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10화 (111/279)

110. 재회 - 1.

햇볕이 내리쬐는 어느 오후.

쌓였던 눈은 진즉에 사라졌고, 공기도 많이 포근해진 게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그런 날씨였다.

두진, 정임과 함께 청사 밖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 도훈은 두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고 자판기 옆 흡연구역에서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도훈이 한층 파릇파릇해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곧 봄꽃 피겠네.”

어느덧 3월 중순.

도훈의 말처럼 남쪽 지방에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TV에서 기상캐스터가 지난주부터 하기 시작했다.

한결 포근해진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잔잔한 일상 때문인지 도훈의 긴장감도 좀 풀어진 상태.

도훈의 교통사고 이후 두 달이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갑자기 눈이 많이 내려 제설작업 하느라 직원들이 두 번 정도 고생하긴 했지만, 겨울마다 한두 번씩은 겪는 일이니 특이사항이랄 것도 아니었다.

평화로운 날이 제법 오래 이어지자, 두진은 ‘오늘도 무사히’가 꼭 경찰관이나 소방관 같은 이들에게만 통용되는 게 아니라며 요즘만 같으면 참 좋겠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 두 달 사이 도훈 주변에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도훈은 여느 때처럼 시청에 출근하고, 야근하고, 주말에도 근무하고 시민을 만났으며 직원과 토론하고 그들을 독려하며 일에 집중했으니까.

영배의 공부가 좀 진도가 나갔고 공부를 해 온 보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게 변화라면 변화랄까.

그리고 뺑소니 사고 배상을 받아서 도훈의 애마가 바뀌었다는 것도 변화였다.

그래 봤자 5년 넘은 중고 SUV였지만.

위이잉.

“네.”

- 안 들어오십니까, 시장님?

“‘식후땡’하는 중입니다. 금방 들어갈게요.”

- 흠, 날이 따뜻해지니까 마음이 싱숭생숭하신 건 아니고요?

“싱숭생숭은 무슨, 왜 재촉입니까? 무슨 일 있어요?”

살짝 쏘아붙이는 듯한 도훈의 말에 영배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민의당에서 요청서가 하나 날아왔습니다. 시장님께 강연을 부탁한다네요.

“... 강연이요? 나한테요?”

- 네. 대전, 충남, 충북 지역 민의당 연합행사라는데요. 젊은 당원들을 초청해서 하는 1박 2일짜리 캠프랍니다.

“... 올라가서 얘기하죠.”

- 네. 하하, 우리 시장님한테 강연 요청이 다 오고··· 제 감개가 다 무량···.

뚝.

장난스레 말하는 영배의 말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도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연이라···.”

현직 시장이고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한 두진이 인정할 정도로 ‘내공’이 있는 도훈이지만, 도훈에게는 그걸 증명할 경력이 없었다.

이제는 대부분의 시청 직원이 도훈의 ‘품성’과 ‘노력하는 자세’ 외에도 ‘능력’을 인정하지만, 그건 그들이 곁에서 직접 가까이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도훈에게 관심이 있는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도 도훈을 인정한다지만, 그걸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때문에, 도훈은 제법 이름이 알려지긴 했으나 행정이든 정치든 ‘내공’이 있다고 알려지지는 않은 상태였다.

“무슨 생각으로 나한테 그런 걸···.”

도훈이 중얼거리고 있는데 개인 핸드폰에 메시지가 왔다.

- 야, 온종일 담배만 피우고 있을 거냐? 나 보라고 시위하는 거야, 뭐야! 빨리 들어와!

영배의 신경질적인 메시지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2월 초에 영배가 감기를 독하게 앓았는데, 의사가 담배를 줄이라는 얘기를 했었단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들은 형수가 담배를 끊으라 ‘엄명’을 내렸다.

영배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매달려 흡연량을 대폭 줄이겠다는 것으로 타협할 수 있었고, 아직은 형수와의 약속을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괜히 담배랑 나한테 짜증이야. 쯧쯧.”

중얼거린 도훈이 담배를 끄고 청사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살짝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포근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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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3월 마지막 토요일이니까 아직 2주 넘게 여유가 있긴 하네요.”

“네. 아직 시장님 일정도 없어요.”

비서실 소파에 모여 앉은 도훈과 직원들.

“주제가··· ‘시민참여로 꽃피는 참된 민주주의, 지방자치’라. 거창하기도 하네요.”

