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긴 밤 - 1.
11월의 마지막 목요일 오후, 대흥시청 시장실.
소파에 앉은 두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훈은 누군가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과장님?”
- 소방서장과 대화를 했는데, 인원도 차량도 당장 증원은 어렵다는 얘기만 들었습니다.
“... 전혀 안 된답니까? 올해 인력 증원 있었잖아요.”
- 저도 소방서장과 대화를 해본 뒤에 알았는데, 금산 소방서 관할 중에 대흥 안전센터보다 인력이 더 많이 비는 곳이 두 곳이나 있었답니다. 당연히···.
“... 그쪽이 우선이겠네요.”
- 네. 일단은 그렇게 조치할 수밖에 없고, 내년 인력 충원 계획이 나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했습니다, 시장님.
“...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 성과를 못내 죄송합니다.
안전총괄과장이 사과했고, 도훈은 답답한 마음을 숨기며 담담히 말했다.
“과장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 네, 시장님.
전화를 끊은 도훈이 한숨을 내쉬었고, 두진 역시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한두 해 묵은 일이 아니긴 하지만, 해답이 나오질 않으니 답답합니다.”
“어쩔 수 있겠습니까? 국민 안전과 직결된 대통령 공약인데도 제 속도를 못 내는 상황인데요.”
도훈과 두진이 얼굴을 구기고 있는 건 관내의 유일한 소방서인 ‘대흥 안전센터’의 인력과 차량 증원이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안전센터보다 규모가 크다지만, 안전센터 하나만으로는 대흥시 관내의 응급상황이나 화재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는 건 오래전부터 지적된 문제였다.
다행히 2020년에 안전센터가 소방서로 확대될 계획이었는데, 도훈은 이걸 1년 앞당기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도와 상의하고 행자부와 상의하는 과정에 ‘필요성’은 인정을 받았지만, 예산과 인력의 문제로 끝내 무산됐다.
소방서로 확대되는 시기를 앞당길 수 없다면, 현 안전센터의 부족한 인원과 장비라도 확충되길 원했는데, 그 역시 현실적 어려움만 확인한 상황.
그나마 구급대의 정원은 충족되어 있지만, 본격적인 겨울이 되어 화재 위험이 커지는 상황에서 화재진압 인원과 장비의 부족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도훈이었다.
“... 의용소방대를 잘 활용할 수밖에요.”
“그렇긴 한데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평상시 각자 생업에 종사하다가 상황이 발생하면 동원되는 의용소방대.
이런 의용소방대는 대도시보다 소방인력과 장비가 부족한 지방에서 더 필수적이었다.
대전의 위성도시로 계획됐지만, 현실적으로 도농 복합형태인 대흥시도 예외가 아니라서 각 면마다 의용소방대가 조직되어 운용되고 있었다.
대흥시의 의용소방대는 그나마 정원의 93% 정도 인력을 보유하고 있어 상황 발생 시 큰 힘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장비라도 많으면 좋겠는데···.”
“있는 장비가 그나마 제대로 작동하니 다행이지요.”
정식 소방서가 아닌 ‘안전센터’ 수준이라 보유 장비에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도내 각 소방서에서 내구연한이 지나 교체된 구형 소방차량과 장비를 지원받아 보유하고 있는 상황.
얼마 전, 시청과 안전센터가 함께 장비 전체를 점검, 보수해 노후 장비라도 즉시 쓸 수 있도록 해놓았다.
물론, 대부분이 화재진압용 펌프 차량이었고 여름에 화학물질이 유출된 사고가 있었을 때 꼭 필요했던 화학차 같은 건 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 예방 조치에 좀 더 힘을 써야겠습니다, 실장님.”
“알겠습니다. 취약 구역 점검을 다시 한 번 시행하도록 하죠.”
“네. 아, 이번에는 거주지 외에 산불예방 활동도 포함 시켜 주세요. 그것도 다시 확인할 때가 된 것 같네요.”
“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두진이 서류를 챙겨 몸을 일으켰고 도훈이 창가로 가 밖을 내다봤다.
초겨울이니 기온이 떨어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지만, 비가 오지 않은 지 거의 보름이 다 되어 무척 건조한 환경이었다.
겨울바람도 쌩쌩 불어대는 통에 담배꽁초가 마른 수풀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불이 나기 아주 쉬운 상태.
과거, 운계면 사거리를 조금 벗어난 위치에서 차에서 버린 담배꽁초가 도로 옆 논두렁으로 날아가 바짝 마른 풀에 불이 붙어 화재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하필, 당시 안전센터의 소방차들이 유서면에서 발생한 주택 화재에 대응하는 중이어서 소방차의 출동이 30분이 넘게 걸렸다.
