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정답은 없어도 … 3.
사립 유치원 원장들과의 간담회는 1시간 조금 넘게 진행됐다.
그 시간 대부분이 토론이나 논의가 벌어진 게 아닌 원장들의 의견을 듣는 과정이었으며, 참가한 시청 직원들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별다른 의견개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영상을 전달받아 직접 확인한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처리할까요, 시장님?”
“담당 부서에 영상을 보고 서류로 정리하라고 하세요. 완성한 서류는 참가한 원장님들에게도 한 부씩 보내시고요.”
“그 외에는요?”
“일단 그거면 됐습니다.”
추가지시를 내리지 않는 도훈에게 다들 의아함보다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는 도훈과의 생활은 비서실 직원들이 그의 ‘성향’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게 했으니까.
지시를 내리고 도훈이 시장실로 들어가자, 다들 두진의 책상 근처로 모여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죠?”
“그러게. 뭔가 수용할만한 게 있으면 검토해보자는 얘기라도 하실 텐데 그조차 없으니···.”
“자료 조사 얘기도 안 하셨잖아요. 이거 안 좋은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요.”
직원들이 지금껏 보아온 경험으로, 도훈이 어떤 주제에 대해 더 논의해 보자고 하지 않을 때는 전적으로 두 가지 경우에 속했다.
하나는 덧붙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잘 준비되었을 경우였고, 다른 하나는 생각해볼 가치가 전혀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였다.
어떤 안건이 됐든 도훈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예외적으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건 대부분 후자에 속했다.
그래서, 도훈의 그런 성향이 시청 직원들에게 알려진 뒤로는 ‘시장이 안건 검토하면서 별말 안 했다’는 말이 절대 좋은 얘기가 아니게 되었다.
“... 이렇게 되면, 사립 유치원 원장들과의 논의는 더 이어가지 않기가 십상인데··· 자네들 생각은 어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도요.”
질문하는 두진이나 답하는 영배와 정임이나 조금은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니까 말이다.
“... 처음엔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 차혜은 원장인가요? 그 양반이 ‘자율성’ 어쩌고 얘기하면서 분위기가 좀···.”
“그러게. 중앙정부에서 안 된다고 한 일, 유치원에 지키라고 한 일 때문에 어렵고 힘들다고 시에다 하소연한다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지.”
차혜은은 사립 유치원들의 형편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시가 생각하는 지원책에서 최대한 ‘자율성’을 보장해 줄 것을 강조했었다.
전에는 ‘운용의 묘’를 살릴 수 있는 여지가 제법 있었는데, 법이 개정되고 회계 등의 부분에서 정부 관리가 시작되는 등 자율성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란다.
그런 걸 하소연한다고 시청에서 국회와 정부가 승인한 그 조치를 되돌릴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 그 발언의 목적은 유치원 아동 지원을 위한 예산을 최대한 자기들 희망에 따라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일 터.
차혜은이 그 말을 하고 난 다음, 원장들 모두가 좀 더 ‘노골적인’ 요구를 하기 시작했던 걸 생각하면 그런 판단이 틀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직원들이 생각하기에도 도훈이 괜히 문서화 작업만 지시한 게 아니었다.
터무니없다는 말조차 아까운 의견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좋지 않은데···.”
두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고 정임도 비슷한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영배는 좀 생각이 달랐다.
‘... 우리 도훈이도 만만찮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시장직에 목매단 것도 아니고···.’
원장들이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장이 재선을 위해 자신들에게 최소한 ‘협조’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으리라.
선거 시기, 누군가를 당선되게 하는 건 힘들지만 떨어지게 하기는 쉽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질 않은가.
유치원 원장들이 학부모를 통해 선거에 영향력을 제법 행사한다는 게 실제인지 허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많은 정치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 사실.
당연히, 원장들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자신들의 도움 혹은 협조를 바랄 것이고 도훈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할 터.
하지만, 그런 짐작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지금의 도훈에게 먹힐 턱이 없었다.
