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원치 않은 스포트라이트 - 1.
며칠 뒤, 대흥시청 시장실.
자신의 책상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도훈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 나쁜 소식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의사가 치료 전망을 높게 점친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 네. 저희도 그런 심정이에요. 아까는 청천벽력이었는데··· 의사 선생님께 끝까지 얘기를 듣고 나니까 좀 진정이 됐어요.
“네. 기운 내십시오. 응원하겠습니다.”
- 고맙습니다, 시장님. 시장님 덕분에 아버님을 병원에 모시고 올 마음을 먹었으니까요. 아, 잠시만요. 남편이 인사드리고 싶다네요.
“그러실 것 없···.”
도훈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 상대가 바뀌었고, 남자의 머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저, 서경식입니다.
“김도훈입니다.”
- ... 며칠 전에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 ......
담담한 도훈의 말에 상대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 ... 덕분에 아버지 병을 일찍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네, 기운 내세요.”
- ...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핸드폰을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도훈이 의자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겨 시장실 문을 열었다.
벌떡.
집중 못 하고 있던 영배가 벌떡 일어났고, 두진과 정임의 시선도 도훈을 향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MRI 검사 결과, 서민우 씨 뇌종양이 맞다고 합니다.”
“... 아이고.”
“후우.”
“어떻게 해요.”
안타까워하는 직원들에게 도훈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다행인 건, 의사가 장담은 못 해도 치료 성공 가능성이 클 것 같다고 평가했다는 겁니다. 뇌종양은 맞지만, 아주 비관적인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럼···?”
“네. 곧바로 입원하시고 치료에 들어가실 거라네요. 주내에 수술도 받으실 것 같고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며칠 전 도훈과 통화한 서경식 부부는 지난 주말 대흥시에 내려왔다.
갑자기 나타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자는 아들 부부의 말에 서민우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단다.
아들과 며느리가 물러서지 않고 병원에 가자는 얘기를 계속하니, 서민우는 벌컥 화를 냈고 고성이 오가는 말싸움이 이어졌다.
하지만, 장남 부부는 물러서지 않고 천안에서 대학에 다니는 둘째 딸까지 불러서 주말 내내 서민우와 설득 겸 말싸움을 했단다.
월요일인 오늘, 아들과 딸이 직장과 학교에 가지도 않고 버티자 서민우는 끝내 항복하고 대전으로 검사를 받으러 갔다.
MRI 검사결과는 뇌종양이긴 한데, 치료 성공 확률이 높을 것 같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분 정보를 모은 루트를 통해 지인들에게 알리세요. 단순히 뇌종양이라고만 알리지 말고 치료받고 회복하실 수 있을 확률 크다는 말도 함께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서민우의 소식을 전한 도훈은 영배를 시장실로 불러 따로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거면 충분할까?”
“일단은. 생각해 봤는데 이 이상은 좀 오버하는 것 같아. 그분과 우리 사이에 유쾌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술받고 퇴원하신 다음에 기회가 있겠지.”
“하긴, 생각해보면 그 양반이 네 얼굴에 고추장 푼 물뿌린 게 며칠이나 됐다고.”
“... 하하.”
“뇌종양 수술받는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잘은 몰라도 아마 아닐걸? 그게 왜?”
씨익.
의미심장하게 웃는 영배에게 도훈이 다시 물었다.
“뭔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 양반, 수술받고 예전 상태로 돌아가도 자신이 민원실에서 행패 부린 거 하고 너한테 한 짓은 기억할 거 아니냐? 그때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서···.”
“나, 원···. 별 시답잖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도훈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영배가 밖으로 나갔고, 도훈이 의자에 앉아 책상 위의 서류를 집어 들며 작게 중얼거렸다.
“... 수술 잘 됐으면 좋겠네.”
사람 인연이란 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악성 민원인과 그를 상대해야 하는 직원들 대신 나선 도훈의 인연도 보통은 아닐 터.
단 두 번, 그것도 아주 짧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하게 만났던 사람이었지만 도훈은 그와 세 번째 만남이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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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도훈과 영배의 단골집인 중국관.
오래간만에 단둘이 술자리를 갖는 도훈과 영배였지만,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떠드는 대신 TV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TV에 정신이 팔린 건 도훈과 영배만이 아닌 다른 손님과 주인장도 마찬가지.
공중파 방송 전국 뉴스에 대흥시 얘기가 나오고 있었으니까.
