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1화 (112/279)

111. 재회 - 2.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과 재회했건만, 도훈의 대화 상대는 그가 아니었다.

“저희는 아주 딱 맞는 분을 강사로 섭외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장님, 겸손하신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겸손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다, 의원님.”

도훈의 담담한 답에 마주 앉은 상대가 예의 바른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시민참여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참된 진전이라는 큰 주제에는 동의하시는 거죠?”

“네. 젊은 당원들을 대상으로 주제는 잘 잡으셨다고 생각합니다만, 강연자가 저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고, 왜 자꾸 그리 모진 말씀만 하십니까? 시장님이야말로 지방자치의 최일선에서 활동하시는 분 아닙니까? 그리고 제가 듣기로는 주민참여를 항상 강조하시고 그를 위해 주민 모임을 계속 찾아다니시는 것으로 아는데요? 지방자치 최일선 현장에서 더 많은 주민을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보다 더 적합한 강연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도훈의 말에 반박하는 것은 민의당 소속 초선 국회의원 이진기.

“하하, 너무 그렇게 열 내지 말아요, 이 의원. 내가 미리 얘기했다시피 오늘은 설득이 목적이 아니라 대화가 목적입니다.”

“죄송합니다, 도지사님. 제가 좀 흥분했네요. 시장님께도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거절하는 처지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실까요? 목도 칼칼하네요.”

“하하, 네.”

도훈의 말에 싱긋 웃으며 이진기가 잔을 내밀었고 도훈도 담담히 미소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어허, 나 빼고 이러기 있깁니까? 자, 나도 건배합시다.”

“하하, 네.”

강정문에 이어 내내 조용한 문제의 인물도 잔을 내밀었지만, 도훈은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건배를 할 뿐.

챙.

“크으. 자, 아제 목도 축였으니 좀 더 얘기를 해볼까요?”

도훈을 향해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이진기의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강정문과 함께 도훈을 만나러 온 두 의원 중 이진기는 도훈이 초대받은 행사의 준비위원 중 한 사람.

중앙 정치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도훈도 이름을 들어 알 정도로 뚜렷한 개혁 성향을 보이며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민의당 당내에도 지방자치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분 많습니다. 그리고 시장보다는 시의원분들이 더 ‘최일선 활동가’라는 말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죠. 우리 대흥시 의장님만 하더라도 저 못지않게 시민 모임 조직화에 열중하는 분이십니다. 아마 찾아보면 그런 분 더 많을 걸요?”

도훈이 다시 사양의 말을 했고, 이진기가 입맛을 다시며 답했다.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다행인데, 아쉽게도 그분들 중 시장님만큼 지명도가 있는 분이 없습니다.”

“강사 지명도보다 강사가 가진 콘텐츠가 중요한 거 아닐까요?”

“틀린 말씀은 아닌데요. 때로는 강사 자체도 콘텐츠의 매력 포인트 중의 하나니까요.”

‘말발’에서는 어디 가서 적수를 만난 적이 거의 없는 도훈이었지만, 이진기는 만만치 않았다.

강정문은 담담히 웃으며 이따금 한두 마디 끼어드는 게 전부고 문제의 인물은 주로 듣기만 하는 가운데, 도훈과의 대화라기보다는 거의 논쟁을 주도하는 이진기는 어떻게든 도훈을 강사로 초빙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돌고 또 돌길 얼마, 도훈은 결국 ‘사양’이 더는 먹히지 않자 웬만해서는 안 꺼내려던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 시의회 의원이 여섯입니다. 그중 다섯 분이 민의당 소속이고 한 분이 대자당 소속이죠.”

“저도 들었습니다.”

“제가 대척점을 먼저 그은 적은 없는데 대자당 의원님은 제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십니다. 개인적인 감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대개는 여당의 입장이랑 관점이나 입장이 비슷하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죠.”

“그 얘기도 들었습니다. 초선이신데, 꽤 전투적이라는 이야기도요.”

“그런 점이 있죠. 하여튼, 그렇게 5대1의 구도인데 의외인 것은 제 입장이 여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시의회 상대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 왜 그런 거죠?”

이 말은 뜻밖이었는지 이진기는 물론 강정문과 문제의 인물도 도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민의당 소속이라고 해서 정견이 다 비슷한 건 아니니까요.”

“... 그건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그렇죠. 자연스럽죠. 하지만, 어떤 사안에 관해서는 정견의 문제를 떠나 시의원이 시민의 대표자가 아니라 이해관계자 혹은 당사자가 되기도 합니다.”

