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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김에 시장 되다-107화 (108/279)

107. 오늘도 무사히 - 2.

칙, 칙, 칙, 치이이익!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도훈은 몽롱한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자 소리에 이어 다른 것이 감각을 자극했다.

‘... 흠, 이건 밥 냄새···.’

선명하지 않고 흐릿한 감각들.

그러나 어딘지 익숙한 소리와 냄새를 연결하자 대번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 압력··· 밥솥.’

도훈이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집에 전기보온밥솥이 있긴 했으나 밥은 가스레인지 위에서 일반 압력밥솥으로 했었다.

입이 짧은 도연이가 밥투정 때문에, 아버지가 밥맛을 조금이라도 좋게 하려고 내놓은 해법.

전기압력밥솥이 시판되던 시절이었지만, 새 걸 사는 것보다 이미 있는 압력밥솥과 전기보온밥솥을 적절히 혼용하는 게 아버지의 스타일.

그래서 아침마다 압력밥솥의 ‘칙, 칙’ 거리는 소리는 도훈 가족의 하루가 시작되는 신호음이나 마찬가지였다.

‘... 꿈꾸는 건가?’

고딩 때의 도훈은 아침잠이 좀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야간근무를 하고 아침에 들어오는 날이 아니면, 아침밥은 늘 아버지가 담당했었다.

‘... 내 기억대로라면···. 이제 곧···.’

벌컥!

가물가물한 정신을 붙들려 애썼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고,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도 여전히 희미했다.

그러나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앳된 동생의 목소리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빠! 일어나! 아침 먹으래!”

대답하고 싶어도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 도훈.

곧 도연이가 다가와 도훈의 몸을 흔들었다.

“아, 일어나라고!”

흔들, 흔들.

동생이 작은 손으로 몸을 흔드는 게 느껴져 도훈이 희미하게 웃으려다 굳어졌다.

‘... 이, 이게 꿈이 아닌···.’

“역시 말로는 안되는군! 에잇!”

앙증맞은 도연이의 목소리에 이어 뺨에 뭔가 강렬한 게 날아왔다.

짝!

벌떡.

“깨셨습니다!”

“... 아이고, 하나님.”

뺨을 맞은 도훈이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눈을 껌뻑거렸다.

“시장님, 괜찮으세요? 저 좀 보세요.”

“......”

도훈의 눈앞에는 천만다행이라는 표정의 지구대 팀장의 얼굴이 있었고, 그 옆으로 핏기가 사라지고 잔뜩 굳어진 영배의 얼굴이 보였다.

“시장님. 저 알아보시겠습니까? 여기 어딘지 아시겠어요?”

깜빡, 깜빡.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린 도훈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살폈다.

실내가 아닌 실외, 그것도 도로에 누워있다가 상체를 일으켜 앉은 도훈.

싸늘한 1월의 밤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현실감을 일깨웠다.

“... 제가 왜··· 윽.”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려던 도훈이 인상을 쓰고 뒤통수를 만졌다.

뭔가 묵직한 것으로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얼얼한 뒤통수.

“인마, 너 차에 치일뻔했어!”

반쯤은 우는 듯한 영배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도훈은 기억을 연결시켰다.

승용차 불빛이 덮쳐오던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자기 차 보닛 위로 펄쩍 뛰며 몸을 날렸던 것을.

“... 피한다고 펄쩍 뛰었는데···.”

눈을 감은 채로 뒷머리를 주무르며 도훈이 말을 꺼냈고, 충혈된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영배가 말을 이었다.

“그 망할 놈의 차가 네 차 옆면을 훑고 운전석 문을 세게 치고 달아났다. 그 서슬에 차가 좀 밀렸는데, 네가 보닛 위로 등 먼저 떨어졌다가 그대로 앞으로 굴렀어. 굴러떨어지면서··· 하필, 머리가 먼저 닿아서···. 잠깐 기절했었다.”

뒤통수가 얼얼한 건 맞은 게 아니라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도 차 보닛 위를 거쳐서 충격이 훨씬 덜했을 겁니다. 그냥 맨바닥에 떨어졌다면···.”

“어휴, 생각도 하기 싫네요, 팀장님.”

지구대 팀장과 영배의 말에 도훈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 천만다행이다, 이 녀석아.

