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오늘도 무사히 - 1.
도훈은 화요일 점심을 교육장과 함께 먹었다.
각각, 비서실장만 대동한 식사자리는 서먹하게 시작됐으나 끝날 때는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너무 감정적이 되어 경솔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시장님.”
“저도 거듭 말씀드리는데,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먼저, 교육장이 자신의 오해와 그로 인한 경솔한 행동을 사과했다.
도훈은 교육장의 마음을 이해한다 답하고 그를 위로하고는, 앞으로 교육장과 더 ‘끈끈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말했다.
이 자리는 시청 직원과 교사들 사이의 감정대립을 조기에 잠재우기 위해 만들어진 분명한 ‘목적’이 있는 자리였지만, 도훈도 교육장도 서로에 대한 개인적 관심을 조금이나마 내비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저는 젊었을 때도, 시장님처럼 원칙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관철하는 건 못했습니다.”
“대신에, 항상 중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거야말로 어려운 일이죠. 이번 일로 교육장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게 됐습니다.”
여하튼,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한 메일과 교육장과의 회동을 통해 시청 직원이 공공연하게 교사들에게 불만을 표하는 일은 없어졌다.
여기에는 전경완 부시장의 활약도 한몫을 했다.
- 공직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시민에게 봉사하는 게 업인 사람들이다. 그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우리끼리 협력하고 합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건, 우리 시청 소속이 아닌 교육지원청 소속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부시장이 그렇게 말하며 직원들을 단속하고 다독거렸기에 시청은 금세 조용해졌다.
화요일로 예정됐다가 연기됐던 미팅도 곧바로 금요일로 다시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도훈에게 대흥시 각급 학교 평교사 열두 명이 비슷한 표정으로 답했다.
자신들이 미팅을 연기했던 것 때문에 시청에 잠시 교사들을 향한 욕이 난무했다는 것을 그들도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도훈이 직접 나서서 그런 직원들을 달랬다는 것도.
그런 사정을 그들은 교육장에게 직접 전해 들었다.
- 나도 잠시 흥분했었으니 면목은 없지만, 앞으로는 좀 더 차분하게 행동하는 게 좋겠습니다. 사실, 소문대로라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는 게 맞아요. 어찌 보면, 김 시장이 침묵한 건 나를 위한 배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러분도 자중해 주세요.
그렇게 다짐을 받은 덕분인지, 간담회에 나온 교사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도훈은 그들로부터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교복이나 학용품 같은 것들, 그러니까 학생이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하는 물건들을 다 구매할 수 있는 형식이면 좋겠죠.”
“중고등학생은 그렇겠지만, 초등학생도 있다는 걸 생각해주셔야 해요. 초등학생은 교복 안 입으니까요. 대신에 방과 후 학교 비용 같은 걸 보조해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현재 각급 학교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것도 좋겠지만, 다른 프로그램을 새로 만드는 것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시 아이들은 문화가 됐든, 교양이 됐든 커리큘럼 이외의 것들을 쉽게 접하기 어려운 환경이잖습니까?”
“다들 좋은 말씀 많이 해주시고, 시장님이나 시청 직원분들도 여러 아이디어가 있으실 거로 생각합니다. 학생이라고 ‘학업’과 관련된 것에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유념하시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열린 저녁 식사를 겸한 간담회는 꽤 긴 시간 열띤 이야기가 오갔고, 술을 제한하고 순수하게 식사만 한 자리였는데도 그런 분위기 덕분에 기분 좋게 마칠 수 있었다.
“또 뵙겠습니다.”
“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간담회를 마치고 먼저 자리를 뜬 도훈은 음식점 밖으로 나와 함께 했던 담당 직원들을 먼저 보내고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기분 좋은 표정으로 담배를 빼 물었다.
“... 휴우. 담배가 맛있네요.”
“그러세요? 다행이네요.”
웃으며 답하지만, 눈초리가 그리 좋지만은 않은 정임에게 도훈이 말을 이었다.
“좀 봐주세요, 정임 씨. 이거라도 있어야 긴장이 풀리죠.”
“글쎄요. 전 흡연자가 아니라서요.”
“... 하하.”