“......”

“그런 때에 그분들이 내세우는 게 같은 당이라고 해서 꼭 정견이 같을 필요는 없지 않냐는 얘깁니다. 아마 우리 시의회 의장님과 자주 소통하시는 우리 지역구 국회의원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 흐음.”

이진기가 떨떠름한 표정을 했지만, 도훈의 반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민의당 소속 시의원이라고 해서 모두가 개혁적인 것도 아닙니다. 어떨 때 보면, 민의의 대변자라기보다는 지역 유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을 보이기도 하거든요.”

“... 하하, 저 김 시장님. 당이라는 게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다 보니···.”

“이 의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압니다. 그리고 그게 현실이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 현실의 문제죠. 다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정당은 중앙 정치의 거대한 이슈에 대체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한목소리를 내며 싸우고 ‘결과’를 만들어 내려 노력하겠지만, 그런 게 행정 일선에서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그런 싸움 혹은 선거의 결과로 집권하고 국회 다수당이 되고 해서 국가운영의 방향이 바뀌며 지방행정도 영향을 받습니다. 당연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겠죠. 하지만 우리 시의 경우를 놓고 보면, 그런 정당에 소속된 의원님들도 시민의 충실한 대변자라기보다는 이해관계자 혹은 당사자로서의 입장에 충실한 모습을 상대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초선에 전국구인 이진기도 모르는 바는 아닐 테지만, 도지사인 강정문에 재선 지역구 의원인 오정민은 무척 실감하는 문제일 터.

게다가 도훈이 말한 게 어디 시의회만의 문제겠는가?

대한민국 국회라고 과연 그런 ‘이해’의 문제에서 온전히 자유로울까?

사실, 자유롭지 않은 게 정상인 것이, 그 이해를 계급, 계층 간의 죽고 사는 싸움이 아닌 평화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라고 존재하는 게 정치 아닌가.

최소한 국회로 대표되는 ‘중앙 정치’에서 그 싸움의 중심에 있는 게 정당이라는 걸 도훈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이 문제도 개선의 여지도 많지만, 전혀 의미 없는 일이 아닌 무척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도훈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껏 중앙 정계의 이슈에 관해서는 거의 발언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 발언을 통해 중앙 정계의 쟁점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게다가 제게 맡겨진 역할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 네.”

“제가 그런 발언을 한다고 해서 대흥시 행정에 플러스 되는 요인이 거의 없거든요. 그런 논쟁은 중앙 차원에서 치열하게 해야 하며 실제로 이뤄지고 있죠. 그리고 그 일의 중심에는 정당이 있겠죠.”

“......”

“하지만, 제 일을 열심히 하는데 정당은 그다지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적 문제가 아닌 이 작은 대흥시에 이해 당사자 간의 의견 대립이 생겨도 그걸 해소하는 데에 정당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최소한 지금까지는요.”

담담한 도훈의 말에 이진기는 머쓱한 표정이 됐고, 강정문은 쓰게 웃었으며 오정민은 뜻 모를 눈빛을 도훈에게 보냈다.

“그런 제가 굳이 정당의 당원 행사에 가서 강연할 필요를 느끼겠습니까?”

“......”

담담한 도훈의 이야기를 짧게 정리하자면 이럴 거다.

- 국가 차원의 거대 담론을 관철할 때에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흥시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행정을 펴는 데 정당은 별반 소용이 없다. 그런데 왜 내가 민의당 행사에 가서 ‘거창한 거대 담론’의 하나를 주제로 강의를 하나?

정중한 태도로 사양하던 도훈의 반격치고는 제법 매서웠을 터.

이진기가 말문을 잃자 강정문이 입을 열었다.

“국회도 비슷한 면이 있어요. 김 시장도 모르지 않을 테지만.”

“... 네.”

“야당만 탓할 게 아닌 게 우리 당 안에도 그런 의원들이 없다고 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국민에게 면목 없을 때가 종종 있었죠.”

“차라리 현재 우리나라 정당이 계급, 계층, 지역 등의 다양한 이해를 충실히 반영해 구성되고 대립한다면 타협이나 문제 해결이 쉬울 수 있어요. 하지만···.”

“... 우리 정치의 역사가 그렇지가 않죠.”

“맞아요.”