머리에 전해지는 조상님의 음성도 살짝 떨리는 게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이었던 듯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입을 열었다.

“형은 괜찮아?”

“난 멀쩡해. 간은 떨어졌다만.”

“... 나 얼마나 기절해있었어?”

“잘 모르겠어. 휴우.”

영배가 한숨을 내쉬었고 팀장이 대신 답했다.

“5분 좀 넘었으려나요? 뒷머리 말고 다른 데 아픈 곳은 없으십니까?”

“...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일어나···.”

도훈이 몸을 일으키려는데, 얼굴과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냥 앉아 계세요. 곧 구급차 도착할 겁니다. 그리고 눈 위가 살짝 긁혀서 피가 나고 있습니다.”

“그래! 그냥 그대로 있어!”

도훈은 그제야 뭔가가 자신의 눈 위에 대어져 있고 팀장이 손으로 그걸 누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눈 위 말고는 다친 곳이 없나요?”

“내가 확인한 바로는 그래. 곧 구급차 올 테니까 병원 가서 확인해 보자.”

“... 뭐 그리 큰 사고 났다고 구급차까지 불렀어?”

“인마! 너 기절했었다고! 네 차를 봐! 저게 큰 사고가 아니야?”

도훈이 살짝 눈을 뜨니, 팀장의 어깨너머로 운전석 문이 떨어져 나가고 운전석 쪽이 크게 찌그러졌으며 앞유리가 박살 난 자신의 SUV가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차를 보니 사고가 작다고는 할 수 없었다.

팀장이 도훈과 시선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천만다행이긴 한데, 머리에 충격을 받았으니 가볍게 넘길 상황은 절대 아닙니다. 구급차 타고 응급실 가세요. 검사받으셔야 합니다.”

“......”

팀장의 목소리가 엄했기에 도훈은 가타부타 대꾸를 않고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누가 그런 겁니까? 혹시, 아까 그 음주운전 적발된 남잡니까?”

“아닙니다. 순서를 기다리던 차가 갑자기 반대 차선으로 치고 나가서 운전자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순찰차 두 대가 쫓아갔으니 곧 잡힐 겁니다.”

“잡아야죠. 이런 짓을 하고도 그냥 도망간 놈인데.”

영배가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얼굴에 핏기가 없는 걸 보면, 도훈이 심하게 다친 줄 알고 매우 놀랐고, 놀란 만큼 뒤늦게 화가 나는 듯했다.

‘... 하기야.’

잠깐이나마 도훈이 기절까지 했었으니, 무리도 아닐 터.

피식.

실소를 흘린 도훈이 입을 열었다.

“... 내 머리보다는 형 심장을 검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농담하는 걸 보니 머리를 다쳐도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네.”

영배가 어이없다는 듯 답했고, 팀장이 말없이 웃는데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품에서 핸드폰을 꺼낸 도훈이 입을 열었다.

“... 실장님이네. 혹시 실장님께 알렸어?”

“아니, 그럴 정신이 없···.”

띠리리! 띠리리!

영배의 핸드폰도 울리더니, 뒤이어···.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도훈의 개인 핸드폰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 이거···.”

“... 아마도?”

영배와 눈빛을 교환한 도훈이 말을 이었다.

“얼른 받아서 나 멀쩡하다고 해.”

“응.”

도훈이 업무용, 개인용 핸드폰의 액정을 차례로 눌러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시장님? 시장님 맞죠? 여보세요, 시장님?

- 시장님? 저 고정임인데요? 시장님? 괜찮으세요?

“......”

동시에 터져 나오는 두진과 정임의 다급한 목소리에 도훈이 쓰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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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이라면 퇴원하셔도 된다고 하겠지만, 충격받은 부분이 머립니다. 당장은 별 이상이 없습니다만, 병원에서 하룻밤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 꼭 그래야 합니까?”

“가능하다면요.”

“그럼···.”

“하루 입원하죠.”

“네.”

“물론입니다.”

“당연한 말씀.”

‘집에 가겠다’는 도훈의 말을 자르고 일제히 입원하겠다는 말을 꺼낸 비서실 직원들.

도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들 입을 다물었는데 한 사람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최소한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 부시장님까지 이러시깁니까?”