‘... 이거 잘하면···.“
영배가 중얼거리고 있는데, 정임이 사회복지실 보육팀에 도훈의 지시를 전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 정임을 바라보던 두진이 입맛을 다시고 입을 열었다.
“쩝. 일이나 하자고. 우리끼리 걱정해봤자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네, 실장님.”
두진의 말에 영배와 정임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좀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의 영배 말고, 두진과 정임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걱정되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분쟁의 불씨를 품은 채 시간이 흘렀다.
-----
사립 유치원 원장들과의 간담회가 열리고 열흘이 넘게 지났다.
그새 시청은 원장들과는 물론, 사립 혹은 공립유치원 학부모들과도 논의를 이어가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우리 얘기를 들어주려니 아무래도 곤혹스럽겠지’하고 담담하게 넘기던 원장들도 아무런 진척 없이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자 걱정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저는 시청 쪽이 너무 조용해서 더 걱정스러워요. 못한다는 소리, 힘들다는 소리라도 들렸더라면 우리 생각이 맞겠지만, 일절 우리와 얘기했던 것과 관련한 말이 없잖아요. 이러다가 아예 지원계획을 백지화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글쎄요. 양 원장님이 뭘 걱정하시는지는 잘 알겠는데요. 내부의 얘기가 밖으로 흐르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는 것일 수도 있죠. 그쪽도 우리가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테니까요.”
- 흠, 차 원장님이 너무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걱정부터 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그리고 설사 백지화되더라도 우리에게 손해는 아니잖아요? 최소한 줬던 걸 뺏는 식은 아니니까요.”
- ... 그렇긴 하죠.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다른 사립 유치원 원장과 통화하는 차혜은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는 차혜은의 유치원보다 조금 규모가 작은, 대흥시에서 두 번째로 큰 사립 유치원 원장이었으니까.
도립유치원이 ‘넘사벽’ 수준으로 운영되는 터라, 사립 유치원끼리 경쟁하기보다는 협력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환경.
하지만, 도립유치원을 비롯한 공립유치원들과의 경쟁보다는 못해도 사립 유치원 간의 경쟁도 엄연히 존재한다.
때로는 사립 유치원 간의 경쟁에 사활을 걸 정도로 치열했다.
건물 외관부터 시작해 내부 환경이나 교육 프로그램 등 자칫 운영에 소홀하면 자리가 꽉 찬 공립으로는 바로 못 가도 대개 빈자리가 있는 사립으로는 당장에 옮길 수 있으니까.
지금 차혜은과 통화하는 상대는 어떻게든 사립 1등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강력한 경쟁자였다.
유치원 운영에서뿐만 아니라 사립 원장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에서도.
다른 원장이 아닌 양 원장이 전화한 건, 그녀가 부추겼든 실제로 느꼈든지 간에 지금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원장이 다수라는 뜻일 터.
- 아무쪼록 차 원장님 생각이 맞았으면 좋겠네요.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그래야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양 원장님. 이런 힘겨루기는 원래 느긋한 사람이 유리한 법이니까요.
- 네. 이만 끊겠습니다.
뚝.
통화를 마친 차혜은이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더니 책꽂이에서 서류 하나를 뽑아 손에 들었다.
“... 어쩌자는 거야, 도대체?”
간담회 사흘 뒤에 도착한, 시청에서 보낸 간담회 내용을 요약 정리한 문서.
최소한의 형식은 갖췄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원장들의 요구사항만이 정리되어 있을 뿐 시청 담당자나 해당 부서의 평가나 의견 같은 건 전혀 없는 그런 문서였다.
굳이 말하자면, 무용지물.
대흥시 소재 사립 유치원 원장이 모두 모여 한 시간이 넘게 미팅을 한 결과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특히, 차혜은이 계획했던 것에 비하면 실망이라거나 초라하다는 말조차 하기 아까울 정도였다.
미간을 찌푸린 차혜은이 핸드폰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이미 아는 사실이었지만, 받지 못한 전화도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도 없다는 걸 확인한 그녀가 투덜거렸다.
