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103화 (104/279)

103. 이상한 소문 - 1.

새해 첫날 늦은 오후.

도훈은 대전 동구의 어느 카페에 와 있었다.

- 아, 김도훈 씨? 나 고정현이라고 합니다. 도훈 씨 아버지 후배예요. 아버지께 연락받았어요. 내가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서 오늘 만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시간 되겠습니까?

아버지 후배라는 양반이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해 와 만나기로 했다.

도훈도 평일에 시간 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이니 차라리 잘됐다는 심정으로, 순심이를 진주네 집에 맡기고 시청 당직실에 잠깐 들렀다가 대전에 나온 터.

‘... 목소리가 나이가 많은 분은 아닌 것 같았는데···.’

아버지 후배라는 분과 통화할 때, 도훈은 상대의 목소리가 ‘어르신’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놓치지 않았다.

곧 연세가 70이 되시는 아버지의 후배에, 현직 경찰이라면 잘해야 50대일 거라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그보다는 젊은 목소리였던 것.

목소리만으로 사람 나이를 가늠하는 건 불완전하겠지만, 말투나 느낌이 중년 미만일 거라는 예감을 들게 했다.

‘... 그나저나 새해 첫날이라고 해도 사람 참 많네.’

‘신정’ 대신 ‘설’을 쇠기 시작한 게 꽤 오래됐으니, 새해 첫날은 명절의 느낌은 거의 없는 휴일 중 하나가 된 지 오래였다.

‘새해’ 첫날이라는 의미도 가볍지는 않겠지만, 카페 유리 벽 너머 길거리에는 추운 날씨에도 휴일을 즐기는 사람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젊은 남녀 커플의 모습이 유독 눈에 많이 띄는 듯했다.

- 자네도 데이트 좀 하고 그러게. 한창때 아닌가? 현직 국회의원도 결혼하고 애 낳고 하는 시댄데, 시장이라고 연애 못 할 건 뭔가? 불륜도 아닌데.

어제, 두진이 ‘깔끔한’ 도훈의 집을 나서며 했던 말 때문인지, 유독 커플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도훈의 어떤 사람의 얼굴이 도훈의 뇌리를 스쳤다.

- 야, 내일 쉬는 데 정말 데이트해라.

- 누구랑?

- 그, 그게···. 아, 꼭 데이트 아니더라도 영화도 보고 맛집 찾아가고 차 마시며 수다도 떨면서 스트레스 풀고 그러는 게 사람 사는 거지. 안 그러냐? 아, 민 과장님한테 연락해 봐. 그 사람도 솔로라던데.

- ......

도리도리.

어제 두진의 말에 맞장구치며 영배가 했던 말 때문인지 머릿속에 떠오른 민세경의 얼굴을 지우려 도훈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주책이다, 김도훈.’

- ... 전혀 아니다, 이놈아. 남자가 여자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야.

‘......’

- 정말 전화해보지 그러냐? 그 처자도 방구석 긁고 있을 줄 혹시 알아?

‘...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아하, 참견은 사양이시다? 누가 뭐래? 에휴, 내가 귀신만 아니었더라면··· 당장 그 처자한테 전화···.

‘... 조상님.’

- 알았어. 입 다문다, 다물어.

조상님이 침묵하자 쓰게 웃고 난 도훈이 중얼거렸다.

“... 내 최근 데이트가 언제였더라?”

도훈이 가장 최근에 여자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건, 회사 다닐 때 1년 후배가 대흥에 놀러 와 밥을 같이 먹었던 게 마지막.

두 번 찾아온 뒤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던 도훈에게 실망했는지 연락이 끊긴 그런 사이였지만, 그걸 데이트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나 진주가 이따금 한마디 하는 게 무리는 아니네.”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뭐가 무리가 아니라는 겁니까?”

조금 놀란 도훈이 뒤를 돌아보자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김도훈 씨 맞죠?”

“... 고정현 씨 되십니까?”

“네. 내가 고정현입니다.”

도훈이 몸을 일으켜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도훈입니다.”

“우리 처음 본 거 아닌데요. 하하.”

“... 네?”

“도훈 씨는 기억 안 나는 것 같은데, 우리 만난 적 있어요. 어릴 때 얼굴이 조금 남아 있어서 쉽게 알아봤습니다. 여하튼, 반가워요.”

고정현이 내민 손을 도훈이 맞잡았고 고정현이 힘차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말로 반가운 듯한 40대의 남자를 도훈은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

얼마 뒤.

