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연말연시 - 2.
“한 해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새해에도 잘 부탁합니다.”
“시장님이야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오 계장님, 엊그제 감사했어요.”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요.”
“아파트 동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시장 한 번 참석하게 해달라고 오 계장님이 그렇게 자기를 들들 볶았다고요.”
“그분이 연세가 있으셔서 좀 보수적이시거든요. 시장님에 대한 선입견이 있으셨겠죠. 그래서인지 시장님 가신 뒤에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고 하시더라고요. 자기 자랑 하나도 안 하고 주민참여만 강조하셨으니 그러고도 남죠.”
“여하튼,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저야 말로요.”
도훈은 시청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인사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수고한 직원들에게 그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예의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들 보세요.”
세무회계과를 나선 도훈이 바로 옆 사무실로 들어갔다.
“인사하러 왔습니다. 올 한해 고생들 많으셨어요.”
“이렇게 웃으며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으니 좋네요.”
“그러게요.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대강당에 잠깐 직원들을 모아놓고 얘기하는 시간을 갖자는 얘기도 있었지만, 도훈은 할 얘기는 메일로 보내고 직접 직원 개개인과 인사하는 걸 택했다.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인사할 사람은 자신인데 인사받을 사람을 불러모으는 게 말이 안 된다나.
“시장님, 요새 구일이가 SNS에서 핫한 거 아세요? 꽤 인기 많습니다. 구일이말고도 송아지 사진이 많이 돌아다녀요. ‘댕댕이’, ‘냥이’에 이어 송아지의 시대가 오려나 봐요.”
“음, 송아지도 사람을 ‘심쿵’하게 만들 충분한 매력이 있죠. 다 자라도 그 눈만큼은 참···.”
“역시, 애견인이라서 그런지 시장님도 소의 매력을 잘 아시는군요!”
“애견인 아니라도 그 눈빛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 많지 않을 걸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농림과 직원들과 대화하는 도훈의 한 발 뒤에 영배가 서 있었다.
말없이 도훈의 뒤를 따르는 영배는 언제나처럼 직원들에게 싱글거리고 있으면서도, 간간이 도훈에게 차분한 시선을 보냈다.
“그럼 수고들 하시고요.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농림과 사무실을 나온 도훈은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다 걸음을 멈췄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도훈이 멀뚱히 선 영배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 뭐야?”
“... 뭐가?”
“아까부터 왜 그렇게 사람을 관찰하는데?”
“... 들켰냐?”
“내가 형이랑 하루 이틀 알고 지냈냐?”
“... 하하.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너야말로 뭐야?”
“나? 내가 뭐?”
“내가 너랑 하루 이틀 알고 지냈냐? 뭔가 목구멍에 딱 걸린 게 있는데 그걸 억지로 참고 있는 그런 모양샌데, 도대체 뭐야?”
“......”
도훈은 답을 안 하고 가만히 영배를 바라봤다.
티를 안 내려고 나름 노력했는데, 영배에게는 그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 무리도 아니지. 아까 무심히 네 방에서 나올 때는 표정관리 전혀 안 되어 있었다.
‘... 말씀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 앞으로는 ‘혼자서도 잘해요’로 가기로 한 거 아니었냐? 그런 사소한 건 알아서 해야지, 인마.
‘......’
도훈이 조상님과 대화하는 데 영배가 말을 이었다.
“뭔데 말을 못 해? 응?”
“... 이따가 얘기해줄게.”
“......”
빤히 도훈을 바라보던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푹 한숨을 쉬었다.
‘... 분명 좋은 일은 아니구만. 휴우.’
“이제 됐지?”
“네, 됐습니다, 시장님. 마저 인사하러 가시죠.”
“......”
“가자니까요.”
“... 그러죠.”
도훈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고, 영배가 뒤를 따랐다.
‘... 이번엔 또 뭔 일이려나?’
표정을 수습하며 영배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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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오후 6시가 조금 지난 시각, 도훈의 집.
“흠, 자네 생각보다 깔끔하게 해놓고 사는구만?”
“... 왜 제가 안 깔끔한 환경에서 살 거로 생각하셨는데요?”
“총각이잖아. 순심이도 있고 말일세. 총각에 애견인이면 좀 지저분하겠구나 싶었지.”
살림살이는 많지 않지만 청결한 상태인 도훈의 집을 두리번거리며 두진이 말했고 영배가 맞장구를 쳤다.
“쟤는 괴짜잖습니까, 실장님.”
“그건 그러네만 이런 면도 남다를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
“유별난 거죠.”
“그런가?”
집주인을 앞에 놓고 두진과 영배가 하는 말에 도훈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집 깨끗하게 해놓고 사는 남자도 많습니다. 솔로든 결혼했든지 간에 상관없이요.”