“이런 거라도 좀 도와줘야 할 거 아니냐고.”
시청에서 일절 소식이 없었기에 언니인 차혜진 의원과 친분이 있는 민의당 소속 시의원에게 혹시 이 안건에 관해 흘러나오는 얘기가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도 시청 내에 인맥이 있긴 했지만, 현역 시의원들만큼 영향력이 크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사흘 전에 부탁했는데도 언니에게서도 민의당 소속 시의원에게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교육지원청 쪽의 지인에게 소식을 물었는데, 아직 시행하기로 결정된 것도 아닌 사업이라 교육지원청과 논의를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얘기만 들었다.
“... 이렇게 조용하기만 할 수는 없는데···.”
원장들이 요구한 것 중 시청이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고는 해도, 정말 정책을 실행할 예정이라면 최소한 요구 수위를 낮추기 위한 논의라도 이어가야 하는 게 맞다.
그러기 위해서 원장들을 압박할 목적이든 아니면 정말 하소연이든지 간에, ‘이런 요구는 못 들어준다. 차라리 사업을 백지화하고 말지.’라는 얘기가 어떻게든 흘러나오는 게 정상이라고 여겼던 차혜은이었다.
시장과 유치원생 학부모들의 간담회 얘기를 들었을 때, 이쪽에서 이런 식으로 나가면 저쪽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이고 이쪽에서 이런 제안을 하면 저쪽에서 어떻게 쩔쩔맬 것인지를 자신만만하게 예상했던 그녀.
그녀의 경험에 유추해볼 때, 밀고 당기는 과정 끝에 100% 사립 유치원에만 지원하는 일은 없을지라도 분명 뭔가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 차혜은의 그 예상은 딱 ‘사립 유치원 원장 간담회’ 개최까지만 맞았다.
달랑, 몇 장짜리 요약 보고서 이후 깜깜무소식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히, 느긋한 마음으로 추이를 관망하고만 있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만약, 지금과 같은 차혜은의 반응을 노린 거라면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는 ‘고수’였다.
“... 언니는 이런 걸 두고 보통이 아니라고 말했던 건가?”
말쑥한 도훈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혜은이 중얼거리는데, 누군가 원장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차혜은이 찌푸렸던 표정을 얼른 바로 하고 답하자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유치원 행정실장.
차혜은에게 묵례한 행정실장이 차분하게 말하며 책상으로 다가왔다.
“시청에서 우편물이 하나 왔습니다, 원장님.”
‘옳지!’
뭐가 됐든, 반응이 없는 것보다는 반응이 있는 게 낫다.
당연히 기꺼운 마음이 들었지만, 차혜은은 그걸 티 내지 않았다.
“그래요?”
“네. 아마, 지난번 참석하셨던 간담회 관련해서 반응이 온 것 아닐까 싶은데요.”
“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차혜은이 실장에게서 우편물을 넘겨받았다.
행정실장도 이 상황을 모르지 않으니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공손한 자세로 서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행정실장의 시선을 의식한 차혜은이 일부러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열흘이나 끙끙 앓으며 고민한 결과가 어떤 건지 한 번 볼까?”
찌익.
웃으며 봉투를 찢은 차혜은이 잘 접힌 A4 용지를 폈다.
“어디 보···.”
공문을 읽어내려가던 차혜은의 눈이 크게 떠졌다.
“... 이, 이게 무슨···?”
차혜은의 얼굴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 왜 그러세요, 원장님?”
“......”
행정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예상 밖의 내용.
빠르게 공문을 읽어내려가는 차혜은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해져 갔다.
무른 흙이 바싹 말라 돌처럼 굳어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느낌이랄까.
으득.
차혜은이 이를 악물었고, 이에서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났다.
원장 간담회에 대한 반응이라면 반응인데, 전혀 그녀가 예상하거나 기대한 바가 아니라서.
“이것들이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건가?”
싸늘하게 굳어 중얼거리는 차혜은의 눈에서 선명한 독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 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