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4화 (115/279)

114. 악성 민원인 - 2.

4월의 첫날, 다행히 하늘은 맑았고 공기는 포근했다.

미세먼지 농도도 ‘보통’이라 야외 활동을 하기에 무리가 없는 그런 날씨.

나눔 장터가 열리는 옛 주민센터와 주차장 자리에 새벽부터 설치한 천막이 질서정연하게 자리한 가운데,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 일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평일인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시장님.”

점심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장터에 나와 본 도훈과 두진은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훈과 영배의 말에 두진이 웃으며 말했다.

“제 생각에는 주민들이 이런 행사에 목말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시에 축제도 없고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행사가 있는 것도 아니죠. 그리고 수요일마다 열리는 장날도 그리 규모가 크질 않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뭔가 북적북적하게 사람이 모일 기회가 거의 없으니 이번 장터가 주목받은 것이겠죠.”

“흠, 정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매대 하나가 천막 하나씩을 차지해 전체 천막의 수는 딱 50개.

그중 외부 상인이 차지한 건 20개였고 나머지 전부가 대흥시 주민들이 신청한 것들이었다.

어느 아파트 부인회에서는 김밥과 떡볶이를 만들어 팔고 있었고, 작은 조기축구회 플래카드가 붙은 천막에서는 조기 축구를 할 것 같지 않은 아주머니들이 잔치국수가 맛있다며 손님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운계면 주민들만 매대를 배정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니라서, 유서면 할머니들이 봄나물 좌판을 벌인 곳도 있었고 금선면 군인아파트 단지 주민회가 차지한 천막도 있었다.

대흥시 공무원 노조 지부가 직원들로부터 기부받은 온갖 중고물품을 진열한 두 개의 천막을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 이거 사용료 내는 것 맞죠?”

“하하, 네. 주민은 하루 3만 원, 상인은 하루 5만 원인 걸로 압니다.”

“지금 보니 다들 다행히 사용료 이상은 버시겠어요.”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하하.”

천막사용료와 청소비 등의 명목으로 받기로 한 돈은 전액 새 주민센터 안에 마련될 어린이 도서관 도서 구매비로 쓰일 예정이었다.

다행히, 천막을 사용하겠다는 신청은 진즉에 꽉 차서 나눔 장터 준비와 진행을 담당하는 운계면 주민센터 직원들이 행사의 성공을 일찍부터 점치기도 했었다.

“안녕하세요, 시장님.”

“네, 안녕하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아이고, 시장님도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자신을 알아보는 이들과 인사하며 걸음을 옮기던 도훈은 장터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웃거나 즐거운 표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역시··· 기공식 대신 나눔 장터 하길 잘했네.’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기념하고 축하하는 행사,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다면 그 방식을 무슨 무슨 ‘식’으로 제한할 필요가 없지. 이게 훨씬 낫다.

‘그러니까요.’

- 뭐, 도지사나 국회의원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 네.’

도훈이 판단하기에 강정문 도지사나 김용진 의원이 기공식 안 한다고 불쾌해할 것 같지 않았지만, 설사 불쾌해하더라도 보여주기식 기공식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치인이나 관련자들이 생색내기를 할 사진 찍는 것보다는 주민들이 즐거워하는 게 백배 천배 나은 일이니까.

그렇게 도훈이 조상님과 대화하고 있는데 영배가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시장님. 우리도 이젠 뭐 좀 먹죠? 여기서 점심 먹기로 했잖습니까.”

“그렇죠. 뭐 먹을까요?”

“흠, 잔치국수도 좋을 것 같고···. 아, 저기 카레밥이나 짜장밥도 있네요. 만두도 있고··· 생각보다 먹거리도 푸짐한데요?”

“흠, 오늘은 각자 원하는 것으로 먹어도 되겠습니다.”

“그럴까요? 그럼 티켓 한 장만 주세요.”

영배의 말에 도훈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고, 영배가 물었다.

“... 왜요?”

“티켓 내 거 한 장밖에 안 남았는데요?”