- 이때 까지만 해도 서 모 씨는 시청에 막무가내로 떼를 쓰고 그 와중에 폭언을 일삼는 악성 민원인의 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기자의 멘트에 이어 자료 영상이 나왔다.
- 야, 이 ‘삐이’들아. 네까짓 ‘삐이이’들이 시민이 해결해 달라는 일을 언제까지 무시할 건데? 이러고도 니들이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사는 공무원이냐? 응? 이 ‘삐이’들아!
익숙한 대흥시청 1층 민원실, 그것도 한참 사람도 많은 곳에서 막무가내로 악담을 퍼붓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서민우.
모자이크로 얼굴이 가려졌고, 욕설은 ‘삐’ 처리가 됐지만 ‘진상 중의 진상’짓을 하고 있는 걸 알아보기에는 충분한 영상이었다.
“저거 민원실 노성철 주무관이 찍은 영상이래.”
“... 어떻게 그것까지 알아?”
“오후에 잠깐 마주쳤는데, 자기가 증거자료로 쓰려고 찍은 거 뉴스에 나올 거라고 들떴더라고···.”
“... 들뜰 일도 참 없네.”
- 이렇게 서 모 씨의 지나친 행동은 석 달이 넘게 계속됐고, 보다 못한 시장이 나섭니다. 계속 민원실에서 폭언을 퍼부으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격분한 서 씨는 시청을 고소하려고 변호사를 알아봤지만, 건물 상수도를 수리할 책임이 시청에 없으니 응하는 변호사가 없었습니다. 대응방침을 결정하지 못한 서 모 씨는 우연히 주민 나눔 장터에서 시장을 봤고, 시장의 얼굴에 오물을 뿌리기까지 합니다.
“... 헐?”
도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된 건, 머리와 얼굴에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사진이 화면에 등장했기 때문.
“... 저건 또 어떻게 구했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도훈과 영배가 작게 속삭였고, 저만치 떨어진 카운터에서 TV를 보던 중국관 사장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쯧, 아무리 화가 나기로서니 먹는 거로 저런 짓을···.”
- 웬만한 사람도 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대흥시장과 시청은 곧바로 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우연히 서 모 씨의 건물에 세 든 음식점 사장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가 갑자기 너무 변했다는 얘기였습니다.
도훈에게 서민우가 갑자기 확 변했다는 얘기를 처음 해줬던 순댓국집 사장이 등장하고, 기자가 짧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이번에는 한 병실이 화면에 등장했다.
그리고 병실 구석 자리 선반에 올려진 작은 화분에 포커스가 맞춰졌다.
- 쾌유를 빕니다. 대흥시청 직원 일동.
도훈이 영배에게 지시해 보낸 물건.
화분에 달린 리본의 글씨가 잠시 화면에 크게 잡혔다가 사라지고 대흥시청을 배경으로 선 기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 뇌종양 판정을 받은 민원인 서 모 씨는 어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입니다. 다행히 발견이 빠른 편이라 회복을 낙관한다고 가족들은 전해왔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른바 ‘묻지 마’ 폭력사건이 심심치 않게 발생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보복성 난폭운전으로 인한 사고도 종종 뉴스로 전해집니다. 인심이 메말랐고 정이 없어졌으며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언, 폭행을 저질렀던 사건을 저 스스로도 자주 보도해왔습니다. 그래서인지 폭언과 폭행을 저지른 악성 민원인에게 법으로 대응하기 전에, 원만한 해결을 위해 그 민원인의 주변을 살핀 대흥시장과 시청 공무원들의 대처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그 작은 관심이 민원인 서 모 씨가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걸 밝히는 데 크게 기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매사에 무조건 참으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른바 갑질 같은 경우에는 인내가 답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작은 관심이 소중한 생명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 할 교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상, 대흥시에서 NBC 뉴스 임현수였습니다.
짝. 짝. 짝!
짝짝짝!
짝짝짝짝짝!
화면은 이미 다른 뉴스로 넘어갔지만, 중국관 사장을 비롯한 손님들이 도훈과 영배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잘하셨어요, 시장님.”
“훌륭했어요, 시장 양반.”
“여어, 우리 시장님 대인이네.”
손님들의 박수는 도훈과 영배가 머쓱한 표정으로 일어나 인사한 뒤에야 멎었고, 겸연쩍은 표정이 된 두 사람에게 중국관 사장이 다가왔다.
