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3화 (114/279)

113. 악성 민원인 - 1.

3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 대흥시청 소회의실.

“아시는 것처럼 운계면 주민센터는 월요일부터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달 1일부터 사흘간 열릴 지역 주민잔치는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습니다.”

“주민 호응은 어떻습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활발한 편입니다. 주민들에게 배정한 장터 자리가 이미 다 찼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운계면 주민센터 신축확장이 시작되어 센터는 도로 맞은편 건물의 2층으로 임시로 이전했고, 구 센터는 한참 철거하는 중이었다.

원래 정치인들에 지역 유지가 모여서 테이프 자르고 사진 찍고 하는 행사를 해야 하는데, 도훈은 그런 행사 말고 주민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나눔 장터, 중고물품 교환 등의 행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주민센터장은 물론 시청 간부들이 우려를 표했는데, 도훈이 단칼에 잘랐다.

- 주민센터는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럼 당연히 새 주민센터 건설 축하도 주민과 함께 하는 게 맞죠. 사진 한 장 찍자고 번잡하게 무대 꾸미는 것 안 합니다, 저는. 그러니까 그런 행사 초청 대상인 분들은 사진 말고 장터에 와서 시민들에게 눈도장 찍으라고 하세요.

본인 취임식도 하지 않았고, 취임 기념사진도 산사태 원인을 조사하느라 흙투성이가 된 것으로 대신했던 도훈이 아닌가.

기공식 안 한다는 얘기에 시의원 일부가 불만을 표했지만, 주민들이 ‘장터’에 이렇게 호응하는데 더는 공개적으로 뭐라 할 수 없을 터.

“공사 시작하기 전에 시공사에 다시 한 번 강조하세요. 부실하게 지어도 문제지만, 설계대로 시공 안 하면 싹 다 부수고 다시 짓게 한다고요.”

“이미 몇 번이나 다짐을 두었지만, 다시 한 번 전하겠습니다.”

설계 전에 주민들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온, 오프라인으로 의견을 받았고 그걸 정리해 설계 공모에 응하는 건축사무소에 전달했다.

설계안은 세 곳에서 제출했는데, 그중 최종적으로 선택된 건 누가 보기에도 주민들의 요구가 가장 잘 반영된 것이었다.

이젠 그 설계가 잘 반영된 건물만 만들어지면 될 테니, 도훈은 그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어딥니까?”

도훈의 말에 안전총괄과장이 일어나 발언하기 시작했다.

“저희 차롑니다. 우선 봄철 산불예방 캠페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산천에 봄 색채가 짙어질 터.

봄 하면 보통 사람들은 봄꽃을 생각하겠으나 공무원, 그것도 지방 공무원들은 봄 가뭄과 산불을 먼저 떠올린다.

봄은 ‘산불의 계절’이기도 하니까.

대흥시 관내에 높고 험한 산은 없지만, 어떤 산이 됐든 일단 산불이 나면 그 피해는 막대하다.

작년 말의 ‘야산 산불’은 그야말로 애교 수준일 정도로.

“점검 결과는 어떻습니까?”

“센터와 의용대의 장비 전체가 정상 작동인 걸 확인했습니다. 산림청과 인근 군부대와의 협조체계도 다시 확인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장님. 다음으로는···.”

안전총괄과장 이후로도 여러 간부가 제각각 의제를 꺼냈고, 점검과 토론이 이루어졌다.

대흥시가 도농 복합지역이다 보니 농림과나 농업기술센터도 의제를 올렸고 다른 부서들도 제출한 안건들이 평상시보다 좀 많았다.

거의 점심 무렵이 다 되어 마지막 의제가 끝났고, 도훈이 마무리를 지으려 했다.

“혹시 더 할 말 있으신 분 계십니까?”

평소라면, 이 말을 마지막으로 회의가 종료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손을 드는 사람이 있었다.

“네, 민원봉사과장님.”

도훈이 지명하자 과장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번에 보고드린 ‘그’ 민원인 관련한 건입니다.”

“아, 네.”

담담하던 도훈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렸다가 얼른 폈다.

“... 도저히 해결 기미가 안 보입니다, 시장님.”

“......”

‘그’ 민원인이란 작년 12월부터 시청 민원실에 이틀에 한 번꼴로 나타나는 사람으로 시청 앞 거리 끝자락에 3층짜리 건물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제기한 민원은 수도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건물에 입주한 식당이 장사를 제대로 못 하고 있으니 개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담당 직원이 확인해 보니 지하에 매설된 수도관이 문제가 아니라 건물의 수도관이 문제였다.