강정문이 쓰게 웃었고 이진기도 오정민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모두가 잠시 말문이 없다가 강정문이 쾌활하게 웃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자,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이 의원도 이제 김 시장 그만 괴롭혀요. 아까부터 계속 얘기가 돌고 도니까 김 시장이 이렇게 반격하는 거 아니겠어요?”

“알겠습니다, 도지사님.”

“이젠 좀 마음 편히 마시자고요. 하하하. 솔직히 난 오늘 그러려고 여기 왔거든요.”

강정문이 너스레를 떨고 도훈이 마주 웃자 이진기가 표정을 풀고 따라 웃으며 한마디 했다.

“... 시장님과 앞으로도 이런 토론을 종종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론은 사양이고요. 술자리는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도지사님만 해도 너무 겁나는 손님이시라···.”

“하하하!”

도훈이 강정문의 눈치를 보는 척하며 말하자, 강정문과 이진기가 큰소리로 웃었다.

담담하게 웃는 ‘시늉’을 하는 오정민의 눈에 의미 모를 빛이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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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의원이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고, 도훈이 배웅을 위해 따라 나왔다.

이진기가 차에 올라 떠난 직후, 오정민이 입을 열었다.

“... 도훈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죠?”

“김 시장이 편합니다.”

“하긴, 그때가 언제야. 알았습니다.”

지금껏 대화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추임새만 넣던 오정민.

“민의당이라 관심이 없는 겁니까? 혹시 진보정당이면 다를까요?”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정말 당적을 갖지 않을 생각이에요?”

“네.”

“다음 선거 때 우리 당도 대흥 시장 후보를 낼 겁니다. 당선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진지하게 묻는 오정민과 도훈은 처음으로 제대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시장으로 일하는 데 당이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건 이미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시장으로 일하는 데는 몰라도 시장에 재선되는 데에는 도움이 될 텐데요?”

피식.

실소를 머금은 도훈이 답했다.

“그건 주객전도 아닌가요?”

“......”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오 의원님은 당이 제게 관심 두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알고 있는데요.”

“내가요? 그렇지 않은데요.”

“... 글쎄요.”

도훈은 오정민의 부드러운 표정에 일순 균열이 갔다가 회복되는 걸 놓치지 않았다.

때마침, 내내 조용하기만 하던 조상님의 말도 들려왔다.

- ... 저놈, 좀 변했다.

‘... 어떻게요?’

- ... 속내를 잘 숨기는 놈이 된 것 같구나. 전보다 훨씬 더.

‘당연한 일이죠, 뭐.’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걸 잘해야 살아남는 정치계에 몸담은 지 오래됐으니 특별할 것도 없는 변화.

하지만, 조상님이 굳이 그 말을 꺼낸 이유가 있었다.

- 그 정도가 아니야. 자기합리화의 단계를 넘어섰어.

‘네?’

- 전에는 상식이나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면 심리적 갈등이 조금이라도 있었어. 그런 갈등을 자기합리화를 통해 해소해야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기합리화가 필요 없단 말이야. 왜? 갈등이 없으니까.

‘... 네?’

- ... 자기가 한 모든 일은 옳다고 믿는 것 같단 말이야.

‘... 설마요?’

도훈이 오정민을 마주한 채 그렇게 조상님과 대화하고 있는데, 오정민이 입을 열었다.

“김 시장이 시장인 한 앞으로 또 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

“그때는 내게 오해 같은 것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둘 다를 위해서요.”

“......”

“그럼.”

담담히 바라보기만 하는 도훈에게 고개를 까딱해 보인 오정민이 차에 올라 멀어졌다.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는 도훈의 머릿속에 다시 조상님의 말이 전해졌다.

- 저놈 관상이 왕의 상은 아닌데 그것과 아주 흡사해. 확연한 건 아니지만, 희미하게 그런 상이 읽혀.

‘... 그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십니까?’

- ‘군주는 무치(無恥)다’는 말 못 들어봤냐? 왕은 무슨 짓을 해도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 아니냐? 왕인 자기가 판단해서 한 일인데, 그건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란 말이야.

조상님의 엉뚱한 말에 도훈이 어리둥절해 했고, 조상님이 말을 이었다.

- 그리고 저놈 네게 뭔가 꿍꿍이가 있어.

“......”

한참 침묵하던 도훈이 질문했다.

‘... 그 변화라는 것이나 꿍꿍이라는 것, 좋은 쪽은 아니겠죠?’

- 쯧,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어둠 속을 바라보며 굳어진 도훈의 미간에 자리한 주름이 오래 펴질 줄을 몰랐다.

#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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