 외부적 요건 때문에 흐지부지되는 일이 적지 않다.
또한, 어떤 일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서 처음부터 다시 점검하거나 되짚어가야 하는 때도 있다.
일정 변경은 스트레스받을 ‘깜’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게 비서실 업무의 특성 중 하나.
아마 소문대로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이라면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닐 터.
길지 않은 면담 때도 어렵지 않게 그런 성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 뭐가 됐든 똑 부러지는 걸 좋아하긴 합니다. 애매한 건 잘 감당을 못해요.”
면담을 마친 뒤 도훈과 두진이 나란히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저분을 발령내는 게 저분을 위해서도 좋을 것 같지가 않네요.”
“... 저도 그렇습니다.”
영배, 정임과 함께 만났을 때는 저런 면은 전혀 보지 못했다며 혀를 차기까지 했던 두진.
결과적으로, 최종 후보 셋 중 당장 비서실에 발령해도 되겠다는 인물을 찾지 못한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장님?”
“... 이전 단계에서 탈락한 세 사람을 만나보죠.”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도훈은 비서실로 나가는 두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최종 후보로 고른 셋에서 낙점하지 못했는데도 왠지 즐겁다는 표정?
아니, 즐겁다기보다는 뭔가 기대된다는 그런 표정이랄까?
“... 저 양반이 왜 저러시지? 뭐야, 도대체?”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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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느지막한 시간.
도훈은 최종 후보에서 제외된 세 지원자를 차례로 만날 수 있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시장님.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무난하기 이를 데 없는 첫 번째, 두 번째 직원과의 면담을 마친 도훈이 입맛을 다시고 입을 열었다.
“쩝. 제가 정임 씨한테 너무 익숙해졌나 봅니다.”
“성에 안 차십니까?”
“성에 안 찬다기보다는 너무 무난한 분들이라서요.”
“하하,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이라는 말이 있듯, 공무원의 일반적인 특징은 이런 색깔을 가진 조직에도 잘 녹아들고 저런 색깔을 가진 집단에서도 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차례로 만난 두 직원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였다.
흠이 느껴지지도 않지만, 딱히 끌리는 점도 없달까?
“고 주무관은 제가 인정하는 인잽니다. 그런 사람 찾기 쉽지 않죠. 능력도 능력이지만, 웬만한 사람에게 꿀리는 성격도 아니고 똑 부러진 자기 스타일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러면서도 조직의 화합을 해치지 않고요. 결혼하고 애 엄마가 된 후로는 성격이 더 둥글둥글해진 것도 있죠.”
“... 그러니까 말입니다. 이거, 정임 씨 바짓가랑이 붙들고 매달려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도훈이 쓰게 웃으며 얘기하는데, 두진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음 후보는 좀 나을 겁니다.”
“네?”
“고 주무관 동기거든요. 사실, 제가 최종에서 제외시키기는 했는데, 고 주무관이 이 친구를 강력 추천했었습니다.”
“... 왜 제외하셨는데요?”
“그건 시장님이 직접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진은 다시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훈이 최종에서 제외된 세 사람을 만나보자고 했을 때의 뭔가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
“...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요?”
“네. 착각이십니다. 제가 분명히 고 주무관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불구하고 제외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
“직접 만나보시죠.”
두진이 시장실 문을 열고 비서실에서 대기하던 직원을 불러들였다.
단정한 외모의 여직원이 도훈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공보팀···.”
“안녕하세요. 원 주무관님.”
시청 직원 절대다수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도훈이었다.
원지연이 자리에 앉자 곧바로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비서실에 지원한 동기부터 묻겠습니다.”
“음, 지금 업무에 불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좀 더 폭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전부터 했습니다. 비서실은 시정 전반에 걸쳐 관여하게 되니까, 기회라고 생각했고요.”
“근무 환경이 다른 부서보다 훨씬 고될 수도 있어요.”
“그건 감수할 수 있습니다. 딱히···.”
원지연은 똑 부러지는 태도로 답을 이어갔고, 도훈과 두진의 질문에 막히는 법이 없었다.
담담하던 도훈의 눈빛에 흥미가 감돌기 시작했고, 두진도 ‘역시’라는 표정으로 이런저런 질문을 이어가길 얼마.
‘도대체 왜 걸러낸 거지?’