민원을 제기하기 직전에 동파 사고가 벌어져 수리했다는데, 수리 이전에는 잘 나오던 물이 수리 이후에 수압이 줄었단다.

1층 식당 사장뿐만 아니라 세입자 전부가 당연히 건물주에게 호소했고, 건물주는 귀찮다는 듯 일을 시청으로 떠넘겼던 것.

당연히 담당 공무원은 문제 원인이 뭔지를 알려주고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건물주가 시청이 정당한 민원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가 한번 직접 만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도훈이 답답한 마음에 입을 열었고, 여러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 중 대표로 부시장인 전경완이 말했다.

“저는 반대입니다. 솔직히 조금이라도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정당한 민원이라면 시장님이 한번이 아니고 백번을 만나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성 민원에 시장님이 나서시면 또 다른 누군가도 시장님 만나게 해달라고 생떼를 부릴지도 모릅니다.”

“저도 반대입니다.”

두진이 짧게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사실, 도훈이 직접 만나보겠다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두진은 물론 여러 간부가 반대했다.

‘난제’라서, 시청이 해결해 줘야 하는 문제지만 그 해결이 어려워서 민원을 받았다면 모르겠지만, 성격이 명확한데 직원들이 힘들어한다고 시장이 나서면 ‘선례’로 남기 때문이라나.

이런 문제는 워낙 많이 겪어본 게 공무원들이니, 도훈은 간부들의 반대를 수용했고 민원실 직원들과 과장이 응대해왔다.

그런데 이제 그것도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흐음.”

잠시 생각을 정리한 도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만나보겠습니다.”

“시장님!”

“만나서 달래기만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 그럼 어쩌시려고?”

질문을 받은 도훈이 기획감사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일, 법적 절차 어떻게 밟는지 알아보셨죠?”

“네. 법률구조공단에서 연결해 준 변호사와 얘기도 끝냈습니다.”

“가능하다고 합니까?”

“폭언도 분명히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니까요.”

사례는 많지 않지만, 대흥시에도 시민이 터무니없는 민원을 제기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담당 직원을 고소, 고발하는 것은 물론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거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했던 경우가 있었다.

아무리 ‘공복’이라고 불리는 공무원이라지만,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기만 할 수는 없는 일.

“제가 만나서 그분 얘기를 들어보죠. 시청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고 그래도 안 되면 최후통첩을 하겠습니다.”

“... 굳이 시장님이 그러지 않으셔도···.”

“아뇨. 이건 우리로서도 극단적인 대응을 하는 겁니다. 당연히 지금보다도 더 상대의 분노를 사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분노가 직원이나 과장님이 아닌 저를 향하는 게 차라리 나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도훈은 시민의 원망 혹은 분노를 살 게 뻔하다고 해서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럴 때는 시장이 앞장서서 직원의 방패막이가 되어줘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지금껏 직접 나서지 않은 게 오히려 직원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 오늘 그분 오시면 시장실로 모셔오세요. 그때 법무팀장님도 함께 오라고 하시고요.”

단호한 도훈의 말에 전경완 부시장도 두진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났고 당일 느지막한 오후, 문제의 인물이 시청 민원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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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한 번 말해봐요.”

“네. 그러죠. 계속 이런 식으로 직원들 괴롭히시면 저희도 법적으로 대응하겠습니다.”

“......”

말문을 잃은 50대 후반의 서 모라는 남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그의 눈빛은 마치 원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독기마저 내뿜었다.

물론, 처음부터 남자가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민원봉사과 직원의 안내로 시장실에 왔을 때만 해도 좀 어안이 벙벙하지만, 기분은 좋은 듯한 모습이었다.

시장실 소파에 앉아 도훈과 마주 앉은 채, 두진과 법무팀장이 배석한 가운데 민원실에서 백번 가까이 읊었다는 레퍼토리를 반복할 때에도 그는 절박하다기보다는 기분이 좋은 표정이었다.

그런데, 도훈이 왜 그의 민원을 시청에서 해결해 줄 수 없는지 조곤조곤 설명하고, 혹여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를 들고 민원실에 나타나 폭언을 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말하는 순간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파르르.

남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고, 얼굴은 정말 폭발 직전의 화산같이 벌게졌다.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어 도훈이 좀 걱정되던 순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법? 허, 내 이런 기가 막힌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 버~ 업?”

“......”

