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긴 밤 - 3.
“뭐? 알았어. 펌프차 한 대 더 보낼게.”
농가에 배치된 펌프차의 소방대원과 연락한 안전센터장이 펌프차의 배치를 바꿨다.
“1호차. 현 위치에서 방수 중단하고 2호차가 가 있는 농가로 이동해!”
- 알겠습니다.
“금선 의용대 펌프차가 현재 1호차의 위치에 들어갑니다. 준비됐어요?”
- 바로 갑니다!
“의용대는 원거리 방수만 하세요. 가까이 접근하거나 산에 올라가는 거 절대 금집니다!”
- 알겠습니다.
도훈이 곁에 다가와 있다가 센터장에게 말을 걸었다.
“들으셨나 보군요.”
“네. 대피해야 할 상황이 되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선 농가에 불이 옮겨붙는 건 최대한 막아야죠.”
“펌프차 두 대로 될까요?”
“다른 의용대 펌프차가 도착하면 3호차도 보낼 겁니다. 정식대원이 아닌 의용대대원에게 불에 맞서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할 겁니다.”
도훈이 뒤로 물러나 다시 농가 현장에 있는 직원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 네, 시장님.
“곧 거기로 펌프차가 한 대 더 갈 겁니다.”
- 펌프차 한 대요? 그거로 될지 모르겠습니다.
직원의 음성에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면 의용대 펌프차가 도착하면 한 대 더 갈 수도 있는데, 그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 ... 네.
“상황은 어때요? 위험한 거 아닙니까?”
도훈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 불이 이쪽 사면으로 넘어오긴 했는데, 조금 전부터 펌프차가 물을 뿌려 가까운 곳에 불이 붙는 걸 방지하고 있습니다.
“벌써 집 가까이 까지 불이 왔어요?”
- 그건 아니고요. 말라 있는 나무나 풀을 미리 물에 적시는 겁니다. 그리고 농가가 야산에 딱 붙어있는 게 아니까 집은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진 않습니다.
“지금 이 주무관님이 위험한 상황은 아닌 거죠?”
- 아직은요. 축사 안에 있는 분들이 문제죠.
당직자의 말에 따르면, 농가는 야산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 있는데 그사이에 축사가 있단다.
농가가 축사에서 키우는 건 소이고, 10여 마리 정도의 소는 이미 축사에서 빼내 멀찍이 옮겨 묶어놓은 상태.
문제는, 하필 이 시점에 새끼를 낳기 직전인 어미 소가 한 마리 있어 소 주인 부부가 축사에서 그 어미 소를 돌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통 중인 어미 소가 주저앉아 있는데 새끼는 아직 나오지 않아, 억지로 끌어낼 수도 없고 사람이 적어 들고 나를 수도 없는 그런 상태란다.
‘... 안 되겠네. 아무래도 가봐야지.’
현장 지휘는 안전센터장이 할 테고 센터장이 요청한 것들도 두진과 의용대 여성회장이 상의해 준비할 테니 당장 도훈이 여기서 할 일은 없었다.
“내가 지금 그리로 가겠습니다.”
- 여, 여길요? 오셔서 어쩌시려고요?
“안되면 들고 나르기라도 해야죠. 기다리세요.”
- ...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도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저만치 플래카드 게시대를 발견하고 얼른 뛰어갔다.
뒤따라온 홍영진이 플래카드를 묶은 끈을 푸는 도훈에게 물었다.
“이걸로 뭐하시게요?”
“사람이 소를 들고 날라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맨손으로 나르는 것보다 이걸 밑에 깔면 그래도 좀 낫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겠네요.”
도훈이 영진의 도움을 받아 플래카드 두 개를 풀어 챙겼다.
“차로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네. 그리고 우리끼리만 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테죠.”
농가로 이어지는 불이 난 야산 옆 도로는 소방차들이 늘어서 물을 뿌리는 중이니 논 사이로 난 좁은 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에라도 갈 수야 있지만, 달랑 도훈과 영진 둘이 간다고 소를 들 수는 없을 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훈은 차단선 근처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장 계장님!”
“아, 시장님.”
금선면 주민센터 직원 넷이 도훈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현장 둘러보러 오신 겁니까?”
“네. 센터장님이 보내셨습니다.”
도훈은 됐다 싶은 마음으로 직원들을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당장 여기서 할 일은 없을 겁니다.”
“네. 안 그래도 방금 센터장님과 통화를 마쳤습니다. 당장은 인력 지원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고요.”
“그러셨군요. 여기 말고 우리가 필요한 곳이 있긴 있어요.”
“어디요? 누굴 도우면 됩니까?”
