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24화 (125/279)

124. 정답은 없어도 … 2.

- 난 좀 셌다고 생각하는데, 네 생각이 다르다면 네 생각대로 하면 되겠지. 당사자는 너고 기선제압을 노린 효과가 있긴 있으니까 말이야. 시청에서 간담회 제안했다며? 하지만 이겼다고 생각하면 안 돼. 김 시장 만만한 사람 아니야.

“언니, 그래 봤자 시장이야. 정치인이잖아. 때 되면 표 달라고 안달복달할 거 아니야.”

여자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선거’를 피할 수 없고, 그때마다 자신과 동료들에게 도움을 부탁하거나 협조를 공손히 요청하는 이들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은 그녀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 글쎄다. 그 사람이 지금 표 달라고 안달복달해서 시장이 됐다고 생각하니?

“그건 아니긴 하지만, 재선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평범한 사람보다 못하다는 말도 있잖아.”

- 그렇게 태평스럽게 생각하다가 큰코다친다. 너 나한테 얘기 많이 들었잖아. 창피한 얘기지만, 김도훈 시장 어리다고, 초선이라고, 무소속이라고 깔봤다가 가장 된통 당한 게 바로 나야.

“흠, 그렇긴 한데···.”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상대의 말을 수긍해서가 아니라 상대가 초짜 시장에게도 여러 번 당하는 걸 ‘능력 부족’이라고 여긴 때문이었다.

아무리 평판 좋고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고 해도, 제각기 사업체를 운영하며 온갖 궂은일을 헤쳐온 자신들이라면 다를 거라고 여기기도 했고.

여자는 그만큼 자신이 이루어놓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 어쨌든, 잘해 봐. 공개적으로 나서기는 힘들지만, 응원은 할 테니까.

“고마워, 언니.”

달칵.

통화를 마친 여자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헛똑똑이라니까, 언니는. 자기만 모르지, 그걸.”

그녀가 방금 통화한 사람은 대흥시 시의원인 차혜진.

그녀에게는 사적으로 친언니이고 대자당 소속으로 지난 선거에 나섰다가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지만, 인정이 아닌 무시에 가까운 평가를 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언니라고 이쁨만 받아서 자기가 잘난 줄 알지만, 세상엔 그 정도의 외모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어.”

남자 없이 세 자매뿐인 집안에서 차혜진은 맏언니로 언제나 부모의 예쁨과 지원을 독차지했다.

수도권 사립대학 영문과를 나와 대전에서 학원 강사를 하다 대흥시에 학원을 차린 것도 부모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 지원이 없었더라면, 차혜진은 대흥시에서 두 번째로 큰 학원의 주인일 수 없을 터.

대형 학원장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주변에서 떠받들어지기만 하다 정치계에까지 입문했지만, 그 시작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난 밑바닥부터 혼자 쌓아왔단 말이지.”

중얼거리는 여자의 이름은 차혜은.

그녀는 세 자매의 막내로 공립유치원을 제외하면 대흥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립 유치원 원장이기도 했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는 부모에게 일절 지원받은 것 없이 유치원을 개원해 온갖 고생 끝에 지금의 규모로 키워왔다.

부모 대신 위의 언니들로부터 도움받은 적이 있긴 했지만, 가정주부인 둘째 언니는 물론 시의원인 큰언니 차혜진보다 지금은 더 부모님께 인정받는 자식이 됐다.

영향력은 모르겠지만, 모은 재산이 월등히 많으니까.

“여기서 더 물러서면 안 돼.”

작년 국회 국정감사 이후 사립 유치원 원장과 설립자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들끓었을 때, 차혜은을 비롯한 대흥시 사립 유치원 원장들은 중앙 조직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따르는 대신 침묵하는 걸 택했다.

아무리 봐도, 성난 민심을 등에 업고 딴 때 없이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정부와 맞서 싸우는 게 승산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유치원과 교육부 사이의 갈등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껏 계속 유치원 연합회 쪽이 승리했지만, 이번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차혜은이나 다른 원장들도 모르지 않았다.

“굳이 싸워야 한다면, 이기는 싸움을 해야지.”

성난 민심의 지원을 받는 정부보다 재선에 목멜 초짜 시장과의 싸움이 훨씬 더 승산 있게 느껴진 건 당연지사.

싸움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게, 아동에 대한 지원책 확대를 먼저 고민하고 정책으로 입안하려는 건 다름 아닌 시청이었다.