“그런 사람들도 있겠지. 내 눈앞에도 지금 하나 있고.”
“......”
너스레를 떠는 두진의 모습에 도훈은 할 말을 잃었지만, 그와 영배가 저러는 건 자신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기분 때문인지 오후에 자신의 표정이 굳어져 있다는 걸 문득문득 깨닫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시고 일단 앉으십시오. 차 드릴까요?”
“따뜻한 거면 아무거나 좋네.”
“형은?”
“난 모과차.”
“실장님도 모과차 드리겠습니다. 괜찮죠?”
“그래.”
두진과 영배가 거실 좌식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도훈은 차 세 잔을 타서 날라왔다.
“좋은 얘기는 아닌 게지?”
“...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오후에 자네 표정이 좀 나쁜 것 같았고, 좋은 얘기면 굳이 자네 집까지 날 데리고 올 필요가 없을 테니까.”
도훈의 시선이 두진에게서 영배에게 옮겨졌고, 영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실장님과 동감이야.”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도훈이 옆에 놓인 가방을 열어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식탁에 올려놨다.
“읽어보세요. 오늘 받은 평가서 중의 하나입니다.”
두진이 먼저 손을 뻗어 봉투를 집고 안에서 종이를 꺼냈다.
“... 응?”
종이에 적힌 글을 읽어내려가던 두진이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더니 이내 눈가를 좁히고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했다.
‘... 내용이 내용이니만큼 무리는 아니지.’
이미 내용을 아는 도훈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이, 두진은 첫 장을 영배에게 넘겼고 이내 영배도 비슷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설마···?”
도훈은 입을 열지 않고 두 사람이 투서를 다 읽을 때까지 모과차를 마시기만 했다.
곧 두진과 영배가 세 장의 투서를 다 읽었다.
“... 다 읽었다.”
“잠깐 기다려.”
“응?”
영배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자 도훈이 두진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두진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 이거 진짜일까?’
두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지 영배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물었고, 도훈이 같은 방식으로 답했다.
‘... 모르지. 그러니까 기다리자고.’
평가서가 아닌 투서인 것은 맞지만, 투서에 적힌 대상이 도훈으로서는 판단하기가 모호했다.
전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업무 때문에 지난 반 년간 직접 두 번 만나고 몇 번 전화로 통화한 게 전부.
그리고 투서의 내용으로 보아, 꼭 그 사람이 아닌 그 아랫사람에 의해 벌어진 일일 수도 있었다.
물론, 투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말이다.
“... 흠, 이거 애매하네.”
한참 만에야 눈을 뜬 두진이 입을 열었고, 영배가 입을 열었다.
“그렇죠, 실장님? 우리 관할이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법적으로는 분명 우리 관할이 아니야. 시에 소속된 이들이 아니고, 채용 및 관리도 우리가 아닌 교육지원청에서 하니까 말일세.”
“... 네.”
“하지만, 대흥시에서 근무하고 우리 아이들을 관리하고 있으니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고···.”
투서는 ‘채용비리’와 관련된 것이었다.
정식 공무원이 아닌 무기계약직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시청에 소속된 이들이 아닌 교육지원청 소속의 교육공무직원 중 금품을 제공해 채용된 이들이 ‘복수’, 그것도 ‘다수’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대흥시에 있는 학교나 공립유치원 등에서 근무한다고 해도 그들은 금산군 교육지원청에서 채용해 배치된 것.
시에서 그 인원들과 때때로 협력하거나 지원 같은 건 해도 채용 및 관리 책임은 분명 교육지원청에 있었다.
“혹시 이 투서에 언급된 내용과 비슷한 얘기나 소문 같은 것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 없네. 그래서 더 판단하기가 어렵군.”
“교육지원청장이나 청 내 고위급이 관련 있을 거라는 얘기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그래. 그쪽에 아는 사람 몇 있네만, 이런 얘기 들어본 적이 없거든.”
“......”
도훈도 두진처럼 난감한 표정이 됐다.
차라리 대흥시청 내부의 문제라면 감사팀을 동원하든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든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하지만, 대흥시에서 근무하고 대흥시 아이들을 관리하는 이들임에도 시청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권한이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교육지원청장에게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귀띔하는 정도?
하지만, 그것도 투서의 내용이 사실이어야 가능한 얘기가 아닌가.
권한도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귀띔’하려고 사실 확인에 나설 수도 없는 일.
“그나저나··· 이 투서는 사회복지실 직원이 낸 것일까요?”
사회복지실에 청소년, 보육, 아동과 관련된 팀들이 있어 학교나 유치원과 관련한 일을 다뤘다.