질문하는 계장에게 도훈이 담담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여러분들, 힘 좀 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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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들어!”
“끄응!”
“으랏차!”
“힘 좀 써!”
잘린 플래카드 끝을 잡은 열 명에 가까운 사람이 죽으라고 힘을 썼고, 늘어진 암소가 살짝 땅에서 떠올랐다.
“가요!”
“끄응!”
“크앗!”
옆으로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이 축사에서 빠져나왔고, 축사 지붕 너머로 야산의 불길이 보였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재와 불똥이 떨어졌지만, 무거운 걸 들고 있으니 피할 수도 쳐낼 수도 없는 상황.
“앗뜨!”
“콜록!”
“억!”
머리에 불똥이 튄 누군가 놀란 소리를 토해냈고, 숨 쉬다 재를 들이마신 누군가가 기침했다.
힘을 쓰느라 잔뜩 인상을 쓴 도훈이 고함쳤다.
“계속 가요! 좀 더!”
“으쌰! 으쌰!”
“영차! 영차!”
음메에.
늘어진 암소가 울음소리를 냈는데, 오랜 산통에 지쳤는지 기운이 너무 없었다.
그러나 당장은 그것보다 축사에서 멀어지는 게 더 중요했다.
달려든 사람 모두가 안간힘을 쓴 덕분에 조금씩이나마 축사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자, 잠깐 쉬었다 가죠!”
“그래요! 끄응.”
한 사람의 비명과도 같은 말에 다른 사람이 동의했고, 도훈이 얼른 말했다.
“자,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놓죠. 하나, 둘, 셋.”
“끄응!”
“으, 으라차!”
조심스럽게 소를 내려놓은 사람들이 플래카드를 손에서 놓고 숨을 토해냈다.
“아이고!”
“에고, 숨넘어가는 줄 알았네.”
농가 주인에 경찰관 하나, 미리 도착했던 시청 당직자에 도훈과 영진, 두 사람과 함께 온 주민센터 직원 넷.
아홉이나 되는 남자가 달려들었음에도 육중한 암소를 나르는 건 쉽지 않았다.
“아이고, 아저씨. 소를 너무 잘 먹이신 거 아닙니까?”
“헉, 헉. 얘는 평균이에요. 새끼를 뱄으니 좀 더 무겁긴 하겠지.”
“체중이 얼마나 되는데요?”
“300킬로 조금 넘을걸요?”
“아이고, 어쩐지 힘들더라.”
무게도 무게지만, 산통이 오래되어서인지 소가 힘없이 늘어져 더 무겁게 느껴졌다.
농가 안주인이 소의 머리맡에 붙어 머리를 쓰다듬고 있긴 했지만, 소는 버둥거리지도 않고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숨을 돌린 도훈이 잠시 소를 살펴보고 주인에게 물었다.
“이 녀석, 괜찮은 겁니까?”
“모르겠어요. 처음 새끼 밴 녀석인데, 소도 초산이 좀 어렵긴 하거든요? 근데 얘는 좀 유별나네요.”
“유별난 걸 넘어서 너무 지친 것 같은데요? 탈진한 거 아닙니까?”
“그러게요. 오후부터 산통이 시작됐는데 지금껏 이러고 있으니···.”
“수의사 부르셨어요?”
“전화는 진즉에 했죠. 그런데 오후에는 다른 데 일이 있어서 못 왔고, 지금은 저놈의 산불 때문에···.”
소방차 두 대가 진즉부터 열심히 물을 뿌리고 있어서 산불이 어느 정도 이상은 집 쪽으로 번지지 않고 있었지만, 집 바로 옆 멀쩡한 야산에 붙은 산불을 보고도 달려올 간 큰 수의사는 많지 않을 터.
게다가 농가까지 이어지는 소로에 소방차들이 늘어서 있으니 차가 들어오기도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일단, 저만치 집 앞으로 옮겨놓고, 옮겨놓은 다음에 고민하시죠.”
영진의 말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플래카드를 잡았다.
“자, 다시 힘 좀 씁시다.”
“네.”
사람들이 다시 플래카드를 쥐고 힘을 썼다.
“자, 하나, 둘, 셋! 들어요!”
“끄응!”
“영차!”
저만치 불길이 넘실거리는 야산을 배경으로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 다시 힘을 썼다.
잠시 뒤.
털썩.
“아이고! 나 죽네.”
“헥! 헥!”
“후우. 간만에 힘 좀 썼다고 머리가 핑 도네요.”
축사로부터 좀 떨어진 집 앞에 암소를 옮겨놓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고생하셨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가만, 내 정신 좀 봐. 목마르실 텐데 물이라도 드려야지.”
“괜찮습니다.”