몇몇 주민이 물통을 이용해서라도 불을 끄려 했지만, 풀이 많이 뭉친 곳에서는 불길이 크게 일기도 해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만류했다.
결국, 시가지에서 뻔히 보이는 위치의 논두렁에 넘실대는 불길을 수수방관해야 했다.
다행히 그때의 피해는 아무런 시설이 없는 논두렁 백수십 m 정도가 불에 그슬리는 것으로 그쳤지만, 이후 대흥시에서는 도로 주변의 마른 잡풀 정리가 매년 늦가을마다 빠지지 않고 행하는 화재예방 조치로 자리매김했다.
한눈에 들어오는 건물과 들을 찬찬히 살피던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중얼거렸다.
“... 왜 이렇게 찜찜한지 모르겠네.”
건물들 너머 너른 들과 산을 바라보는 도훈의 표정은 오랫동안 펴질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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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시청 앞 상가의 실내포차.
“자, 이번 달도 고생들 많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뿐인 회식 아닙니까? 지난달에 회식 안 했으니까 이번 달은 물론 지난달도 고생 많았다고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냥 적당히 넘어갑시다, 좀.”
“뭐, 그렇다고요.”
영배를 침묵시킨 도훈이 직원들의 잔에 소주를 따라줬다.
두셋씩 밥 먹는 건 매일같이 하지만, 비서실 직원 넷까지 포함해 다섯이 전부 함께 하는 건 꽤 오랜만이었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실장님도요. 조 비서관이랑 홍 주무관님도 고생했어요, 오늘.”
“네. 그거 아니었으면 자칫 이번 달 회식도 그냥 넘길 뻔했네요.”
오늘 도훈과 두진, 영배, 영진은 유서면 주민센터에서 벌인 산불예방 활동에 다녀왔다.
산불예방 활동이라고 특별한 게 아니라 민가 근처나 사람의 통행이 잦은 야산이나 산의 잡풀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불붙기 쉬운 것들을 미리 치운달까.
쌀쌀한 날씨 속에서 그렇게 몸을 쓰는 일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포차에서 뜨끈한 국물을 앞에 놓고 회식을 하게 된 터.
“다음 주에 운계면, 금선면 주민센터도 잡풀 제거 작업할 거랬죠?”
“네. 두 곳 다 수요일 예정입니다.”
정임이 답하자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거기도 격려금만 전해주는 게 나으려나요?”
“글쎄요. 유서면 주민센터 직원들과는 이달 초에 함께 식사하신 적이 있지만, 그 두 곳은 좀 됐잖아요.”
오늘 산불예방 작업이 끝나고 유서면 주민센터도 센터장 이하 전 직원이 회식하는데, 도훈은 잠깐 가서 인사만 하고 격려금을 전달한 뒤 빠져나왔다.
“격려금 얼마나 넣으셨어요?”
“30만 원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럼 업무추진비 쓰시지 그러셨어요?”
“업무추진비로 회식비 지원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일반 시민은 거의 없이 우리 직원에 관계자들만 있었는데.”
“하지만, 항상 시장님 사비 쓰실 수는 없잖아요.”
“자주 내는 거 아니니까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도훈이나 두진이나 공금 집행에 아주 엄격했다.
특히, 도훈은 시민 참여 없이 직원들만 참여한 행사 뒤풀이 같은 경우에는 행사 성격이 명확하지 않은 이상 거의 업무추진비나 공금을 쓰는 일이 없었다.
초창기부터 직원들이 ‘시장님이 너무 야박하다’고 불평할 때도 있었지만, 도훈은 그런 태도를 여전히 지키고 있었고 이젠 직원들도 적응해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저희 영양제도 사주셨는데···.”
“제 것도 샀잖아요. 좀 더 좋은 것으로 사고 싶었는데, 법 때문에···.”
“그거면 충분해요. 그리고 더 비싸면 다른 직원들 눈치 보이기가 십상이에요.”
“하하, 그럼 다행이고요.”
도훈은 자신과 비서실 직원 전부의 건강보조식품을 사비로 샀다.
영배에게는 1인당 10만 원 내에서 알아보라고 했지만, 청탁금지법에 걸릴 위험이 있어 결국에는 5만 원이 안 되는 영양제를 구매했다.
어쨌든, 다들 그 선물을 좋아해 각자의 책상에 두고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있었다.
“자, 건배하시죠.”
쨍.