사립 유치원 입장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정책이 방향을 잡거나 사립 유치원 쪽에 살짝 무게중심이 실리기만 해도 이번 일은 성공이었다.

중앙 조직처럼, 야당조차 난색을 보였을 정도로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눈치껏 적당히’라는 말이 괜히 만고의 진리인 게 아니지.”

득이 되는 건 뭐가 됐든 챙기고 봐야 한다지만, 너무 욕심내다가는 달걀을 낳을 닭을 잡는 우를 범할 수도 있었다.

차혜은이 가장 큰 사립 유치원 원장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악착같이 노력한 것도 있지만 그런 우를 범하지 않으려 신경 쓴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유치원 입학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있고 부부 모두 일해야 어렵사리 살림을 꾸려갈 수 있는 현실에서, 아이들을 맡겨야 하는 부모는 유치원 앞에서 을(乙)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대흥시가 대도시가 아니고 큰 공립유치원이 있다고는 쳐도, 이런 상황까지 역전될 환경은 아니었다.

차혜은은 최소한 학부모를 대상으로는 그런 갑을 관계를 이용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다는 걸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좀 세련된 방식을 통했다고나 할까.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니까.”

차혜은은 처음 남의 유치원에서 교사로 일할 때부터 학부모를 능수능란하게 상대하기로 유명했다.

워낙 학부모 대응을 잘해서 남들보다 성과급을 받기도 했고, 상담실장을 맡아 원장 대신 학부모 대응을 전담할 정도로.

그래서 박봉에 격무로 고생하는 유치원 교사들과 조리사 및 유치원 차량 운전사들에게서는 때때로 원장에 대한 불만이 들려와도, 학부모들에게 불만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거의 없었다.

딩동.

밥이 반은 익었다는 생각에 차혜은이 여유롭게 미소를 띠고 있는데,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 차 원장님, 시청과 간담회 하는 날짜 언제로 할까요?

시청과 접촉하는 역할을 맡긴 다른 사립 유치원 원장의 메시지에 차혜은이 뺨에 손을 얹고 생각에 잠겼다.

“... 속을 좀 더 태워볼까 말까···.”

중얼거리는 차혜은은 이미 다 이긴 싸움을 앞둔 것처럼 자신만만하고 기대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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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전, 시청 소회의실.

10명가량의 사람이 모인 가운데, ‘유치원 아동 대상 보육 지원책’에 대한 간담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중 일곱 명이 사립 유치원 원장으로, 대흥시에 있는 사립 유치원 원장 모두가 참가하고 있었다.

“저, 오늘은 시장님 참석 안 하시나요?”

“시장님요? 오늘 오전에 다른 일정 있으셔서요. 미리 잡았던 일정이라 변경하기 어려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시청 사회복지실장의 답에 반대편에 앉은 원장들이 미간을 찌푸렸고, 실장의 말이 이어졌다.

“보시는 것처럼 오늘 간담회는 영상 녹화를 해서 시장님께 전달될 예정입니다. 직접 참석하시지는 못하지만, 원장님들의 의견은 가감 없이 듣기 위해서 시장님께서 지시하신 겁니다.”

긴 테이블에 양편으로 나누어 앉은 간담회 참가자들 저만치 옆으로 작은 빨간 불이 반짝거리는 카메라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번 학부모 간담회 때는 참석 하셨잖아요.”

“그 간담회 역시 미리 계획된 일정이었으니까요. 일정 변경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 많이 아쉬워하셨습니다.”

실장이 담담하게 답하고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도훈은 간담회를 준비하라 지시할 때부터 자신이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못 박았다.

설명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안을 설득할 것도 아닌, 사립 유치원 원장들의 의견을 듣는 것에 불과하니까.

다만, ‘시장은 불참한다’는 얘기를 먼저 하지 않도록 했다.

시청의 준비과정이라고 해봤자 원장들끼리 잡은 날짜를 통보받은 게 전부여서 원장들 쪽에서 ‘시장이 참석하냐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지도 않았다.

‘당연히 참석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도훈은 원장들 기대대로 행동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오늘 오전의 일정은 급조된 것이었다.

“시작하실까요?”

조금은 썰렁해진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척 한 실장의 말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차혜은이 나섰다.

“그러죠. 먼저 월요일 학부모 간담회 때 소란을 피운 걸 사과드리겠습니다.”

“... 아, 네.”