“보건소장님이 은근히 눈치 안 주시던가요? 요즘 보건소 금연프로그램 좋다고 하시던데···.”
“담배가 나쁘고 금연이 좋은 걸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질 않습니까?”
영배가 끼어들어 하소연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고, 정임이 딱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답했다.
“뭐, 제 폐가 아니니까 여기까지만 하죠. 하지만, 분명 조만간 보건소장님이 두 분께 직접 말씀하시는 날이 올 걸요?”
“쩝, 그때는 그때고요.”
영배가 쓰게 웃으며 답했고, 정임도 더는 다그치지 않고 물러났다.
말없이 웃고만 있는 두진과 먼저 차량으로 이동한 영진까지 오늘은 도훈과 비서실 직원 전원이 출동했고, 사회복지실 직원도 셋이나 함께 했다.
시청에서 이 일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앞으로도 잘 풀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격식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이렇게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두진이 말했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담배를 껐다.
“으그그! 드디어 한 주가 끝났네요.”
역시 담배를 끈 영배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고, 다들 주차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대로 그냥 집에 가는 겁니까? 오늘 금요일인데요.”
영배의 말에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간담회 때는 별말 없더니, 역시 ‘한 잔’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전 안 돼요.”
“나도 오늘은 그냥 들어가고 싶네. 조 비서관,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으면 집에 가서 맥주라도 마시던가.”
“... 하하. 시장님?”
정임과 두진의 눈총을 받은 영배가 구원의 눈길을 보냈지만, 도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오늘은 사양하렵니다. 그리고 저랑 조 비서관님은 아직 한군데 가볼 곳이 남았어요.”
“... 가볼 곳이요? 공식 일정은 더 없는데···.”
“있다면 있는 줄 알아요.”
도훈의 말에 두진이 끼어들었다.
“업무상 가시는 거면 저도 가겠습니다.”
“아뇨. 저랑 조 비서관만 있으면 됩니다. 이건, 업무와 관련이 있긴 하지만 다른 목적이 더 크니까요.”
“... 어디를 가시려고?”
의아해하는 두진에게 말없이 웃어준 도훈이 영배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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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대흥시 외곽의 국도 진입로.
“자, 힘껏 부세요. 더, 더, 더더···.”
순찰차 여러 대가 길가에 세워진 가운데, 정복 경찰관들이 국도에서 대흥시로 들어오는 차량의 음주 단속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매번 챙겨주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시장님.”
“다들 고생하시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도훈이 내미는 따뜻한 홍삼 드링크를 받아들며 지구대 팀장이 말했고, 팀장과 친분이 있는 영배가 입을 열었다.
“팀장님, 이거 그냥 흔한 홍삼 드링크 아닙니다. 얼른 드세요, 식기 전에.”
“고마워, 하하.”
도훈과 영배는 미리 준비했던 홍삼 드링크를 따뜻하게 데워서 가지고 나왔다.
도훈이 직원들 격려할 때 쓰려고 좀 많이 사놓은 것으로 가격은 비싸지 않아도 평판은 제일 좋은 것이었다.
홍삼 드링크만 있는 게 아니고 짜 먹는 형태의 보조식품도 두 개씩 나눠줬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분께 세트로 선물하고 싶습니다만···.”
“아이고, 이거면 충분합니다. 지구대에 야식도 배달시키셨다면서요.”
“그거야 뭐···.”
“이거 먹고 이따가 야식까지 먹으면 그게 보약이죠. 먹는 게 남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제가 고맙고요.”
“저희가 감사하죠.”
지구대 팀장이 구김살 없이 웃으며 말했고, 도훈도 마주 웃었다.
시청 직원들도 고생하지만, 지구대와 안전센터 직원들은 시청 직원들보다도 더 고생한다.
도훈에게 관리와 지휘 책임이 없다지만, 대흥시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 어디서든 제일 먼저 뛰어야 하는 이들을 챙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시장님.”
“잘 먹겠습니다.”
차도 사이에 서서 단속하던 경찰관들이 대기하던 이들과 교대하고 홍삼 드링크를 받아들며 인사했고 도훈은 말없이 웃으며 묵례했다.
“음주운전 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단속에 걸렸는지, 차 한 대가 길가로 이동하는 것을 바라보며 도훈이 물었다.