“명색이 공복이라는 것들이 시민이 민원제기한다고 법을 들이밀어? 너희가 그러고도 공무원이고 네가 그러고도 시장이냐!”

남자가 버럭 고함을 쳤지만, 도훈의 담담한 표정에는 일절 변화가 없었다.

“공복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공무원에게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하라는 거지. 진짜 종처럼 행동하라는 게 아닙니다.”

“뭐야!”

남자가 발끈하며 일어서자 법무팀장과 두진이 움찔 놀라 따라 일어났다.

마치, 도훈에게 달려들기라도 할 기세였기에.

“니들만 법 운운할 줄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나라고 법으로 대응하지 못할 것 같냐! 내가 변호사 하나 구해서 고소고 고발이고 못할 것 같냐고!”

벌컥!

남자가 거의 발광 직전의 모습으로 연신 고함쳤고, 시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영배와 영진이 모습을 보였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두진이 ‘큰소리’가 나면 들어오라는 얘기를 미리 해뒀기 때문이었다.

다가오려는 영배와 영진을 가만히 손을 들어 만류한 도훈이 천천히 일어섰다.

‘... 이걸 원한 건 아니지만, 이젠 정말 어쩔 수 없군.’

속으로 한숨 쉬며 중얼거린 도훈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 뭐?”

“지금 이 시각 뒤로 같은 문제를 들고 민원실을 방문해 직원에게 폭언을 행사하시면 저희는 곧바로 법적 절차를 밟을 겁니다. 그러니 서 선생님도 법을 통해 해결을 원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 지, 지금 내가 허풍 떠는 거로 보여!”

“허풍 아닌 줄 압니다. 아니까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말리지 않겠습니다.”

담담하던 도훈의 표정과 말투가 변했다.

정색한 도훈이 차분하고도 서늘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원해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 하?”

“서 선생님이 저희가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신 겁니다.”

“......”

도훈의 태도가 변하자 남자가 말문을 잃었다.

“고소하시든, 고발하시든 죄 없는 직원을 대상이 아니라 저를 상대로 하세요.”

“......”

“제가 성심성의껏 응대해 드리겠습니다.”

“......”

말을 마친 도훈이 묵례했다.

들어는 봤어도 처음 당하는 상황이었지만, 도훈은 차분한 표정과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들부들.

고개 숙인 도훈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몸을 떨던 남자는 곧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콰앙!

비서실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에 고개를 든 도훈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저한테도 이럴 정도면 민원실 직원들한테는···.”

“... 어느 관공서고 민원실이 괜히 기피부서 1순위인 게 아니죠.”

씁쓸한 두진의 말에 도훈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도 시장이 되기 전에는 공무원에게 문제가 많다고 여겼고, 지금도 그 생각이 180도 바뀐 건 아니었다.

다만, 공무원에게‘만’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좀 더 강해졌달까.

“저분 어떻게 나오실까요? 설마, 정말로 고소하실까요?”

영배의 말에 도훈이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두고 보면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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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민원실 직원 중 일부는 ‘그’ 민원인이 여전할 거로 생각했지만, 퇴근을 앞둔 시각까지 민원실은 평화로웠다.

시계를 보며 책상을 정리하던 직원 하나가 중얼거렸다.

“포기한 건가?”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왠지 그 양반이 씩씩거리면서 변호사 만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푸념하는 옆자리 동료의 말에 직원이 답했다.

“지금껏 봐온 대로라면 그러기가 쉽겠지.”

“휴우. 그래도 이번엔 시장님이 나서주셔서 그나마···.”

“그건 그래.”

“......”

두 사람이 민원실 유리문과 벽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늘은 나타나지 않을 모양.

“오늘은 안 오려나 봅니다.”

“모르지. 내일은 나타날지도. 그 양반, 매일 여기 온 건 아니었잖아.”

“... 그랬죠.”

얼마간 그렇게 유리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 사람이 말을 이었다.

“사람도 없는데 이만 퇴근하자고.”

“네. 내일 이맘때도 이런 기분으로 퇴근하면 좋겠습니다.”

“하하, 나도 그래.”

다행히, 두 사람은 다음 날도 비슷한 기분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서 모라는 민원인이 나타나질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 역시.

‘... 제발 이렇게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민원실 직원은 물론, 도훈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도훈이 민원인과 만난 1주일 뒤, 월요일.

도훈은 사진찍기 행사 대신 열린 시민참여 장터 한가운데에서 문제의 민원인과 맞닥뜨렸다.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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