“흠, 그런 종류의 일이 조금이라도 근거가 있다면, 지방청 수사과에서 모를 리가 없어요. 정식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첩보 단계라도 말이죠.”

“... 정보와 첩보는 다른 겁니까?”

“정보는 신빙성이 51% 이상, 그러니까 상당한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 거고, 첩보는 그 신빙성이 검증되지 않은 거로 생각하면 돼요.”

“... 네.”

도훈의 설명을 들은 고정현이 현직 경찰로서 의견을 말했다.

눈이 좀 부리부리한 것 말고는 그다지 경찰관 느낌이 안 나는 고정현은 이제 마흔다섯으로 도훈과는 아홉 살 차이가 난다고 했다.

“잠깐만요. 내가 충남청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한테 한번 물어볼게요. 전화 한 통 하고 오죠.”

“아, 네.”

고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품에서 핸드폰을 빼 들고 카페 밖으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

‘... 본 적이 있다고? 전혀 기억이 없는데···.’

정년퇴직 전의 아버지는 집에 친구나 동료를 데리고 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도훈과 도연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퇴근하면 그대로 집으로 오는 게 거의 일상이었고, 그나마 아주 간혹 회식 같은 것에 참여하게 된 것도 도훈이 중 3 정도 되어 혼자서 도연이를 돌보는 게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뒤부터였다.

다만, 도훈이 등하교 중간에 아버지의 파출소를 들르기를 아주 자주 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같이 근무하던 직원 중 도훈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고 그 와중에 아버지의 동료 중 정말 친한 몇은 도훈도 안면을 익혔다.

그런데 도훈의 기억에 고정현은 없었다.

‘... 아버지가 전화해서 날 도와주라고 하셨다는 걸 보면, 정말로 친하다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와 고정현의 접점이 잘 그려지지 않아 도훈이 어리둥절해 하는데, 통화를 마친 고정현이 돌아왔다.

“알아봤는데, 전혀 사실무근은 아닌 것 같더군요.”

“... 그렇습니까?”

“그쪽에서 꼬치꼬치 캐묻더라고요. 어디서 알았냐고. 그래서 내가 입조심시키고 어디 소문 안 나게 할 테니까 관심 두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고정현이 말했기에,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경찰에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라면, 굳이 저는 아는 척할 생각 없습니다. 우리 시청 일도 아닌데, 나서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고요. 모른 척 조용히, 아니 그냥 잊어버리고 말겠습니다.”

“하하, 네. 그게 좋겠습니다. 눈치로 봤을 때, 곧 충남청에서 뭔가 행동에 나설 것 같거든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투서 보낸 사람이 꽤 화가 난 것 같았거든요.”

“다행히 본론은 해결된 것 같네요.”

“네, 덕분입니다.”

고정현이 싱긋 웃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도훈은 궁금했던 걸 입에 올렸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 아버지와 어떤 인연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음. 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겁니까?”

“죄송하게도 그렇습니다.”

씨익.

고정현이 진한 미소를 머금더니 핸드폰 액정을 보고 시간을 확인한 뒤 말을 이었다.

“아마 조금만 기다리면 아주 기억이 생생한 누군가가 올 겁니다.”

“... 누가 또 옵니까?”

“네. 곧 올···. 아, 저기 오네요.”

그렇게 말한 고정현 반가운 얼굴로 손을 들고 흔들었기에 도훈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휘둥그레 크게 떴다.

“도훈아!”

“... 설마···?”

“나야, 인마!”

도훈의 뒤에는 30대로 보이는 차분한 느낌의 미녀가 하나 서 있었다.

풍기는 느낌은 차분하나 실제 성격은 전혀 다르고 도훈의 기억이 맞다면, 그녀 역시 현직 경찰관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도훈이 생생히 기억하는, 아버지가 아끼던 후배였다.

“... 서, 서진이 누나?”

“그래! 이게 얼마 만이니!”

왈칵.

의자에 앉은 도훈의 목을 붙들고 격하게 흔드는 ‘서진’이라는 여자를 보며 고정현이 담담히 웃고 있었다.

-----

잠시 뒤.

“그럼 서진이 누나 남편이···?”

“그래. 이 사람이야.”

“......”

방긋 웃는 차분한 느낌의 미녀의 이름은 여서진.

그녀는 도훈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가 근무하던 파출소로 전근 온 경찰관이었고 아버지와 같은 조로 근무했었다.

도훈과 딱 열 살 차이가 나는 순경이었던 여서진은 도훈과 도연을 무척 귀여워해 여러 번 어울린 적이 있었다.

