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재회 - 3.
국회의원들이 돌아간 뒤에도 강정문은 자리를 뜨지 않고 도훈과 술을 마셨다.
“오늘은 정말 날 잡고 온 겁니다. 그러니 일찍 도망갈 생각하지 말아요, 김 시장.”
“... 무섭습니다, 지사님.”
“하하, 누가 잡아먹는답니까?”
중국관에서 1차를 마친 도훈과 강정문은 거기서 멀지 않은 실내포차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중국관 사장에게 다시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은 뒤였다.
“자, 받아요.”
“네.”
실내포차 구석진 자리에 앉아 닭꼬치와 오뎅 국물을 안주로 두 사람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엄포를 놓긴 했었지만, 강정문이 술 마시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고 말도 많지 않았다.
딸내미가 모 연예인에 빠졌는데 서운하다는 둥, 비서가 너무 원칙적이라 담배 한 대 편하게 피우기 힘들다는 둥 소소한 이야기들.
뭔가를 내려놓고 편하게 술 마시는 게 즐거운지 강정문의 입가에는 내내 담담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 그러고 보니 꽤 지쳐 보이네.’
흐릿한 조명 아래라 그런지 강정문의 얼굴은 좀 꺼칠한 느낌이 강했다.
조명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피로가 쌓였을 터였다.
도훈도 바쁘지만, 업무 강도는 강정문의 그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대흥시 인구는 5만이 안 되지만, 충청남도는 넓이도 넓이지만 인구가 200만이 넘어가니까.
그 사람들의 생활,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칠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과 토론, 점검이 필요하겠는가.
아무리 금요일 저녁이라도 이렇게 여유롭게 술자리를 갖는 건 자체가 이색적인 일일 터.
물끄러미 강정문을 바라보던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많이 지쳐 보이십니다.”
“그래요? 최근에 좀 많이 바빴어요. 하하, 나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표시가 나는 모양이네요.”
“좀 휴식을 늘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야 그러고 싶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입니까? 당장 일은 산더민데···. 하하, 내가 선택한 길인데 하는 데까지는 열심히 해야죠.”
“... 네.”
“지금 이 자리가 내겐 휴식이에요.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압니다. 아니까 상대해드리고 있는 거죠. 아니면, 벌써 집에 갔을 겁니다.”
“하하, 고맙다고 해야 합니까?”
“아뇨. 저도 술이 좀 당기는 날이었습니다.”
“다행이네요.”
담담하게 답하고 난 강정문이 화제를 바꿨다.
“그 강연이 그렇게 싫어요?”
“... 강연이 싫은 게 아니고 그 강연자가 제가 될 필요가 없는 것뿐인 거죠.”
“... 정당이 싫다는 얘길 돌려서 하는 것 같은데 맞아요?”
“그건 전부터 아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후후, 하여간··· 그 까칠한 건 변하지를 않네요.”
“천성이니까요.”
타박하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강정문은 웃는 낯이었다.
“이번 행사, 준비위원회에서 상당히 신경 써서 준비하고 있어요. 당원 중에 이번 초대 대상인 40세 미만이 그리 많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갖는 행동력이 어마어마하죠. 거침없이 발언하고 거침없이 실천하는 그런 사람들이라서요.”
“아무래도 그러겠죠. 지난 대선 전에 민의당에 당원 가입 열풍이 불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네. 그래서 강사 섭외에 무척 신경 쓰는 것으로 알아요. 학생도 아닌데 애들 가르치듯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다 나름의 가치관을 가진 이들이니 강사의 말에 무조건 수긍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테죠. 당연히 그들과 토론도 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 네.”
담담히 답하는 도훈은 또 설득인가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강정문의 말은 설득이 아니었다.
“그 강연, 제대로 해내면 대전, 충청 지역 청년 당원들에게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대중적인 인기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만, 개혁과 사회변화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머릿속에 이름 석 자를 확실하게 새길 수 있을 거거든요.”
“그럴 테죠.”
“정치인이면 누구나 원하는 좋은 기회에요.”
“... 아마도요.”
“그런데도 하기 싫어요?”
“네.”
0.1 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하는 도훈의 모습에 강정문이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 처음으로 도훈의 말문을 막았다.
“김 시장, 시장 오래 하고 싶은 마음 없죠?”
“......”
