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당신의 … 를 응원합니다 - 3.
토요일 오전.
“자, 순심아. 오래간만에 널찍한 곳에서 뛰어보자.”
왈! 왈왈!
마당을 뛰는 순심이를 덩치 둘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컹! 컹컹!
“바우! 누리! 너네 그러다···.”
왈왈왈!
순심이가 앞을 가로막은 셰퍼드들에게 앙칼스럽게 짖자, 움찔한 셰퍼드들이 펄쩍 뛰어 물러났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이야 체급 차이가 너무도 확연하지만, 새끼였던 바우와 누리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순심이는 이미 성견이었다.
그때도 덩치는 셰퍼드들이 컸지만, 장난스럽게 순심이에게 달려들다가 혼쭐이 나곤 했었다.
그때는 도훈도 글 쓰는 일만 했었기 때문에, 거의 매주 주말 집에 올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바우, 누리도 다 컸지만, 새끼 때의 기억이 있는지 순심이는 녀석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도훈이 현관문을 열고 아버지를 불렀는데, 집 반대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나 뒷마당에 있다!”
가방을 내려놓고 뒷마당으로 향하자, 양지바른 곳에 자리한 벌통 사이에 양봉 방충 모자를 쓴 아버지가 보였다.
“저 왔습니다.”
“오냐. 그런데 왜 혼자야?”
자신을 흘끔 하고 반문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도훈은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요, 아직은.”
“그래서 혼자 왔다고?”
“... 네.”
“흠, 너한테는 용건이 없는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남이 오래간만에 집에 왔는데, 그리고 저 오라고 한 건 아버지시잖아요. 기사에 나온 사람은 ‘가급적’ 함께 오라고 하셨던 거고요.”
“내가 가급적이라고 말은 했다만, 말할 때 힘을 줬던 것 같은데?”
“... 그게 뭐예요.”
심드렁한 아버지의 말에 도훈이 실소를 흘렸다.
도훈이 오늘 아버지 댁에 온 건 호출을 당해서였다.
월요일 저녁에 짧게 ‘해명’ 글을 올렸더니, 화요일 오전에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 내가 헷갈려서 묻는 건데, 그래서 사귄다는 거야 안 사귄다는 거야?
- 아, 그게 말이죠. 어, 그러니까···.
- ‘예’, ‘아니오’로 대답 못 하냐?
-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닌데요.
- ... 뭔 소리야, 그게? 사귀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모르겠고, ‘예’, ‘아니오’가 아니면 주말에 와서 얘기 좀 해 봐. ‘가급적’이면 그 처자랑 같이 와라.
분명, 아버지의 목적은 도훈이 아닌 세경을 보는 것이었을 터.
이제 서른여섯 된 장남이 몇 년간 ‘연애’는커녕 소개팅한다는 얘기조차 없다가 연애한다고 알려졌으니 얼마나 반갑고 궁금했겠는가.
벌통 돌보는 일을 마친 도훈의 아버지 김인식 씨가 모자를 벗고 도훈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예’야 ‘아니오’야?”
“음, 굳이 그렇게 말하자면 ‘예’는 아니지만 ‘예’에 가까운 상태라고 할 수 있죠.”
“뭐야 그게?”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아버지의 표정에 도훈이 담담히 설명했다.
도훈이 상대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건 맞지만, 그걸 본격적으로 키워가기엔 마땅한 환경이 아니라고.
현재로써는 상대가 도훈에게 확실한 호감을 갖고 있는데, 도훈의 그런 환경을 이해해주기로 했다고.
그래서, ‘확’하고 불타오르는 건 아니고 차분히 관계를 지속시키자는 데 서로가 동의했다고.
월요일 저녁 도훈의 해명 글은 사귀는 사이는 아니고 친한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사진이 찍혔을 뿐 연인은 아니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에 ‘뭐, 미래에 어떻게 될지는 저도 모르죠.’라고 적어 가능성을 열어두긴 했지만, 해명 글의 주된 내용은 직무 이외의 개인사에 관한 지나친 관심은 사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도훈의 짧은 설명을 들은 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 그럼 확실히 ‘아니오’는 아닌 거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 하, 그 처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성인군자인 건 분명하다. 이런 뜨뜻미지근한 놈을 이해하다니.”