“네? 10만 원어치 사신 거 아니었어요?”

나눔 장터 홍보도 할 겸, 주민 대표와 주민센터 직원으로 구성된 준비모임에서 장터에서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팔았다.

그 티켓 수익 역시 센터에 마련될 주민 복지 공간 물품 구매비로 전액 사용될 예정이었는데, 도훈은 1만 원짜리 9장, 5천 원짜리 2장을 샀었다.

“나머지는 도지사님하고 김용진 의원 사무실에 4만5천 원어치씩 보냈어요. 초대장 대신에.”

“......”

“조 비서관도 티켓 샀잖아요?”

“... 전 와이프 줬죠. 실장님 혹시···.”

“나도 내 거 한 장 남기고 와이프 줬어.”

“아, 예.”

“자네는 현금 내고 사 먹어. 어차피 우리 밥값이야 항상 더치페이 아닌가.”

“... 하하, 쩝.”

두진의 말에 영배가 입맛을 다셨고, 세 사람은 제각기 먹고 싶은 걸 사서 한쪽에 준비된 좌석에서 만나기로 했다.

‘... 두 사람이 직접 오진 않겠지?’

티켓을 보냈지만, 도지사와 국회의원은 안 그래도 바쁜 사람들이니 직접 나타날 거라는 기대는 안 했다.

‘뭘 먹나···?’

“국밥이 제일이에요!”

“김밥 끝내줍니다!”

“카레 라이스 있어요! 사골국물로 맛 낸 카레 라이스요!”

“만둣국 드세요! 직접 빚은 만두로 만들었어요.”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대에서 손님을 부르는 주민이나 구경하는 주민이나 다 즐거워 보였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끼어 먹거리 부스를 돌며 도훈이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잉! 위이잉!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시장님. 저 민세경이에요.

“아, 과장님. 안녕하세요. 어쩐 일이십니까?”

- 호호, 저 대흥시에 왔어요.

“네? 무슨 일로요?”

- 논산시청에서 회의가 있어서 직원하고 같이 가는 길이었는데 도지사님이 가다가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장터 티켓을 주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 장터 입구요. 와, 사람 정말 많네요.

“하하. 네, 다행히도 그렇네요. 마침, 저도 장터에 있습니다.”

- 어머, 정말요? 혹시 점심 아직 안 드셨으면 저희랑···.

“네. 저도 아직 점심 전입니다. 오세요. 같이 드시죠.”

세경이 반색한 목소리로 위치를 물었고, 도훈이 위치를 알려줬다.

입구 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도훈의 시야에 저만치서 인파를 뚫고 다가오는 세경의 모습이 보였다.

“여깁니다.”

도훈이 세경에게 손을 흔드는 순간.

“어이, 시장 양반.”

갑자기 등 뒤에서 누가 불러 도훈이 상체를 돌리는데···.

촤악!

“꺄악!”

“엄마!”

“어머머!”

“앗, 차거! 뭐, 뭐야?”

도훈이 얼굴에 뭔가 차가운 액체를 뒤집어썼고, 그 액체는 도훈의 얼굴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굳어진 도훈의 곁에서 황급히 물러났고, 도훈은 눈가를 훔치고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도훈의 눈앞에 서서 속 시원하다는 듯 웃고 있는 사람은 지난주 그가 직접 만났던 민원인이었다.

“하하하! 꼴 좋다! 하하하하!”

“......”

도훈의 상의가 붉게 물들고 머리에서 붉은 기운이 감도는 물이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옆의 매대에서 사람들이 얼른 다가왔다.

“어쩜 좋아! 이걸로 닦으세요!”

“어머, 어머!”

“아이고, 이게 뭐래요. 괜찮으세요, 시장님?”

“... 네, 괜찮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사람들이 도훈의 얼굴과 상체를 닦는 그 순간에도 도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인사할 뿐 민원인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시장님!”

둘러싼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타난 영배가 도훈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벌컥 화를 내며 민원인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척.

도훈이 손을 들어 영배의 팔을 붙들고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관두세요.”