“그래도 젊은 당원을 대상으로 한 강연이라면 정석이긴 합니다. 현 정부도 지방자치의 대폭 확대를 위해 애쓰고 있고요.”

“강사도 쟁쟁합니다. 일요일 낮 강연은 행자부 장관님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그러게요. 시장님을 제외하면 민의당 내부에서나 그 진영에서 무게감이 상당한 분들입니다.”

직원들의 말에 도훈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행사의 규모나 무게감이 컸다.

현직 시장이라지만, 중소도시의 초짜 시장에게 맡길 강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단번에 들 정도로.

그것도 도훈은 민의당 소속도 아니질 않은가.

“... 이거 입질인 건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선 직후를 비롯해 지역, 혹은 전국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는 도훈이었다.

그 기회를 살려 전국적인 지명도를 계속 키울 수도 있었으나 도훈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조용히 시정에 집중하는 걸 택했다.

그럴 수 있었던 요인이 몇 가지 있다면, 첫째로는 무소속이라는 것, 둘째로는 ‘정치’에 대해 잘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 셋째로는 정치에 관해 이야기해야 하는 때에도 쉬운 말로 원론을 풀어낼 뿐 ‘색’을 드러내질 않았다는 걸 들 수 있을 터.

하지만, 영배를 비롯한 비서실 직원은 물론 대흥시 사람들은 도훈의 성향이 진보 쪽에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큰 틀에서 보면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달까?

안준식을 비롯한 민의당의 초선 시의원, 지역 국회의원, 도지사와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는 그런 점이 작용할 터.

“제안, 수용하실 겁니까?”

두진의 물음에 도훈은 담담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거절하는 게 좋겠습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당원 대상 행사인데 당원도 아닌 제가 가는 게 더 이상할 것 같습니다.”

도훈의 말에 모두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정당과도 협력할 수 있되 적당한 선에서 거리를 유지한다는 게 도훈의 기본적인 입장.

관계가 좋다고 해도 여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대흥시에 민의당과 대자당 이외의 당은 거의 유명무실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네.”

정임의 말에 답한 도훈이 소파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등 뒤에서 영배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왠지 그냥 ‘알겠습니다’하고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도훈도 영배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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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의장님. 제 기본 입장 잘 아시잖습니까?”

“알죠. 아는데 위에서 워낙 성화라···.”

거절 의사를 전하고 불과 두어 시간 만에 잠깐 얘기 좀 하고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안준식.

“제가 정중히 거절한다고 전해주세요.”

“그게 안 통하니까 제가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든 설득해 보라고 저를 쪼아대고 있단 말입니다.”

“... 하하.”

푸념하는 안준식의 모습에 도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도훈이 원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안준식이 말을 이었다.

“이 행사 기획할 때부터 저한테 시장님 강사로 초빙하는 거 어떠냐고 물었거든요.”

“뭐라고 답하셨어요?”

“주제에 적절한 강사인 것 같긴 한데, 아마 절대 수락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도당에서는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하는 반응이었는데, 제가 헛수고하지 말라고 답해줬습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저만 닦달하네요.”

한숨을 내쉬는 안준식에게 도훈이 말했다.

“민의당 행사라도 대흥시 지역위원회 행사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가서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시장이니까요. 그리고 그 행사가 대흥시에서 열린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역시 인사말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원 대상 행사에 당원도 아닌 제가 가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 쩝. 일단 시장님 뜻은 전해보겠는데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시장님께 강연해달라고 조를지도 모릅니다. 그것까지는 책임 못 져요.”

“하하. 감수해야죠, 뭐.”

안준식을 돌려보낸 도훈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구 국회의원인 김용진의 전화를 받았다.

도훈이 ‘딱’이라느니, 전혀 정치적인 행사가 아니라느니, 안준식이 했던 얘기를 그대로 반복한 김용진은 그래도 도훈이 정중히 사양하자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 ...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의원님.”

- 시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의원님.”

- 시장니~ 임.

“... 진짜 진짜 죄송합니다.”

김용진의 ‘애절함’이 장난기 섞인 연극이라는 걸 알아챘기에 도훈은 끝까지 거절로 일관했다.

결국, 자신으로는 안 되겠다는 걸 깨달은 김용진은 언제 애절했냐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 뭐, 제 다음 선수가 파이팅 하겠죠. 건투를 빕니다, 시장님.