아무래도 업무상 그쪽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이들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모양.
하지만, 두진의 생각은 좀 달랐다.
“...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단정할 수가 없지. 투서 느낌이 상당이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나? 이건 어떤 아빠나 엄마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는 이에게 분노해서 썼다고 볼 수도 있지.”
“... 그도 그렇네요.”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시며 제각기 생각에 잠겼다.
그냥 수사기관에 제보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공공기관을 들쑤시거나 발칵 뒤집어엎을 수도 있는 일이다 보니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건가?”
두진이 입을 열었고 눈을 감고 담담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던 도훈이 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 일단 최대한 은밀하게 알아볼 수 있는 만큼 알아보죠.”
“꼭 그래야 하겠나?”
“... 우리 시민들, 그것도 아이들과 관련된 사람들의 일입니다. 아예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투서를 받은 이상 외면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소문 안 나게 주의해야 하네.”
“물론입니다.”
도훈의 말을 마치고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고, 보고 있던 영배가 한숨을 쉬고 투덜거렸다.
“휴우. 이거 애매한 일로 연말연시에 궂은일 하게 생겼네.”
다른 두 사람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실내에 그윽한 모과 향이 그윽하게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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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오늘은 휴일 근무를 하지 않기로 했기에, 도훈은 오래간만에 늦잠을 자고 아침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났다.
끼잉.
“... 미안하다, 인마.”
순심이의 심상찮은 눈빛을 알아챈 도훈은 물그릇의 물을 갈고 사료를 채워줬다.
출근하는 날은 일찍 아침을 먹기에 거기에 익숙해진 순심이는 밥 안 주고 자는 주인이 야속했으리라.
“아버지께 전화는 드려야지.”
개인 핸드폰을 집어 든 도훈이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 왜?
누가 아버지 아니랄까 봐, 아버지는 대뜸 용건부터 물었다.
“... 새해 문안이요.”
- 뜬금없기는. 오늘은 출근 안 했냐?
“네. 아버지 뭐하고 계셨어요?”
- 밥 먹고 설거지하고 책보고 있었다.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 너보다 나을걸?
“식사는 잘 챙기시죠?”
- 당연하지.
도훈은 계속 질문을 던지며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갔다.
딴 때와는 달리, 아버지는 귀찮아하는 기색이긴 했어도 말을 자르고 끊거나 하지는 않았다.
질문 거리가 막힌 도훈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걸 입에 올렸다.
“아버지, 혹시 투서 받아보신 적 있어요?”
- 투서?
“네.”
잠시 침묵하던 도훈의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 누가 너한테 투서를 보냈어?
“음, 투서 한 장만 받은 건 아니고요. 어떻게 된 거냐면···.”
도훈이 설명했고, 상황을 이해한 아버지가 말했다.
- 그런 경우라면 성격이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단독으로 날아오는 투서는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 다분히 의도가 있는 거니까.
“... 네.”
- 옛날이라면 모르겠는데, 요즘은 전보다 법 집행 과정이 개선된 게 사실이고 불합리한 일 고발하고 호소할 방법이 많잖아. 완벽하진 않지만 말이다.
“... 그렇죠.”
- 그런데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그쪽 계통을 밟지 않고, 수사기관에 알린 것도 아닌 네게 그런 게 전해졌다는 게··· 나로서는 좀 신경이 쓰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지구대, 파출소 근무를 오래 하기 전, 도훈의 아버지는 꽤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형사였다.
- 뭐, 알아본다고 해서, 그리고 그러다 혹시 소문이 난다고 해서 네가 큰 불이익을 당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지만 신중하게 하는 게 좋겠다.
“네. 안 그래도 그러려고요.”
- 대답은 잘하네. 알아볼 방법 있어? 너한테 수사권이 있는 것도 아닌데.
“... 조심스럽게 묻는 수밖에 없겠죠.”
- 웃기고 있네. 그런 은밀한 일을 초심자가 사람들에게 묻고 다닌다고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냐?
“......”
아버지의 심드렁한 추궁에 도훈은 말문을 잃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 다행히 너희 동네에 내가 아는 현직 후배 놈이 있어. 소개시켜 줄 테니까, 걔한테 물어봐.
“... 진짜요? 아니 왜···.”
- 시끄럽고, 끊어.
뚝.
왜 진즉에 알려주지 않았냐는 말을 하려던 도훈은 말문이 막혔다.
근처에 아버지 지인이 현직 경찰관으로 있다면, 진즉에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 아닌가.
“... 하여튼 우리 아버지 못 말려.”
쓰게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훈은 주방으로 가 ‘아점’을 차리기 시작했다.
곧 만날 아버지 후배가 어떤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그리 무심하게 행동하지 못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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