“... 하하.”
“웃지 마, 인마. 내가 네 아버지가 아니라 그 처자 아버지였으면 넌 나한테 죽었어.”
“... 하.”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다가 굳어졌다.
해명 글은 간단했지만, 세경과 이 얘기를 하는 건 간단하지 않았다.
사실, 도훈도 ‘자신이 연애에 적극적일 수가 없는 형편’이라는 자신의 말을 세경이 쉽게 이해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었다.
십중팔구, 그녀가 도훈의 생각에 상처를 받고 두 사람의 사이가 완전히 공적인 것으로만 남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런 예상을 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따끔’ 했던 것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세경이 깊숙이 마음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세경은 도훈의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 경완 삼촌에게 듣기로, 거의 매일 야근에 주말에도 하루 이상은 출근하신다고 하더라고요. 시장 직분에 충실해지려고 그러시는 건데, 제가 방해물이 될 순 없죠. 저도 공무원인데. 편하게 생각하기로 해요, 우리.
여하튼,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우리 사귄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날까지 편하게 ‘~ing'를 해보기로 했다.
“그럼 나는 그 처자 언제 볼 수 있는 거냐?”
“... 때가 되면요?”
“그때가 언젠데?”
“저희가 서로 ‘사귄다’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을 때?”
“아, 그래서 그게 언제냐고! 볼 수 있긴 한 거야?”
“그거야 저도 모르죠.”
“아우, 속 터져!”
도훈의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월요일 저녁에 도훈이 해명 글을 올리자, 그걸 확인한 영배부터 비슷한 얘길 했었고 진주도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고 문자를 보냈었다.
정임은 아주 진지하게 ‘살다 보면 퀵스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짧게 조언하기도 했다.
사석에서는 친근하게 대하던 전경완 부시장이 좀 쌀쌀해진 것도 있었고, ‘-.-’라는 메시지인지 이모티콘인지를 보낸 강정문 도지사까지.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닌데···.’
- 그 입 다물어라. 인마, 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 네.’
조상님의 타박에 불만스럽게 대꾸한 도훈이 뒤늦게 뭔가를 떠올렸다.
“... 그런데, 아버지.”
“왜?”
“기사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모르지.”
“누구냐고 왜 안 물어보세요? 안 궁금하세요?”
아들의 질문에 도훈의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네 요즘 생활과 태도를 보면, 대흥시청 공무원은 아닐 것 같고 그래도 일로 만났을 게 확실한데···. 혹시 그 처자도 공무원이냐?”
“... 네.”
“흠. 기사에 묘령이 미인 어쩌고 했으니 미인일 것이고, 네 그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용인하는 걸 보면 성격은 부처님 못지않게 아주 인자할 것이고, 애초에 너 같이 멋대가리 없는 놈에게 호감을 가진 걸 보면 취향은 좀 특이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
아버지의 빈틈없는 추리에 도훈은 할 말을 잃었고, 말문을 잃은 도훈에게 아버지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라는데, 캐묻기도 뭐하고···. 너한테 용건 끝났다. 가서 일 봐.”
“......”
아버지가 도훈 앞을 지나쳐 갔고, 도훈이 그런 아버지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저 방금 왔잖아요!”
“몰라, 인마. 엄마한테 인사하고 가든지 말든지 네가 알아서 해! 이번만큼은 엄마가 너 반길 거로 생각하지 마라. 이 호랑 말코 같은 놈아.”
“......”
“에잉, 괜히 기대했네.”
“......”
도훈의 아버지가 투덜거리며 사라졌고, 뒷마당에 홀로 남겨진 도훈의 귓가에 벌들의 앵앵거리는 소리만 잔뜩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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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아버지에게조차 ‘찬밥’ 신세가 됐든 말든, 시간은 가고 5월이 왔다.
“오늘 저녁에 어린이집 학부모 대표와 면담이 있습니다, 시장님.”
“아, 그게 오늘이었나요?”
“네.”
대흥시가 새해부터 청소년 지원사업을 시작했는데, 몇 달 지난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롭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새로 시작한 사업이 차질 없이 정착함에 따라, 하반기부터 사업의 확대를 고민했는데 지원사업의 프로그램 확대냐, 아니면 지원 연령의 확장이냐를 놓고 고민하다 지원 연령 확장에 방점이 찍혔다.