“제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이럴 겁니다.”

“저 괜찮다니까요.”

“저희가 안 괜찮습니다.”

“......”

진지한 눈빛으로 도훈을 침묵시킨 전경완이 의사에게 말했다.

“입원은 좀 그렇고, 내일 아침까지 머무르는 건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구석 자리를 내드리죠.”

“고맙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럼.”

의사가 꾸벅 묵례하고 멀어졌고, 두진과 영배, 정임, 영진, 전경완의 한결같은 눈빛을 마주한 도훈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았어요. 여기서 하루 자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한산하니 잠은 잘 올 것 같네요.”

금요일 밤이고 대흥시에 있는 유일한 응급실인데도, 내부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큰 문제가 생기면 대전으로 가는 게 오히려 나으니 응급실로 중환자가 찾아올 일이 거의 없는 병원.

전경완의 말처럼 소란스러워 자지 못하는 일은 없을 듯했다.

“이제 다들 들어가 보세요.”

“네. 그래야죠.”

도훈의 말에 선선히 답했지만, 발을 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배가 119에 신고할 때, ‘사고 피해자가 김도훈 시장’이라고 알리는 바람에 출동지령을 받은 대흥 안전센터장이 두진에게 연락했고 화들짝 놀란 두진은 이 사실을 우선 비서실 직원 톡방에 올리고 도훈에게 전화했다.

전경완은 현장 보고를 받은 지구대장의 연락을 받고 도훈이 사고를 당한 사실을 알았다.

여하튼, 그렇게 여러 사람이 가슴이 철렁하는 일이 있었지만, 도훈은 긁힌 왼쪽 눈 위에 거즈를 붙이고 부은 뒤통수를 냉찜질하도록 아이스팩을 하나 받긴 했으나 주사도 맞질 않았다.

‘... 순심이는 진주네 집에 있으니까 연락만 하면 될 것 같고···.’

속으로 중얼거린 도훈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 걸 물었다.

“저 괜찮다고 다 연락했죠?”

“네. 지구대와 안전센터에 연락했으니 걱정하는 사람 없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시려고요?”

정임이 묻자 도훈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 배웅하려고요. 그러는 김에 담배도 한 대 피고요.”

“한 명은 남아서···.”

“저 주사도 한 대 안 맞았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라도···.”

“됐네요. 조 비서관 얼굴 보면 나보다 더 아파 보여요.”

“... 하하.”

정임과 영배에게 답한 도훈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다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응급실 문 손잡이를 잡은 도훈이 뭔가를 생각해내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나저나 사고 낸 사람은 잡았대요?”

도훈이 병원으로 오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뺑소니 차량 운전자가 차를 버리고 야산으로 달아났다는 것.

바로 뒤에 있던 두진이 답했다.

“아, 차에 세 명 타고 있었다는데 두 명은 잡았고 한 명은 놓쳤다고 들었습니다.”

“... 다른 피해는 안 생겼죠?”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럼 됐네요. 잡히겠죠.”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문을 밀며 중얼거렸다.

“재주도 좋네. 음주운전에 뺑소니를 내고 도망갈 정신도 있고···.”

“... 음주운전도 문제고, 뺑소니도 문젭니다만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 네?”

멈칫.

쓰게 웃으며 중얼거리던 도훈은 등 뒤에서 들려온 두진의 말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두진이 어이가 없어도 더는 없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들이랍니다.”

“... 애들이요?”

“네. 정확하게는 고등학생이라고 하더군요.”

“......”

“우리 대흥시 학생은 아닙니다. 대전 아이들이라고 들었습니다.”

“......”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침묵하던 도훈이 입을 열었다.

“... 그러니까 무면허인 미성년자가 술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뺑소니를 내고는 도망까지 갔다는 말씀이세요?”

“... 네.”

“......”

말문을 잃은 도훈이나 그와 마주한 비서실 직원들과 전경완의 표정은 무척 비슷했다.

고등학생 아이가 있는 전경완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원···.”

전경완에 이어 조상님이 탄식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 ... 허어. 말세다, 말세.

갑자기 흡연 욕구가 확 치솟아 오른 도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도훈도 직원들도, 날이 밝으면 더 어이가 없는 상황이 벌어질 건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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