외모는 저래도 성격은 괄괄한 편인 그녀는 도훈과도 친했지만, 도연이가 정말 그녀를 좋아해 무척 잘 따랐었다.

그녀가 결혼한 건 도훈이 대학에 입학한 뒤여서, 도훈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었다.

“... 어쩐지 아버지 후배라는데 누나 남편분이 전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너는 거의 못 봤지. 사실, 오늘 선배님이 나한테 전화하셨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이 사람을 내보낸 거야. 뭐, 이 사람도 네 아버지를 선배님으로 챙기는 건 똑같으니까.”

“가만···. 그러고 보니까 생각나는데, 남편분이 전북청 전경 소대장으로···.”

도훈의 시선을 받은 고정현이 웃으며 답했다.

“맞아요. 그러다 출동 나가서 와이프 처음 보고 홀딱 반했었죠. 외박 때마다 찾아가서 사귀자고 졸랐고 결국 사귀게 됐죠. 그 와중에 도훈 씨 아버님 김인식 선배님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하하.”

도훈은 아버지에게 여서진의 결혼 소식을 들을 때, 연하인 남편이 전경 소대장일 때 처음 만나서 결혼까지 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네 아버지께 내가 이따금 연락 드리거든. 그래서 네가 대전 가까이 산다는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는데, 나도 바빠서 연락 못 했다. 저번 선거 때, 너 뉴스에 나온 거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어.”

“... 설마 저보다 놀라셨겠어요.”

“어쨌든, 그 후로도 좋은 얘기가 많이 들려서 기분 좋다. 매사 심드렁으로 일관하던 그 고딩이 시장이라니, 나는 아직도 잘 안 믿겨.”

“... 하하.”

도훈은 오랫동안 정말 오래간만에 만난 여서진과 밀린 얘기를 나눴다.

얘기 중, 고정현은 계급이 총경이고 대전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하고, 여서진은 경위로 대전의 경찰서에서 근무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 누나가 경위라니, 시간이 오래 지나긴 지났네요.”

“뭐, 인마?”

주먹을 들어 보이며 눈알을 부라리는 여서진의 모습에 도훈은 피식 웃었다.

저런 그녀를 고등학교 때도 자주 봤었으니까.

커피를 추가 주문하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누나, 반갑긴 한데 오늘은 이만 일어나죠. 누나도 애들 챙겨야 할 거 아니에요?”

“웃기고 있네. 밥 먹으면서 소주 한잔해야지. 애들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거야.”

“... 하하, 저기 고 총경님?”

“하하, 밖에서는 내가 상급자지만, 집에서는 아무런 권한 없어요.”

“......”

“잔말 말고, 저녁 먹으면서 한잔 하고 가. 차 가지고 왔냐? 대흥시 가까우니까 대리비는 내가 주마.”

“그래요. 나도 김 시장님 아버님을 정말 좋은 선배로 기억하고 있고 간간이 집사람 통해서 연락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같이 저녁 먹죠.”

“......”

“우리 남편 말 들었지? 잔말 말고 따라와.”

그렇게, 도훈은 꼼짝없이 고정현, 여서진 부부에게 끌려갔고, 저녁을 겸한 1차에 호프집에서 2차까지 술을 마셨다.

술자리를 통해 ‘도훈 씨’, ‘고 총경님’이라는 어색한 호칭은 형님, 동생으로 정리가 됐다.

- 안 그래도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형님이라고 해. 누나 남편한테 말끝마다 ‘고 총경님’하는 게 이상하지 않냐?

여하튼, 그렇게 마음에 걸렸던 일도 해결하고 오래간만에 아주 반가운 사람과 즐거운 시간도 가진 뒤 도훈은 대흥시로 돌아왔다.

- 또 보자. 그리고 사는 곳도 가까운데, 자주 좀 보자. 누나가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 그래, 도훈아. 앞으로 종종 보자.

도훈을 배웅하며 부부가 말하자 도훈은 ‘토’를 달았다.

- 시장도 바쁘지만, 경찰도 아주 바쁜 직업으로 알고 있는데요?

- 시끄러워, 인마. 누나가 자주 보자면 ‘넵’하면 되는 거지!

- ... 네.

그렇게 새해 첫날, 생각도 못 하고 있다가 반가운 사람과 재회했고 고심했던 일도 쉽게 해결됐기에 도훈은 새해 운세는 좋을 거라고 여겼다.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서, 이상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기 전까지는.

# 10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