깜빡, 깜빡.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공격에 도훈이 잠시 말문이 막혔고, 강정문이 연타를 날렸다.
“다음 지방 선거가 바로 내일이었으면 좋겠지 않아요?”
“... 그건 아닙니다.”
“왜요?”
“제가 시민들에게 약속한 것을 아직 다 지키지 못했거든요.”
도훈과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한 강정문은 도훈이 진심임을 알아챘다.
그의 입가에 조금은 서글픈 미소가 어렸다.
“내가 이래서 김 시장을 좋아하는 겁니다.”
“... 무슨 말씀이십니까?”
“뱉은 말에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사람이거든요. 남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엄한 잣대를 적용하는 그런 사람.”
“... 과찬이십니다.”
“글쎄요.”
이번엔 또 뭔 소리를 하려나 싶어 긴장한 도훈에게 강정문이 의미 모를 미소를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있잖아요, 김 시장.”
“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됩니까?”
“... 들어드릴 거라고 답 안 해도 된다면요.”
“부탁하는 건 내 마음이고, 수락 여부는 김 시장 마음이죠.”
“그럼 하세요.”
“하하, 여하튼 철저하다니까.”
너털거리며 웃고 난 강정문이 진지한 표정을 했다.
“김 시장.”
이어진 강정문의 말이 왠지 모르게 도훈의 가슴에 콕하고 박혔다.
“정치···, 아니 정치인··· 너무 싫어하지 말아요.”
“......”
도훈이 뭐라 답을 못하고 있는데, 강정문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 남은 도훈이 강정문이 왜 내게 저런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조상님의 말이 들려왔다.
- 저놈도 눈치는 빨라. 네가 정치가 아니라 정치인을 불신하는 걸 감 잡은 것 같더라.
‘... 제가 좀 티를 많이 내긴 했죠.’
- 그래도 다른 놈들은 저놈처럼은 생각하지 못할걸?
‘뭐, 뛰어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까 국회의원도 여러 번 했고 도지사도 하는 걸 테고요.“
- 흠, 네가 웬일로 정치인을 다 인정하는 거냐?
‘정치인을 인정하는 게 아니고 강정문이라는 사람을 인정하는 겁니다. 훌륭한 정치인이라는 게 아니고, 신뢰할만한 개인이라는 거죠.’
- ... 그거나 그거나 아니냐?
‘전혀 아닙니다. 제 기준에서는.’
- ... 그려? 난 잘 모르겠다. 고차원적인 변명이나 합리화 정도로 들리는데?
‘... 에휴. 아니라니까요.’
- 뭐, 네가 상대하는 거니까 너 편한 대로 생각해라.
도훈은 그렇게 조상님과 대화하느라 비어있던 옆자리에 손님들이 앉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그런데···.
“... 시장님?”
“어머?”
“정말?”
도훈이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부시장님?”
옆 테이블에 앉은 건 전경완 부시장과 그의 부인, 그리고 민세경이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사모님. 과장님도 잘 지내셨죠?”
“호호, 네! 안녕하셨어요?”
전경완의 부인이 웃으며 답했고 민세경이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꾸벅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부시장님 댁이랑 가까운 곳도 아닌데.”
“하하, 여기 종종 옵니다. 제 취향에 맞거든요. 그나저나 시장님도 여길 자주 오십니까?”
“전에는 자주 왔었죠. 지금은 가끔 옵니다. 이번 주는 부시장님이 안 가시고 사모님께서 오신 모양이군요.”
“네. 이 사람이 따끈한 국물에 청주 한잔 생각난다고 해서요.”
전경완의 말에 부인이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말했다.
“겨울이 끝나가잖아요. 그래서 생각이 나더라고요.”
“하하, 네.”
도훈이 웃는데 민세경이 입을 열었다.
“바쁘실 텐데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네요.”
“민 과장님도요.”
“저야 워낙 건강 체질이라서요. 호호!”
“저도 그렇습니다.”
화사한 민세경의 미소에 도훈도 마주 웃는데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혼자 계세요? 설마 혼자 오신 건 아니죠?”
움찔.
도훈이 뒤늦게 화장실에 간 사람을 떠올렸다.
“... 아, 그게···.”
뭐라 답해야 할지 좀 애매해서 도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전경완의 눈이 커지는 게 보였다.