“......”

뚝.

통화를 마친 도훈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민의당 쪽 아는 사람이 한 번씩은 다 등장할 모양이네.”

도훈이 예상하기에 안준식, 김용진 다음은 도지사 강정문일 터.

그간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이따금 전화통화는 하곤 했었다.

다 업무와 관련된 통화였지만, 마지막에 얼굴 잊어버리겠다며 조만간 한번 보자는 얘기는 꼭 잊지 않고 했었다.

뭐, 말은 그렇게 했어도 ‘다행히’ 만난 적은 없지만.

“뭐, 정중히 거절하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는 않겠지.”

강정문의 얼굴을 떠올린 도훈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강정문뿐만 아니라 안준식, 김용진 등 도훈과 친분이 있는 민의당 소속 정치인의 공통점이라면, 다행스럽게도 적당한 선에서 물러날 줄 안다는 것이랄까?

물론, 그렇게 물러나더라도 기회만 되면 어느새 다시 다가와 있는 게 긴장을 풀 여유를 안 주지만 최소한 막무가내로 덤벼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무섭긴 하지···.”

담담히 중얼거린 도훈이 보고 있던 서류에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그런데, 도훈의 예상과는 달리 강정문의 연락은 오지 않았고 그렇게 사흘의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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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늦은 오후.

“퇴근합시다.”

“네.”

가방을 챙겨 순심이를 안고 사무실에서 나온 도훈의 말에 영배가 웬일인지 순순히 답했다.

정임이 그런 영배를 향해 말을 걸었다.

“요새 웬일로 조 비서관님이 회식하자는 말을 안 하시네요?”

“... 그게 다 욕구를 억누르는 겁니다.”

“네?”

“술 마시면 자연스럽게 담배가 땡기거든요. 더군다나 맞은 편에 앉은 어느 분은 자기 맘대로 담배를 피우는 걸 보고 있으면 점점 ‘악마의 유혹’에 빠지려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술을 마셔도 차라리 집에 가서 와이프랑 마셔야 담배 생각이 안 나죠. 불쌍한 척을 잘하면 와이프가 특별히 한 대 허락해주기도 하고요.”

“... 하하.”

“허허허.”

영배의 말에 다들 어이없다거나 딱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도훈도 형수가 일석이조를 노리고 담배를 줄이라고 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한 도훈이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리고 전화를 받았다.

“네, 김도훈입니다.”

- 하하, 오랜만입니다, 김 시장. 납니다, 나.

“도지사님이신 거 알고 있습니다.”

- 아, 좀 정답게 통화합시다. 오래간만에 전화한 거 아닙니까?

“... 어쩐 일이십니까?”

- 할 말도 있고 해서요. 잠깐 보자고 전화했어요. 퇴근할 때 됐잖아요.

“... 잠깐 보자고요? 혹시 대흥에 오셨습니까?”

- 네. 여기 중국관이에요. 하하, 사장님이 아주 열렬히 환대를 해주시네요.

“......”

말문을 잃은 도훈은 푹 한숨을 내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역시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니까.’

“하실 말씀이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뭐겠어요. 김 시장도 뻔히 짐작하는 일이겠죠.

“... 휴우.”

- 한숨 쉬는 거 다 들립니다.

“들으시라고 한숨 쉬는 겁니다.”

- 하하! 승낙해야만 집에 보내주겠다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오세요. 올 거죠, 김 시장?

아무리 얄밉다고는 해도 상대는 도지사.

게다가 미리 약속하지는 않았다지만, 도훈을 만나러 대흥에 왔다고 하질 않는가.

거절해도 만나서 거절하는 게 예의일 터.

“... 비서실 직원들하고 같이 가도 되나요?”

- 아, 오늘은 좀 그런데···. 나 말고 다른 손님이 있거든요.

“... 손님이요?”

- 네, 두 분인데 두 분 다 김 시장이 아는 사람일 겁니다. 잠깐 바꿔드릴게요.

도훈이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래간만입니다. 김도훈 시장님.

“... 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

- 내 목소리 잊었어요? 하긴 시간이 오래 지나긴 했죠.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도훈은 이어진 담담한 상대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 나, 오정민이예요.

도훈에게 정치인은 신뢰해선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 남자가 재선 국회의원이 되어 드디어 도훈 앞에 나타났다.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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