“저희가 사실이 아닌 얘기를 갑자기 들어서 좀 흥분했었어요. 아무리 흥분했어도 아이들도 있는 곳에서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당일 참석했던 시청 직원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학부모님들께 일일이 연락드리기가 어려워서 도립유치원 원장님을 통해 따로 사과 말씀을 전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시장님께 전하겠습니다.”

원장들이 먼저 잘못에 대해 사과하니 공무원들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미리 말씀드리긴 했으나 다시 한 번 확인해 드리자면, 시청에서 하반기부터 유치원 아동을 대상으로 지원책을 강화할 계획인 건 맞습니다. 다만, 아직 고민 단계이고 정책안으로 마련되기까지는 좀 시일이 걸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반기라고 말씀드렸지만, 시행에 들어가는 건 빨라야 8월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산 규모는요?”

“아직 확정하지 않았습니다. 현재로써는 학부모들이나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하는 단계라서요. 안을 마련하고 시의회와 논의를 해봐야 얼마만큼의 예산을 투입할 수 있을지 추정할 수 있겠죠.”

실장의 말에 원장들이 말없이 눈을 빛냈다.

확정하지 않았다는 건, 시청 쪽에서 투입하려는 예산 규모가 작지 않다는 걸 의미했다.

적은 금액으로 정책을 시험해 볼 생각이라면, 미리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뜻에서 ‘추정치’라도 내놨을 테니까.

“지금도 사립 유치원 아동 대상으로 식자재 구매비 등 일부 지원이 있긴 합니다만, 현재 지원하는 항목의 확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임 도지사 때부터 ‘애들 먹을 것 같고 장난치지 못하게 하자’는 생각에 지역 학교급식지원센터를 통해 식자재를 납품받는 걸 적극적으로 권장해왔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믿을 수 있는 식자재를 아이들에게 먹이자는 의미.

대흥시의 경우, 이 급식지원센터를 통했을 때 식자재 구매비 일부를 시청에서 부담하는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학부모에게 수당이나 지원금으로 지급하는 건 어떤가요?”

“그것 역시 고려 중이긴 한데, 순위는 낮습니다. 국가와 도에서 지급하는 수당이 있으니까요. 월요일에 학부모 간담회 때도 꼭 수당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사회복지실장의 말에 몇몇 원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부모에게 수당 혹은 지원금으로 지급되면 유치원이 그 돈을 받아 어떻게 사용하든 관리할 명분이 없으니 시청 쪽에서 선호하는 방안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작년 일로 사람들이 유치원에 관해서 너무 많이 알아버렸어.’

차혜은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실장이 말을 이었다.

“원장님들께서 원하시는 게 있는지 그걸 들어보고 싶습니다.”

실장의 말에 원장들은 잠시 서로 눈치를 볼 뿐, 먼저 나서는 이가 없었다.

“하하, 부담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의견을 구하는 거니까요. 원하신다고 다 들어드릴 수도 없다는 거 아시잖습니까?”

실장이 웃으며 말했고, 원장 하나가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더니 말을 시작했다.

“어느 유치원이나 아이 대부분이 차량을 이용해 통학하잖아요. 차량 유지비 지원이나 노후 차량 교체 지원 같은 것은 어떨까요? 다른 곳은 사소할 수도 있지만, 우리 유치원에서는 중요한 문제라서요.”

한 사람이 시작하자 원장들이 제각기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저는 급식비 지원확대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아이들 먹을거리는 학부모들이 민감한 부분이니까요.”

“원비를 지원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다만, 그런 경우엔 유치원비를 조금 현실화할 필요가 있겠죠.”

“회계처리를 깔끔하게 한다는 전제하에 제한 없이 금액 지원하는 건 좀 무리인가요?”

유치원마다 사정이 제각각인 만큼, 원장들의 말은 한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길 얼마,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는 차혜은을 향해 사회복지실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차 원장님께서는 왜 아무 말씀 안 하시는지···.”

“글쎄요. 왠지 느낌이 좀 그래서요.”

“느낌이 그렇다뇨?”

“입 아프게 얘기해봤자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느낌이랄까요?”

“네?”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실장에게 차혜은이 말을 이었다.

“이런 방식도 좋은데, 최소한의 가이드 라인 같은 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 가이드 라인이라시면···?”

빙긋.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차혜은이 답했다.

“시청에서 어느 선까지 사립 유치원의 자율성을 인정해주느냐의 문제겠죠.”

“... 죄송한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좋아요. 그러니까···.”

차혜은이 어려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맞은 편에 앉은 시청 직원들의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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