“... 지사님?”
“어머?”
전경완과 부인이 저만치서 다가오는 강정문의 모습에 놀랐고, 고개를 돌린 민세경도 놀랐다.
그리고 비어있던 옆자리를 차지한 손님들을 확인한 강정문도 놀랐다.
“전 과장? 제수씨? 세경이 너까지?”
예상하지 못했지만 반가운 사람들을 발견한 때문에 강정문은 순간 스스럼없이 말했고, 말을 한 뒤에야 도훈이 다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 아.”
“... 아.”
강정문도 전경완도 그의 부인과 민세경도 도훈을 바라봤다.
마치 비밀을 들킨 듯한 표정으로.
담담한 표정의 도훈이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고 입을 열었다.
“...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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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머쓱해졌던 강정문과 전경완, 그리고 그의 부인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담담한 도훈과 여전히 당황한 상태인 민세경을 바라보면서.
“제가 진짜 그랬었어요?”
“네.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나 보다고 생각했죠. 친척일 수도 있겠다 싶기도 했고요.”
“... 저, 저는 전혀 기억이 안 나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넘어갔었거든요. 부지불식간에 나왔던 얘기일 겁니다.”
자신이 강정문을 ‘오빠’라고 불렀던 걸 도훈이 말해주자 당황한 민세경.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단 한 번도 강정문과 친척이라는 걸 자기 입으로 밝힌 적이 없기에 더욱 당황한 듯했다.
함께 충남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지만, 두 사람이 친척이라는 건 강정문 측근 극소수만 아는 얘기.
“많이 당황하셨나 보네요, 과장님.”
“하,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요.”
“... 감사합니다.”
그녀의 어머니와 강정문의 어머니가 자매라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들은 도훈이었다.
그리고 이미 작고한 민세경의 아버지와 전경완이 형제처럼 친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때문에 강정문이 도지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전경완과도 잘 알고 지냈고 말이다.
민세경이 여전히 발간 얼굴로 도훈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하셨어요?”
“아는 척할 필요가 없는 일이잖아요.”
담담한 도훈의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고, 그의 말을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한 민세경의 얼굴이 일순 어두워지는데···.
“민 과장님이 관계 내세워 자랑하거나 으스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숨기시는 쪽인 것 같아서 아는 척하기가 뭐했던 것도 있고요.”
“어머? 우리 세경이 생각해서 그러신 거였어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전경완 부인의 질문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생각해서’라는 말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고, 도훈과 세경은 서로 다른 해석을 선택했다.
선택은 달라도 결과는 비슷했다.
“고맙습니다, 시장님.”
“하하, 천만에요.”
담담하게 웃는 도훈은 물론 민세경도 언제 어두운 얼굴을 했는지 모르게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고 있었다.
“흠흠, 일단 나도 고맙다고 할게요, 김 시장.”
“뭐 이런 일로요.”
강정문이 빙긋 웃더니 잔을 들고 말을 이었다.
“오늘 대흥에 오길 정말 잘했네요. 자, 건배합시다!”
“건배!”
“건배!”
쨍.
세 개의 소주잔과 따뜻한 청주가 담긴 두 개의 글라스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으.”
“좋다!”
모두가 기분 좋은 표정인 가운데 술자리가 이어졌다.
“시장님, 내일 안 바쁘시면 한 게임 어때요? 안 그래도 저 제 옷이랑 라켓 챙겨서 왔어요. 호호!”
“하하, 좋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사모님의 본래 실력을 접할 수 있겠네요.”
“무르시기 없어요?”
“물론이죠. 안 그래도 저도 탁구 한 게임 하고 싶었습니다.”
“자, 내일의 게임을 약속하는 의미에서 건배!”
“건배!”
전경완의 부인과 도훈이 건배했다.
부인은 따뜻한 청주를 홀짝이는 정도였지만, 도훈은 소주를 비웠다.
“크으!”
“안주도 드세요.”
“아, 네.”
세경이 도훈에게 닭꼬치가 담긴 접시를 밀어줬고, 도훈이 싱긋 웃었다.
도훈도 얼굴이 발간 것이 제법 술기운이 오른 듯한 모습.
“따라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민세경이 소주병을 들어 담담히 웃는 도훈의 잔을 채우는 모습을 강정문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복잡다단한 감정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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