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9화 (120/279)

119. 원치 않은 스포트라이트 - 3.

4월 말, 대전의 한 스튜디오.

토요일 오전부터 시작된 어떤 촬영이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지고 있었다.

“자, 다시 가겠습니다. 하이~ 이, 큐!”

카메라 앞에 앉은 감독의 신호에 배우가 대사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

“새롭게 태어나는 젊은 충남, 봄기운, 사람 향기 가득한 충남으로 오십시오.”

“컷!”

CG를 위한 녹색 배경 앞에서 뻣뻣하게 대사 한마디를 한 남자.

“시장님, 잠깐 쉬었다가 다시 하겠습니다. 긴장 좀 풀고 다시 하죠.”

“... 네.”

불만족스럽다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감독의 말에 도훈은 ‘살았다’는 표정으로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표정으로 구석의 의자로 걸어간 도훈이 풀썩 앉자 감독 뒤에서 촬영을 구경하던 영배가 웃음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 감추지도 않은 얼굴로 다가왔다.

“큭큭, 그렇게 떨리냐?”

“... 떨리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네.”

“거 참 신기하네. 학교 다닐 때 발표수업 같은 건 멀쩡하게 했잖아.”

“...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그래서 그런가? 네 얼굴 장난 아니다. 큭큭큭.”

“... 내 얼굴이 어째서?”

“화장실 가서 힘주는 얼굴이야.”

“... 쩝.”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도훈을 보며 영배가 실실거렸고, 도훈이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내자 미소를 싹 지우고는 입을 열었다.

“사실, 난 좀 기쁘다.”

“... 뭐가?”

“너도 사람이구나, 싶어서.”

“... 뭐?”

영배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안 그래도 작던 목소리를 더 죽여 속삭였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장이 된 것도 솔직히 말이 안 되는 얘긴데, 그걸 너무 잘 해내는 건 더 말이 안 되지. 산처럼 쌓이는 서류를 소화하고 남들은 기억도 못 해내는 예전 케이스를 떠올려서 적용하질 않나. 비리도 막 잡아내, 시의회에서 시비 거는 시의원을 말로 발라버리질 않나.”

“......”

“아무리 내가 널 10년 넘게 알고 지냈고 ‘천재’ 비슷한 면이 있는 걸 알고 있었어도, 그런 걸 보니 이게 정말 사람 맞나 싶은 기분이었거든.”

“......”

“그런데 오늘 보니까 너도 못 하는 게 있긴 있구나 싶다. 하하.”

“... 실없기는.”

도훈의 말에 영배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었다.

한 줄짜리 대사를 읊기만 하는 장면을 네 번의 시도 끝에 ‘쉬었다 하자’는 얘기를 들은 도훈.

그 전 장면도 네 번의 시도 끝에 겨우 통과했다.

대사가 긴 것도 아니고 움직임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몇 걸음 걸으며 두 줄짜리 대사를 ‘담담한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말하는 게 전부.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연기자들이 보면 비웃어도 한참을 비웃을 듯한 이 촬영이 도훈은 정말 곤혹스러웠다.

그랬다.

도훈은 지금, 충청남도의 관광지, 축제, 특산물, 맛난 음식 등을 홍보하는 광고 영상의 일부를 찍고 있었다.

“감독이 네 로봇 연기에 불만인 건 아니래.”

“응?”

“정확히는 네 로봇 연기에 ‘만’ 불만인 건 아니래.”

“... 또 뭐가 있는데?”

“네가 평일에는 촬영 못 한다고 한 거.”

“... 그게 왜?”

“잘은 모르겠지만, 토요일용으로 다른 계획이 있었다거나 한 거 아니겠냐? 한두 줄짜리 대사 읊는 4컷을 토요일 오전에 찍고 있는 게 원래 계획은 아니었다는 거겠지.”

“시장씩이나 되어서 시와 관련된 일도 아닌 걸 평일에 업무 팽개치고 할 수는 없잖아. 애초에 광고에 출연하기로 할 때 미리 못 박았던 거 아니야.”

“그거야 도청 홍보기획팀장이 수용한 거고 저 감독이 수용한 건 아니잖아.”

20일쯤 전, 도청 홍보기획팀장의 공익광고 출연 섭외.

당연하게도, 도훈은 즉시 거절했었다.

홍보기획팀장에 이어 도지사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왔지만, 그 역시 도훈에게 ‘Yes’라는 답 대신 ‘NO!!!’라는 확고한 답을 들었을 뿐.

비서실장 다음으로는 도지사가 직접 전화할 줄 알았는데, 예상 밖으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권대사’를 보냈다.

그 다음 날 오후, 도청 홍보기획팀장과 함께 민세경이 대흥시청에 나타났던 것.

도지사의 뜻을 전하겠다는 민세경의 말은 이랬다.

