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My Way - 2.
“그러시던가요.”
담담한 도훈의 말 한마디에 구석진 자리에 앉은 영배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굳어진 사람, 놀라 도훈을 돌아보는 사람 등 제각각의 반응.
미소를 머금고 도발했던 차혜은 역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방, 방금 뭐라고···?”
“좋을 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마음 잊지 말고 계시다가 다음 선거 때 간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한 행동 하시라고요.”
“......”
“선거 때가 됐든 아니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기본권이니 아무도 말리지 않을 겁니다. 아니, 자세한 법 조항 같은 건 모르니까 장담은 못 하겠는데, 최소한 저는 말리지 않겠습니다.”
“......”
너무도 담담하게 남의 일 얘기하듯 말하는 도훈의 모습은 회의 참석자 대부분의 예상 밖이었다.
‘선거 때’ 운운한 차혜진 본인도 아무리 도훈이 간이 커도 최소한 기분 나빠할 거로 생각했으니까.
도훈 대신 발끈했던 두진이 어느새 침착함을 회복했고 저만치서 지켜보는 영배가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는 걸 제외하면, 사람들 대부분이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선거 때 당신 낙선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하겠다’는 협박을 저렇게 받아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 지, 지금 혹시 선거까지 시간 많이 남았다고···.”
“내일 당장 선거가 시작된다고 해도 제 생각은 변함없을 겁니다.”
“......”
말을 하던 원장 하나가 입을 벌리고 굳어진 가운데 도훈이 맞은편에 앉은 원장들을 한 사람씩 차분히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변명은 아니지만,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을 잠시 설명하도록 하죠.”
도훈이 자세를 바로 하고는 말을 이었다.
“올해 새롭게 시작한 청소년 지원책이 생각보다 빨리 자리를 잡으면서 유, 아동으로 지원대상을 확대하기로 했다는 얘기는 다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도훈의 차분한 음성이 안정제라도 되는 양 시청 직원들이 놀란 마음과 표정을 차례로 수습했다.
그건 도훈 맞은편에 앉은 이들도 비슷해서 원장들과 그 일행들의 얼굴에서 점점 놀라움이 사라졌다.
다만, 그 결과물은 무척 달랐다.
직원들은 대개 진지한 표정으로 차분한 눈빛을 하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사람들은 낭패한 표정으로 당혹스러운 눈빛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시청에서는 유, 아동에 대한 지원 방법을 고민하며 부모들의 의견을 듣기로 했죠. 아이들이 자기 입으로 뭐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만큼, 당연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립이 됐든, 사립이 됐든, 보육교사나 원장님들이 아닌 부모님들과 먼저 간담회를 하기로 했었고요.”
잠시 말을 끊은 도훈이 마주 앉은 원장 중 몇 사람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 간담회 자리에 나타나 소란을 피운 장본인들.
도훈과 눈이 마주친 이들은 대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외면했다.
“당일 있었던 일은 이 자리에서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다고만 말씀드리죠. 아, 몇몇 원장님들이 찾아오셨던 것도 그렇지만, 더 유감스러운 것은 사립 유치원에 아이들을 맡긴 학부모들을 회유하고 설득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신 겁니다. 논의 자체를 봉쇄해버린 셈이니까요.”
도훈이 다시 말을 끊고 앞에 놓인 물컵의 물을 마셔 목을 축였고, 싸늘한 표정의 차혜은이 질문을 던졌다.
“요점이 뭔가요?”
“음, 과정이 좀 남았으나 질문을 받았으니 답을 드려야겠죠?”
“......”
도훈의 시선이 차혜은을 향해 고정됐다.
“저희의 고민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아이들과 부모님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지원책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그건 그들을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테니까요.”
“... 무슨 뜻인가요?”
“지난번, 여러분과 시청 담당자들의 미팅을 녹화한 걸 처음부터 끝까지 살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여러분의 요구는 아이와 그 아이의 보호자인 부모에게 더는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 네?”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한 원장이 반문했고, 도훈이 정색하고 답했다.
“보조금을 지급하되 최대한 자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해달라, 차량 운용이나 교체를 위한 비용 지원은 어떠냐, 교보재 구매비 지원도 나쁘지 않다, 원비 보조금도 나쁘지 않은데 그런 경우 먼저 원비를 현실화해야 한다, 시설 개보수에도 신경 쓰자 등등.”