도훈은 원지연에게서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떤 주제든 차분하게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그녀에게서 ‘일 잘하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을 뿐.
너무 까다롭지도 너무 자유방임적이지도 않은 듯한데, 자기 주관은 또렷한 그런 느낌을 받았다.
‘... 도대체 왜 배제하신 겁니까?’
도훈이 그런 눈빛으로 말없이 두진을 바라보자, 두진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원지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원 주무관, 혹시 내가 자네를 최종 후보에서 배제한 것 압니까?”
“그럴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럼 이유도 짐작해요?”
“아마 정임이··· 고정임 주무관이 원인일 거로 생각하는데요.”
“하하, 맞아요. 고 주무관이 자네를 자기 후임으로 강력히 추천하기는 했는데, 동시에 좀 걸리는 얘기도 하더라고. 그걸 얘기해 줄 수 있겠나?”
“... 네.”
담담하던 원지연의 얼굴이 발갛게 변하더니 그녀가 시선마저 살짝 내리깔았다.
“제가 개인적으로 ‘덕질’을 좀 하는데요.”
“... 덕질이요?”
“네. 아이돌들 열렬히 추종하는 팬들이 하는 그 덕질이요. 취미입니다.”
“......”
도훈이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원지연이 전혀 예상 못 한 말을 했다.
“시장님이 그 대상 중 하나세요.”
“... 예?”
“... 제가 시장님 광팬이라고요.”
“......”
깜빡, 깜빡.
도훈이 현실감 없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원지연이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시장님은 올해 36세로, 전북 A 시에서 태어나 초, 중, 고등학교를 마치셨죠. K 대 영문과를 다니셨고, 그때 조영배 비서관과 친구가 되셨죠. 다른 친구분이 또 대흥시에 사는 것으로 아는데, 그분은 잘 모르고요. 졸업 후 직장생활 하다가 대흥에 와서 잠깐 학원 강사도 하셨고요. 아래로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작년에 졸업했고요. 어머님은 시장님 어렸을 때 돌아가셨지만, 아버님은 경찰 공무원을 은퇴하고···.”
청산유수.
도훈에 관한 얘기를 풀어가는 그녀는 말 그대로 청산유수였다.
멍.
“... 여하튼, 제가 이렇게 시장님 광팬이라는 걸 고정임 주무관이 너무 잘 알거든요. 아마, 실장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셨다면 안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도훈은 멍청한 표정으로 말문을 잃은 상태였고, 두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쓰는 상황.
도훈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 저에 관한 정보는 어떻게 찾았습니까?”
“인터넷이요. 웬만한 건 다 있어요. 지난 선거 직후에 시장님 안다는 사람들이 별의별 이야기를 다 올렸었거든요. 시장님 중학교 때부터 별명이 미친 책벌레였다는 것도 알아요.”
“......”
얼떨떨한 표정의 도훈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입에 올렸다.
“제게 친구와 애인 사이인 사람이 있는 건 아시죠?”
“물론입니다. 하지만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 왜 문제가 없죠? 원래 광팬은 미칠 듯이 좋아한다는 뜻 아닙니까?”
도훈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원지연은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해맑게 답했다.
“그거하고 좀 다른 것이요. 아이돌 좋아하는 게 ‘내가 저 사람이랑 꼭 사귀어야겠다’거나 ‘꼭 저 사람이랑 결혼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좋은 거죠.”
“... 그렇습니까?”
“저 같은 경우는 그래요. 누군가를 죽을 때까지 덕질하는 것도 아니고요. 길면 한 2년? 그 정도가 한계인 것 같아요. 덕질도 싫증이 나더라고요.”
“... 하하.”
“아, 그리고 혹시나 앞으로 사귈지도 모르는 그분과의 사이에 방해될까 봐 꺼리시는 거면 절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 그건 또 왭니까?”
더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 없다는 표정의 도훈이 묻자 원지연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저 독신주의자거든요. 웬만하면 계속 그걸 지켜나갈 생각이고요.”
“......”
“... 푸흡!”
도훈은 다시 말문을 잃었고, 두진은 더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으려 입을 막았다.
원지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 안 될까요?”
“......”
조금은 불쌍한 표정으로 묻는 원지연을 바라보는 도훈은 석상처럼 굳어진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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