- 도지사님은 이번 광고에 출연하실 계획이 애초에 없으셨어요. 지자체 광고 내보내면서 은근슬쩍 단체장 출연하는 걸 예전부터 꼴불견이라고 생각하셨다네요. 그런데, 광고 컨셉에 김 시장님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시긴 하셨대요. 35세, 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 강렬하다나요? 그래도 아마 김 시장님이 거절할 거로 생각하시고 말도 안 꺼내려고 하셨는데, 최근에 시장님이 ‘핫’해지시니까 공보실에 시도는 해보라고 하셨다네요. 자신이 나서면 역효과 날 거라고 하셨다던데요?

도훈이 어이없어하자 민세경이 말을 이었다.

- 정 안 내키신다면 다른 대안 찾으시겠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 말씀은 전하라고 하시대요. 이거 방송에 나오고 또 나오는 그런 광고 아니에요. 대중에게 엄청 노출되는 그런 성격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목적이 분명해요. 충청남도에 투자가 됐든 관광객이 됐든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죠. 그 득은 대개 도민들이 볼 거고요. 출연료도 많이 못 드려요. 한, 3백?

담담한 도훈에게 민세경이 화사하게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 도지사님은 시장님이 출연하시면 광고의 효과가 커져서 도민이 실질적으로 이득을 볼 거로 생각하고 제안하시는 거예요. 일체의 다른 고려 없이요.

이어진 홍보기획팀장의 의례적인 말은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한된 예산 대비 홍보 효과 어쩌고 하는 말에 도청 담당팀이 몇 번을 고려해도 도훈이 가장 낫다는 그런 말.

회의를 마치고 홍보기획팀장이 먼저 일어났고, 부시장을 만나고 갈 생각이라는 세경에게 도훈이 물었다.

- 이 광고··· 하는 게 정말 좋겠습니까?

- 제 생각을 물으시는 거죠?

- 네.

- 저는 좋을 것 같아요.

- 이유는요?

- 음, 우선 시장님 개인이 돋보이기 위해서라면 요즘 같은 때 다른 방법이 아주 많겠죠. 하지만, 그럴 마음 없으시잖아요. 그럴 때 공익광고에 출연하는 건 그걸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요? 더불어 공식 SNS 계정에 그런 글 하나 올리시면 사람들도 이해할 거고요. 거기에 시장님 덕분에 우리 공익광고는 좀 더 돋보이지 않을까요? 호호!

결국, 도훈은 하루 고민하고 비서실과 공보팀 직원 전원을 모아 회의를 한 끝에 공익광고 출연을 허락했다.

세경의 제안대로 SNS 계정에 이런 글도 올렸다.

- 현재 저는 시민을 위해 일하고 시민에게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관심, 대흥 시민을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갚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이후, 대흥시청에 도훈을 섭외하겠다는 전화는 많이 줄긴 했어도 계속 이어졌지만, 시청 청사 앞에서 ‘뻗치기’ 하던 기자들은 곧 없어졌다.

때마침, 시청 직원 하나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눈빛으로 현관 인근을 배회하는 기자들의 사진을 SNS에 올리고 ‘겁 나서 일을 못 하겠다’는 하소연을 하자, 네티즌들이 엉뚱한 사람 일 못 하게 괴롭히지 말라고 기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에.

일부 네티즌이 대흥시청 청사 앞에 기자 배치한 언론사가 어딘지 알아내 항의하자고 하는 통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지켜보며 도훈을 노리는 이들은 아직도 있었지만, 최소한 드러난 곳에서 도훈을 ‘덮치는’ 그런 기자는 없었다.

여하튼 그 결과, 오늘 이렇게 ‘힘이 가득’ 들어간 얼굴로 연신 감독에게 ‘다시’, ‘한 번 더’라는 소리를 듣는 중이고 말이다.

“휴우.”

한숨을 내쉬는 도훈에게 영배가 물었다.

“왜?”

“... 이왕 CG 쓸 거면 그냥 나까지 CG로 하면 안 되나?”

짧게 멘트만 하면 되는 장면이지만, 아직 세 컷이 남았다.

질려 하는 도훈에게 영배가 간신히 웃음을 참고 답했다.

“그런 CG랑 따로 찍은 영상 붙이는 CG는 차원이 다를걸?”

“... 휴우.”

다시 한숨을 내쉬는 도훈의 귓가에 스텝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촬영 재개하겠습니다!”

“... 네.”

스태프에게 답한 도훈이 몸을 일으켜 다시 녹색 배경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은 느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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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 정말요? 아깝다! 조금만 일찍 올걸!”

“... 왜요?”

드디어 해방이라는 걸 얼굴에 그대로 드러낸 도훈의 질문에 세경이 히죽 웃고는 답했다.

“시장님이 로봇 연기라니, 상상이 안 가요. 너무 궁금해요!”

“... 광고 나오면 보세요. 감독님이 더는 안 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오케이 하신 것들이니까요.”

“설마요?”

“진짭니다.”

“아우! 일찍 왔어야 했어!”