“... 그게 왜요?”
“여러분은 그걸 유치원 아동 교육이나 복지가 아닌 경영의 논리로 이야기하셨잖습니까.”
“그게 무슨···?”
“그날 녹화한 영상을 지금이라도 다시 틀어 확인해볼까요? 어느 분이 ‘자율성’이라는 이야기를 하신 다음부터는 작년 법 개정된 것 때문에 앞으로 더 큰 경영상 어려움이 예상되고, 그걸 극복하거나 최소화하는데 시청이라도 협조해 달라는 요구가 주를 이뤘습니다.”
“......”
“아닙니까?”
“......”
원장 중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한 이유는 도훈의 말이 맞은 걸 모르지 않기 때문.
“시청에서는 아이들과 부모에게 혜택이 가게 하려고 고민하고 정책으로 입안하려는 건데, 여러분에게서는 그런 고민이나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거의 들을 수 없었습니다.”
“......”
“당연히, 고민을 심화하는 논의나 정책 수립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할 필요가 없었죠.”
“......”
다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살짝 돌려서 말했지만, 방금 도훈이 사립 유치원 원장들에게 ‘당신들은 아이들 복지보다 유치원 경영 개선에 더 관심이 있다. 그래서 함께 논의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니까.
이를테면, 제사보다 제삿밥에만 관심 있다는 얘기.
원장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도훈의 말뜻을 모르지 않았고 몇몇은 얼굴을 붉히며 노기를 드러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회의실 분위기가 싸늘하다 못해 흉흉해지는 건 당연지사랄까.
도훈이 다시 원장들을 차례로 바라본 후 말을 이었다.
“저희는 지금도 유, 아동 복지 증진 및 부모의 육아 부담을 줄이는 걸 목표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부’ 목표를 공유하지 않는 분들이 반대한다고 해도, 국민 다수가 공감하고 동의한다는 걸 잘 아니까, 우리 대흥시 시민들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믿으니까 끈기 있게 추진할 겁니다.”
옆에 앉은 두진이나 다른 시청 직원들이 경탄스럽다는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이다음에 이어질 얘기가 뭔지 짐작이 갔기에.
“그런 일을 하다가 누군가의 불만을 사고, 그렇게 불만을 가진 분들이 선거 때 절 낙선시키기 위해 노력하신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죠.”
“... 하하.”
원장 중 하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웃었지만, 도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못을 박았다.
“아이들 복지를 증진 시키고 부모의 부담을 줄이자는 목표에 공감하는 분이라면, 그 어떤 분과도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생각이 있습니다.”
도훈의 시선이 차혜은을 향했다.
“하지만, 그 목표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설사, 그 업계에 있는 분들이라고 해도 굳이 마주 앉을 필요성을 못 느끼겠습니다.”
차혜은의 눈빛이 매섭다 못해 살벌하게 변했지만, 도훈의 태도는 ‘그러거나 말거나’.
“누가 예전부터 제게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
“옳은 일 하고 불이익당하는 걸 겁내지 말라고요.”
“......”
“어쩌면 이번이 그 말을 실천할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
“제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말을 마친 도훈이 다시 목을 축이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댔다.
그리고 사회를 맡은 사회복지실장에게 시선을 줬다.
“시, 시장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어서 발언하실 분 있으십니까?”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이들은 입을 열면 욕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때문이었고, 어떤 이들은 처음 보는 도훈의 ‘패기’에 좀 탄복해서였다.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저만치 허공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상님이 중얼거렸다.
- 불이익? 낙선운동이 과연 네 녀석에게 불이익이 되겠냐? 출마나 고민하고 그런 얘기를 해라. 영악한 놈 같으니라고.
타박하는 듯 말하면서도, 조상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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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일과를 마친 도훈은 비서실 직원들과 오래간만에 회식하고 꽤 취해 귀가했다.
세경과 영화라도 볼까 하는 생각이 든 건 토요일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점’을 먹은 뒤였는데, 연락해봤더니 안타깝게도 세경은 일이 있어 서울에 가 있었다.
그래서 도훈은 주말 내내 푹 쉬었다.
자고 또 자고, 순심이가 밥 달라고 보채야 일어나 순심이 밥 챙겨주고 자기 배도 채우고 또 자는 식으로.