“그래도 경우가 아니죠. 잠깐 기다리세요.”
직원이 사양했으나 농가 안주인이 집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도훈은 피식 웃고 중얼거렸다.
“불이 활활 타는 산을 배경으로 하는 대화치고는 참 한가롭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
영진이 맞장구쳤고, 도훈의 말을 들은 다른 이들도 말없이 웃었다.
소방관들이 열심히 물을 뿌리고 있어 산불이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하늘에서 불똥이 떨어졌다.
다행히도 집은 그 범위 밖에 있었지만, 축사는 사정이 달라서 축사 지붕에 연신 재나 불똥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붕은 불붙는 재질이 아니고, 축사 주변의 짚이나 다른 탈 만한 것들은 이미 소방관들이 조치해 불이 번지지는 않고 있었다.
“아이고, 이 녀석아! 기운 내!”
주인이 늘어진 소의 머리맡에서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고, 도훈이 곁으로 다가갔다.
“수의사에게 연락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러다가 일 나겠어요.”
“그래야겠어요.”
“저희가 온 쪽으로 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 수의사님도 이해해 주시겠죠.”
“네.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네요.”
주인이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훈은 가만히 누워있는 소를 내려다보다가 무심코 소의 콧등을 쓸어주었다.
“조금만 기운 내라.”
몸을 일으킨 도훈은 핸드폰을 꺼내 두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시장님. 아직도 그 농가에 계십니까?
“네.”
- 위험하신 거 아닙니까?
“소방관들이 잘 해주고 있어서 당장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 그래도 웬만하면 시청으로 돌아오시죠.
“한 가지만 더 처리하면 그렇게 할 겁니다. 다른 상황은 어떻습니까?”
- 금선면 주민센터 직원은 소집 완료했다고 연락을 받았고, 다른 직원들은 여전히 대기하라고 해놓은 상탭니다.
도훈이 야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전 직원을 소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산불이 잦아들고 잔불 정리를 돕는 건 금선면 직원들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른 소방서에서도 지원 온다고 했으니까요.”
- 네.
“소방대원들 지원은요?”
- 여성회장님이랑 얘기해봤는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몸 녹일 수 있도록 불을 피울 드럼통도 준비했고, 뜨끈한 국물에 국수를 말아 야식으로 제공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양은 넉넉히 준비할 거고요.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건가요?”
- 훌륭하다고는 못해도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겁니다.
화재 상황에서 사소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힘들게 화재진압을 한 뒤 후줄근한 모습으로 컵라면을 먹는 소방관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기에, 도훈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지금 도훈의 저만치 앞에도 여러 소방관이 세찬 맞바람을 맞으며 물을 뿌리느라 흠뻑 젖은 상태로 소화에 임하고 있었다.
방화복을 입고 있다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터.
- 여성대 회장님을 믿으세요. 야무진 분입니다.
“... 알겠습니다. 이런 얘기도 상황이 심각하지 않으니까 할 수 있는 거겠죠.”
- 네. 그게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야산은 어쩔 수 없지만, 더 이상의 재산, 인명피해는 막을 수 있다는 게 천만다행인 상황.
처음 ‘산불’ 얘기를 들었을 때, 다들 온갖 상상을 하며 놀라고 굳어졌던 것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 이젠 이만하길 천만다행이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좀 더 있다가요.”
통화를 마치려던 도훈의 시선이 저만치서 통화하는 농장 주인을 스쳤다.
“아니, 박 원장. 지금 우리 소가 다 죽게 생겼다니까? 오후 내내 산통을 앓고 있는 게 어디 정상이야? 지금 누워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다고. 우리 집이 아니라 내 속이 다 타들어 간다고, 지금!”
아무래도 얘기가 잘 안 되는 듯, 답답한 표정으로 연신 뭐라 얘기하고 있는데 상대의 반응이 부정적인 모양이었다.
안쓰러운 시선으로 가만히 주인을 바라보던 도훈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 실장님.”
- 네. 말씀하세요.
“혹시··· 수의사 잘 아는 분 있으십니까?”
- 네? 이, 있긴 있죠. 혹시, 거기 소 때문에 그러십니까?
“... 네. 수의사가 와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탈진한 것 같거든요.”
- 흠.
“지금까지는 우리가 운이 좋은 편인데, 끝까지 모두가 운이 좋아야 할 것 같아서요.”
- ... 네.
“산불 난 야산 옆이라도 와주실 수의사님이 혹시 안 계실까요?”
- ......
두진이 답이 없는 가운데, 어느새 도훈의 표정도 농장 주인의 그것처럼 간절하게 변해 있었다.
밤이 지나가려면 아직 먼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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