다만, 국가에서 지원하는 어린이 수당이 있고 도에서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아기 수당이 있으니, 굳이 ‘수당’으로 한정하지 말고 학부모들의 다양한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장소는 운계면에 있는 커피숍으로 정했습니다.”
“식사 안 하고요?”
“아, 학부모 중 일부가 식사까지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느긋한 시간은 아닐 것 같습니다.”
두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아기들 데리고 나와야 하는 분들도 있다던데, 커피숍에 양해는 구했나요?”
“네. 마침, 커피숍 사장님도 오늘 미팅 참가 대상입니다.”
“오늘 담당 직원뿐 아니라 비서실 직원도 전부 참가하죠?”
“네.”
도훈이 미혼자에 육아 경험이 없으니, 전원 기혼자에 아이가 있는 비서실 직원들의 조언이 필요했다.
“한 가지 특기사항이 있는데요. 원래 계획보다 학부모들이 제법 많이 참여할 것 같습니다. 전해 듣기로는 서른 분은 가볍게 넘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정임이 말했고, 도훈은 살짝 놀란 표정을 했다.
참가 인원을 제한하지 않았지만, 원래는 10여 명 정도가 참가할 것으로 예상했었으니까.
“하실 말씀이 많으신가 보네요.”
“네. 그래서 담당 직원들이 긴장하고 있더라고요.”
“혹시 유아원이나 유치원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한 건 아닙니까?”
“그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흥시에는 사립 유치원도 있지만, 규모가 큰 공립유치원이 있었다.
가장 많은 아이가 다니는 곳이 공립이다 보니, 사립 유치원이 정부나 공공기관, 학부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횡을 부리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공립, 사립 다 포함됐죠?”
“네. 모든 유치원마다 학부모님이 참석할 수 있도록 담당자들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긴장하고 가야겠네요.”
“모두가 그래야죠.”
“조회, 이걸로 마칩니다. 저녁 미팅에 가기 전에 각자 자료 다시 한 번 숙지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회의를 마친 도훈이 시장실로 들어왔다.
책상에 놔둔 개인 핸드폰 액정을 보니 도연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 아, 계속 이렇게 나올 거야? 동생한테도 비밀로 하겠다 이거야? 이러다 나중에 강짜 부리는 시누이가 되는 수가 있어.
“...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
액정을 확인한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거렸다.
기사와 해명 글의 ‘배후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건 도연이도 마찬가지여서, 도대체 상대가 누구고 정확히 어떤 관계냐는 걸 궁금해했다.
도훈은 ‘네 일에나 신경 써라.’고 대꾸하고 말았는데, 도연이가 포기하지 않고 하루에 한 번씩은 메시지를 보내 재촉을 하고 있었다.
“제발 너라도 그냥 응원하는 수준에서 그쳐다오.”
해명 글이 나오기 전, 도연이가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일단 응원은 하는데···’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해명 글 이후, 주변 사람 전부가 도훈을 ‘듬직하지 못한 남자’라고 타박하는 상황에서, 동생이라도 그냥 응원만으로 그쳐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아마도, 도연이가 자세한 사정을 알면 가장 강력하게 도훈을 규탄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엄두가 안 나는 것도 있고.
“... 그나마 세경 씨가 이해해주는 게 다행이지.”
세경과의 통화 내용을 되새기는 도훈의 찌푸린 미간이 슬그머니 펴졌다.
하도 주변에서 타박을 들어서, 혹시 세경도 속마음으로는 도훈에게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통화했었다.
- 호호! 저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저는 시장님 믿어요.
다정했던 세경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얼굴을 편 도훈이 자리에 앉아 저녁에 있을 ‘학부모 미팅’의 준비자료를 손에 들었다.
이미 숙지하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학부모들의 참가 열기가 높다는 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터.
기본 자료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그런 학부모들과 차분하게 대화하기 어려울 테니.
“... 일을 열심히 해야 다른 것도 잘할 여유가 생기겠지.”
중얼거린 도훈이 서류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나름 충실하게 미팅을 준비한 도훈은 격한 고성이 오가고 지극히 혼란스러운 난장판의 한가운데 뛰어들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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