여전히 머리에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몰골로 도훈이 차분히 말하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영배가 의기양양한 민원인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미안한테, 집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 네, 가시죠.”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여러분.”

영배에게 속삭인 도훈이 놀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사과하고는 자리를 떴다.

입구를 향해 움직이던 도훈은 채 몇 걸음 걷지 않은 곳에서 다시 멈춰 섰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린 세경의 앞이었다.

“먼저 드시고 계세요. 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 네.”

울 듯 말 듯 한 표정의 세경에게 아무 일 없다는 듯 담담히 웃어 보인 도훈이 걸음을 옮겼다.

세경은 물론 많은 사람의 시선이 그런 도훈의 뒷모습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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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이른 오후 시청 비서실.

소파에 앉은 도훈이 영배에게서 뭔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서민우 씨는 물리적 충돌 없이 행사장을 떠났답니다.”

“다행이네요.”

“아이고, 다행은요.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는 시민들과 싸우려는 걸 행사장 통제하던 주민센터 직원이 간신히 말리고 끌어냈대요.”

“......”

“시장님이 행사장 떠나자마자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하고 욕하고···. 하여간 잠시 떠들썩했다고 하더라고요.”

“... 네.”

도훈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두진이 미안하고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고추장 물벼락을 맞은 도훈이 씻으러 자리를 뜰 때까지도 행사장 반대편에 있던 두진은 그 일을 모르고 있다가 도훈이 자리를 비운 다음에야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 괜찮으십니까?”

“네. 멀쩡합니다, 실장님. 냉수에 고추장 푼 물일 뿐이었는데요.”

서민우라는 이름의 민원인이 도훈의 얼굴에 뿌린 것은 다행히도 독극물이나 오물이 아닌 행사장에서 제공되던 냉수에 양념으로 나온 고추장을 푼 물이었다.

애초에 붉은 고추장 물벼락을 맞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 이외에 다른 피해는 없었다.

물론 도훈의 곁에 있다가 고추장 물벼락이 튄 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정임 씨랑 홍 주무관님도 내일은 장터에 가보세요. 음식 맛있더라고요.”

“... 네.”

집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도훈은 세경에게 말한 것처럼 금방 돌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도훈이 고추장 물벼락을 맞는 걸 본 매대의 시민들이 딱하게 바라봤고, 장터를 통제하던 직원들이 미안해 죽으려는 표정으로 사과했으나 당사자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냥 웃어넘겼다.

지금 정임과 영진을 향해 담담하게 웃는 것과 똑같이.

“... 그냥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이거는.”

“......”

“제가 알아보니까, 이거 폭행입니다, 폭행!”

생각만 해도 화가 난다는 듯한 표정의 영배의 말에 도훈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지만, 다른 직원 모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얼마간 말없이 생각에 잠겼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 한번은 참죠.”

“시장님!”

“그만.”

벌컥 목소리를 높이는 영배를 말리고는 도훈이 말을 이었다.

“민원실 직원들은 그분에게서 온갖 폭언을 들으면서도 석 달이 넘게 참았습니다.”

“... 그거야···.”

“좀 더 일찍 나서주지 못한 것에 대해 벌 한 번 받았다고 칩시다.”

“......”

“물론, 두 번 받지는 말고요.”

“......”

차분한 도훈의 말에 영배는 물론, 모두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두진이 입을 열었다.

“시장님이 참으신다고 그 민원인이 달라질 것 같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그렇겠죠?”

“어쩌시려고요?”

“참는다고 했지. 아무것도 안 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그럼···?”

“그러니까······.”

두진이 의아해했고 도훈이 뭐라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도훈의 이야기를 들은 두진과 다른 직원 모두가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직원들의 얼굴을 차례로 둘러본 도훈이 담담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상들 쓰지 마세요. 정작 물벼락 맞은 건 난데 말이에요.”

“... 네.”

“자, 우리 웃으며 일합시다. 다음 일정 뭐죠?”

활달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키는 도훈의 모습에 비서실 직원들이 하나씩 억지로라도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4월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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