“많았다가 적었다가 합니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줄긴 했는데, 아무도 단속에 안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 술에 너무 관대해서 그런 거겠죠.”
“네. 음주운전은 실수가 아니니까요.”
작년 하반기, 음주운전으로 인한 인명사고가 계기가 되어 음주운전의 처벌을 법적으로 강화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음주운전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고 잘못하는 모든 일을 더는 관대하게‘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었다.
이른바 ‘주취 감경’ 폐지.
술을 마시고 사람을 때리고, 술을 마시고 사람을 흉기로 다치게 하는 등의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론은 ‘실수니까 관대하게’가 아니라 더 엄하게 처벌할 것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청와대 청원에 여러 차례 올라간 이 요구는 아직도 국회에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팀장님! 여기 잠깐만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단속에 걸린 운전자와 씨름하던 경찰관이 불러 팀장이 도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고 영배가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아까 나 들으라고 한 소리냐?”
“... 그냥 그렇다는 거지. 형 술 먹고 사고는 안 치잖아.”
“그렇지. 내가 술은 좋아해도 사고랑은 거리가 멀지.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시지도 않고.”
“그러니까 봐주는 거지. 술 좀 적당히 마셔. 나도 술 좋아하지만, 형만큼은 아니야.”
“쩝. 인정은 하는데, 이번 주가 워낙 스펙터클했잖냐. 그런 한 주가 마무리되니까 술 생각이 났던 거뿐이야.”
“스펙터클은 무슨. 좀 소란한 정도였지.”
“야, 말은 제대로 하라고 했다. 교육장이랑 원만하게 풀고, 선생님들하고도 오해를 풀었으니 망정이지. 교육장님이 계속 너한테 삐져있다고 생각해 봐라.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정신이겠냐?”
“... 틀린 말은 아니네.”
“그래 인마. 그러니까 술 얘기도 나왔던 거지.”
도훈과 영배가 그렇게 잡담하고 있는데, 팀장이 간 곳에서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가 누군 줄 알아? 그냥 넘어가자고, 좀!”
“어허, 선생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도훈과 영배의 시선이 큰 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고, 중년 남자 하나가 경찰관들 사이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 겨우 석 잔밖에 안 마셨다고! 봐봐! 멀쩡하잖아!”
“기계는 거짓말 안 합니다. 선생님은 지금 기준치를 넘으셨어요.”
“아, 씨! 다른 기계 가져오라고, 그럼!”
“... 기다리세요, 잠깐.”
인상을 쓰고 남자에게 답한 팀장이 옆의 경찰관에게 뭐라 말했고, 그사이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꼴불견이네, 진짜.”
“누가 아니래.”
“어휴, 진상들 때문에 술이 욕먹는다. 사람이 죄지, 술이 무슨 죄야.”
“하하, 맞는 말이야.”
도훈과 영배가 바라보는 앞에서 다른 측정기가 남자의 얼굴에 들이밀어졌고, 남자는 다시 ‘다른 기계’ 어쩌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묵묵히 남자의 요구를 들어주던 팀장이 엄한 표정을 짓고 다른 경찰관들의 태도도 달라지자, 움찔한 남자의 목소리는 작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 계속 불응하시면 체포되실 수도 있습니다.”
“아, 불응하는 게 아니고···.”
“자, 마지막 기회를 드립니다. 부시겠어요?”
“아니, 그게···.”
“부실래요?”
“......”
남자의 목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는 걸 본 도훈과 영배가 피식 웃고는 눈빛을 교환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가져온 따뜻한 음료도 다 나눠줬으니 더 있어 봤자 일하느라 바쁜 경찰관들에게 방해만 되지 않겠는가.
단속 현장에 좀 떨어진 길가에 차를 세웠던 도훈이 차 문을 잡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삐익! 삑! 삑삑!
“... 뭐야?”
“그러게.”
각각 운전석과 조수석 문을 잡은 도훈과 영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맹렬한 엔진음과 함께 승용차의 불빛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어, 어? 야, 도훈아!”
깜짝 놀란 영배가 운전석 쪽의 도훈에게 소리쳤을 때, 이미 승용차는 도훈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콰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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