영배의 말에 세경이 정말 아쉽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고, 도훈은 헛헛한 표정으로 영배는 웃겨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세경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생각도 못 하고서.

‘얼마나 귀여웠을까! 어휴! 조금만 서두를걸!’

촬영이 끝난 건 정오가 막 지났을 무렵.

그리고 세경이 촬영장을 찾은 건 아침 일찍부터 도훈을 챙기러 와있던 충남도청 홍보기획팀 직원 둘이 복귀한 직후였다.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는 도훈을 흘끔 하며 영배가 세경에게 말했다.

“아마 월요일 도청에 가면 김 시장 소문 파다하게 퍼질 겁니다.”

“무슨 소문요?”

“로봇 연기도 그런 로봇 연기가 없었다고요.”

“하하하!”

영배의 말에 악의 없이 웃는 세경의 모습에 도훈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끔찍했는데 뭐···. 더 끔찍한 건 내가 이 판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는 거고.’

어쨌거나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도훈은 영배, 세경과 함께 촬영장을 나섰다.

도훈이 평정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세 사람은 촬영장 인근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도훈이 촬영하는 동안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을 커피 한 잔으로 회복하는 사이, 영배는 촬영장에서의 도훈의 모습을 ‘실감 나게’ 설명하며 세경을 웃기고 있었다.

그러길 얼마.

“점심 뭐로 드실래요?”

“... 글쎄요. 지금 당장은 뭘 먹어도 맛이 다를 것 같지가 않습니다. 똑같을 것 같아요.”

“무슨 맛일 것 같은데 그러세요?”

“아주 쓰고 떫은 맛이요.”

“어휴, 정말 힘드셨나 봐요.”

“... 조금요.”

“어떡해요. 제가 괜히 시장님 설득했나 봐요. 이렇게 힘들어하실 줄 몰랐어요.”

“... 저도 제가 이렇게 힘들게 될 줄 몰랐습니다.”

세경은 이제야 ‘로봇 연기’ 얘기가 1%의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채고 있었다.

그녀의 방문 목적은 애프터 서비스.

강정문 도지사의 전권대사로 도훈의 공익광고 출연을 성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실제 촬영이 이루어지는 오늘 도훈에게 밥을 대접하는 게 목적이란다.

‘시작’을 책임졌으니 ‘끝’도 책임지라고 했다나?

“접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공금으로 처리할 거 아니니가 뭐가 됐든 양껏 드셔도 돼요.”

“... 하하.”

강정문의 개인 카드를 받아왔다는 세경의 말에 아직 촬영의 여파를 다 털어내지 못한 도훈이 힘없이 웃었고, 영배가 몰래 의미심장한 표정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저는 눈물을 무릅쓰고 빠져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왜요?”

“결혼해서 애가 둘이나 있는 사람이, 평일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연속해서 토요일 낮에 집에 없으면 쫓겨납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출근했었거든요.”

“아, 예.”

영배의 말에 세경은 아쉬움 1, 반가움 99인 표정을 했다가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가게?”

“어, 가야지. 안 그래도 와이프한테 끝나자마자 어디로 안 새고 곧장 귀가한다고 약속하고 왔어.”

“... 흠.”

도훈은 좀 미심쩍다는 표정을 했는데, 영배는 그걸 모른 척하고 작별인사를 했다.

“과장님, 다음에 또 봬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조 비서관님.”

“뭐 타고 가려고?”

“저 앞에서 좌석 버스 타면 돼. 넌 내 걱정하지 말고 비싸고 맛있는 거 먹어라. 알았지?”

“... 어.”

영배가 자리를 떴고, 도훈과 세경은 얼마간 더 카페에 머물렀다.

눈을 감고 명상하는 듯한 도훈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세경은 카페 유리 벽 너머 봄 햇살이 쏟아지는 걸 조용히 감상했다.

화창한 봄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길거리에는 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세경의 눈에는 그중에서도 정답게 대화하며 ‘찰싹’ 붙어 이동하는 커플만 보였다.

‘... 부럽다.’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도훈을 흘끔 한 세경이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릴 때였다.

“이제 다 됐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좀 더 쉬셔도 되는데···.”

“정말 괜찮아졌어요, 이제.”

대충이나마 멘탈을 수습한 도훈이 웃었고, 세경도 담담히 미소 지었다.

“정말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비싼 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하하, 네. 도지사님 월급 많이 받으시잖아요.”

“흠, 그럼 이 근방에 비싸고 맛있는 집 좀 찾아볼까요?”

“그럴까요?”

마주 앉은 도훈과 세경이 제각기 핸드폰을 꺼내 들고 맛집 검색을 시작했다.

“여긴 어떠세요?”

“흠, 좋네요. 전 이런 델 찾았는데···.”

머리를 맞대고 점심을 해결할 곳을 찾는 두 사람은 언뜻 보기에 아주 다정한 커플처럼 보였다.

그런 도훈과 세경에게 포커스를 맞춘 채 누군가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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