“우리 김 시장, 또 뉴스 탔네.”
“... 저는 안 탔습니다. 제 얼굴 안 나왔잖아요.”
“하하, 이름은 언급됐잖아. 나쁜 일도 아니고 좋은 일로 말이야.”
“사실, 저건 좀 왜곡인데···.”
“응? 뭐가?”
“저희가 무작정 참은 게 아니거든요. 법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한 번 숨 고르기를 한 정도죠. 가족들을 통해서도 진정을 못 시켰더라면 그땐 고소했을 겁니다.”
“에이, 안 했잖아.”
“... 하려고는 했다니까요.”
“하하. 끝내 안 했잖아. 그럼 됐지, 뭐. 안 그래?”
“맞습니다, 하하!”
“계속 이렇게만 해. 하하!”
함박웃음을 지은 사장이 도훈과 영배에게 소주 한 잔씩을 따라주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 뭐가 좋다고 웃어?”
도훈이 웃는 영배에게 쌀쌀맞게 묻자, 영배가 소주잔을 집어 들며 답했다.
“내가 홍보에 신경 쓰는 사람 아니냐. 최근에 이렇다 할 홍보 거리 없이 조용해서 찜찜했는데 이걸로 그 찜찜함이 싹 날아갔으니 왜 안 좋겠냐.”
“... 좋을 것도 없네.”
“하하, 공교롭게도 며느리 오빠가 NBC 기자일 줄이야. 이게 다 복이다, 복.”
“복이 아니고 운이야, 운. 그리고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운.”
서경식의 아내는 평범한 주부였지만, 그녀의 친정 오빠가 NBC 기자였다.
동생을 통해 이 이야기를 알게 된 기자는 동생 부부의 동의를 받은 뒤 취재에 나섰다.
그래서 지역 언론사나 방송국에서도 모르고 넘어간 이번 일이 공중파인 NBC에 보도된 것이었다.
“휴우.”
미간을 찌푸린 도훈이 연신 한숨을 내쉬자 영배가 물었다.
“그렇게 싫어?”
“싫다기보다는 탐탁잖다고 하자. 그리고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어.”
“걱정? 뭐를?”
“도연이.”
“... 아.”
“휴우.”
영배가 깨달음의 시간을 갖는 순간, 도훈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도연이 역시 공중파 방송국 사회부 기자다.
그녀가 시장인 오빠를 통해 득을 보려 한 적은 없지만, 기사 욕심은 기자라면 누구나 가지는 것일 터.
자기도 모르는 오빠의 일이 ‘미담 기사’로 타 방송국 뉴스에 독점으로 나갔으니 어떤 기분이 들까.
“네가 먼저 기사화되길 원한 거 아니잖아.”
“그게 중요하겠어?”
“... 안 중요할까?”
“당연하지.”
아니나 다를까.
위이이잉.
“... 메시지 왔다.”
“알아.”
도훈이 엎어놨던 개인 핸드폰을 뒤집어 액정을 톡 건드리자 도연이가 보낸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이 대왕 치사빤스야!
짧지만, 강렬한 일격.
뭐, 이 메시지 말고 도연이가 도훈을 더 탓하는 일은 없겠지만, 한동안 삐져있을 건 분명했다.
“... 그래도 생각보단 양호하네.”
“형이야 자기 동생 아니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얘 분명히 한번은 이거 써먹을 거란 말이야.”
“... 하하, 건투를 빈다.”
투덜대는 도훈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대꾸한 영배가 소주잔을 내밀었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 건배.”
챙.
“크으!”
소주를 단숨에 비운 도훈이 안주로 시킨 양장피를 집어 먹고 입을 열었다.
“이거 그냥 스쳐 지나가겠지? 뉴스거리라고 할만한 것도 아니잖아.”
“나야 모르지.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렸겠지.”
“... 저 방송국 뉴스 시청률 낮잖아?”
“그랬지. 한때는 최고였지만, 요즘은 아니지.”
“... 그걸 위안 삼아야 하나?”
“뭐, 두고 보면 알겠지. 난 아무리 시청률이 낮아졌어도 괜히 공중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만···.”
“... 에휴.”
한숨을 내쉰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짧은 뉴스 꼭지였을 뿐이니까, 제발 여파가 더 커지지 말아야 할 텐데···.’
간절하고도 간절한 도훈의 이 희망은 여지없이 산산조각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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