잠깐 순심이 산책을 시키기 위해 나갔던 걸 제외하면, 말 그대로 밀린 잠을 몰아서 잔 주말.
그런 주말을 보내고 상쾌한 마음으로 시청에 출근한 도훈.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오 계장님.”
갸우뚱.
“안녕하세요, 시장님. 주말 잘 보내셨어요?”
“네. 잘 보냈습니다.”
또 몇 걸음 걷고 갸우뚱.
영배가 아침에 일이 있어 오래간만에 순심이와 단둘이 출근한 도훈은, 그렇게 마주치는 직원과 인사할 때마다 몇 걸음 걷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반복한 뒤에야 비서실에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시장님.”
두진과 정임, 영진이 도훈을 맞이했다.
여느 때처럼 커피를 들고 비서실 소파에 앉은 도훈이 별다른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
“직원들 눈빛이 참···.”
“눈빛이 왜요, 시장님?”
“아, 다름이 아니라 아침에 마주친 직원들 눈빛이 좀 묘하게 느껴져서요.”
도훈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자 두진, 정임, 영진 셋 모두 거의 동시에 머쓱한 표정을 했다.
그들의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은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제가 느낀 게 맞는 겁니까?”
“... 아마 그럴 겁니다.”
“......”
두진이 좀 머뭇거리다 답했고, 도훈이 설명을 요구한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런 도훈의 눈빛에 응한 것은 영진.
“주말에 직원들 사이에 아주 빠르게 어떤 말이 돌았습니다.”
“... 어떤 말이요?”
“시장님께서 무척 패기가 넘친다는 그런 말이요.”
“금요일 간담회 건을 두고 얘기하는 겁니까?”
“네.”
도훈은 이내 영진의 말이 한번 걸러진, 그러니까 순화된 표현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기야 선거로 당선된 시장이, 다음 선거 때 낙선운동 하려면 마음껏 하라는 식으로 내질러버렸으니.
말이 좋아 ‘간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이지, 차혜은의 협박에 도훈은 ‘옳은 일 하고 불이익당하는 건 오히려 영광이다’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나.
“그래서 진짜로 입에 올린 말은 뭡니까?”
“네?”
“거르지 말고 그대로 옮겨 보세요. 욕은 아닐 테고, 그렇다고 나쁜 뜻으로 말한 것도 아닐 거 아닙니까?”
“... 그, 그게···.”
영진이 난처해 했고, 두진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는 가운데 정임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말할게요. 있는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 시장님이 이 정도로 ‘똘끼’ 충만하고 ‘마이 웨이’ 스타일인 건 몰랐다’에요.”
깜빡, 깜빡.
“... 똘끼요?”
“네.”
“......”
말문을 잃었던 도훈은 잠시 뒤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 그런 얘길 들어도 차마 반박을 못 할 상황이긴 했죠.”
금요일 간담회는 도훈의 발언이 끝나고 곧 마무리됐다.
이쪽이 최후통첩 비슷한 걸 했으니, 저쪽에서 대화를 시도할 리가 만무했다.
싸늘하게 노려보다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긴 게 전부.
간부들이 이후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우려했지만, 그렇다고 ‘관점’부터가 다른 이들에게 먼저 타협을 요청할 수는 없다는 게 도훈의 판단.
거기에 도훈의 결정에 반발해 뭔가 ‘행동’에 나서기에는, 법 개정 이후의 여건이 좋지 않았다.
‘휴원’, 혹은 ‘폐원’을 언급했다가는 시청이 아닌 교육부나 교육청을 상대해야 할 테니까.
“똘끼는 모르겠지만, 마이 웨이는 틀린 말이 아니네요.”
중얼거린 도훈이 두진에게 시선을 주고 말을 이었다.
“그 건, 어떻게 되고 있다던가요?”
“원장이 마음을 굳혔다고 들었습니다. 조만간 실사 작업에 들어갈 거라고 하더군요.”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죠.”
이미 그럴 것이라 예상하긴 했지만, 확정됐다니 한층 마음이 든든해진달까.
“어차피 돌아갈 생각도 없으니 마이 웨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보죠.”
담담하게 웃으며 말하는 도훈의 모습에, 세 비서실 직원이 동시에 두 글자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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