다섯 사람이 건배하고 제각기 소주잔을 비웠는데, 홍영진은 술을 비우지 않고 그대로 내려놨다.
“안 드시려고요?”
“네. 오늘은 컨디션이 좀···.”
“이런, 오늘 회식하지 말 걸 그랬나요? 먼저 들어가서 쉬실래요?”
“아뇨. 아프거나 한 건 아닙니다. 술 마시는 게 좀 찜찜해서요.”
운전을 담당하는 영진이지만, 그는 의외로 술을 좋아했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건 ‘술자리’ 자체가 아니라 퇴근한 뒤 부인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회식 때도 몇 잔 마시고 말뿐 절대 취기가 오를 정도로 마시는 법이 없었다.
“아, 참. 제설제 조금 더 확보하라고 한 거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실장님?”
“도로관리팀에서 월요일에 보고한다고 했습니다. 시장님이 지시하신 것처럼 여러 업체에 가격을 문의했다고 하더라고요.”
“지켜야 할 것만 지키면 알아서 결정해도 될 텐데요.”
“저번에 한소리 들었잖습니까? 아마 그 영향이겠죠.”
올해 초, 겨울이 다 끝나갈 무렵에 눈이 많이 내린 적이 있었는데 제설제가 부족해 도로에 쌓인 눈을 제때 치우지 못한 적이 있었다.
때문에, 도훈은 가을이 끝나기 전에 제설제 보유량을 점검했는데, 그때 몇 년간 한 업체에서만 구매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가격, 품질 등의 면에서 큰 문제가 없었다지만, 앞으로는 과정을 좀 더 투명하고 합리적으로 개선하라고 지시했는데 담당 부서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소방청에서는 답 아직 안 왔죠?”
“협조 공문 보낸 게 어젠데 벌써 오겠습니까? 아직입니다. 하하.”
어제 ‘화재’를 생각하며 들었던 찜찜함을 떨치지 못한 도훈은, 폐기 예정인 노후 소방차가 있는지 있다면 대흥시에 무상 지원하거나 저가로 구매할 수 있는지를 소방청에 문의했다.
두진의 말대로 답이 오기에는 좀 일렀다.
쿡.
옆자리의 영배가 도훈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왜요?”
“... 지금 우리 회식하는 게 아니라 회의하는 것 같습니다.”
“아, 미안해요. 신경 쓰이는 것들이라서요. 이제 얘기 안 할게요.”
도훈이 사과했고, 영배를 포함한 직원 모두가 웃었다.
처음에 일은 일, 회식은 회식이라며 회식 자리에서 일 얘기 안 하겠다고 했던 게 바로 도훈인데 다른 건 칼같이 지키는 도훈도 이것만큼은 잘 지키질 못했으니까.
“화재예방 관련한 게 계속 신경 쓰이시나 봐요?”
“아닌 게 아니라 좀 그러네요.”
정임이 묻자 도훈이 머쓱한 표정으로 답했다.
원래 뭔가에 꽂히면 다른 사람에게 말은 안 해도 스스로 머리에 오래 붙들고 있는 게 도훈인데, 이번 건은 정도가 좀 더했다.
“날씨는 추워지고, 화재는 터졌다 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가 십상이니까 그러실 만도 합니다.”
두진의 도훈을 편들 듯 말했고, 도훈이 쓰게 웃었다.
도훈 자신도 왜 이렇게 이 건이 찜찜하게 머리에 남는지 이해가 잘 안 됐다.
다른 일에 집중하다가도 문득문득 ‘대흥시의 부족한 소방 인프라’가 머리에 떠올라 불안한 마음이 들곤 했으니까.
“일단 지금은 회식에 집중···.”
위이잉.
영배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데, 테이블에 올려놓은 도훈의 업무용 핸드폰이 진동했다.
“당직실이네요.”
“에휴.”
웬만한 ‘사건’이 아니고서는 퇴근 후에 도훈을 찾는 경우가 거의 없기에 영배가 한숨을 내쉬었고, 도훈이 전화를 받았다.
“네, 시장입니다.”
- 당직근무자 손일민 주무관입니다. 시장님, 관내에 산불이 발생했습니다!
우뚝.
“... 어디입니까?”
- 대전으로 연결된 국도변 야산입니다. 최초 불은 길 건너 OO 시 구역에서 시작됐는데, 워낙 바람이 세서 소방차가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불이 도로를 넘어 우리 관내 야산에 옮겨붙었답니다! 지금···.
와락.
상황실 근무자가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는 걸 듣고 있는 도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 이거였나? 이래서 찜찜한 거였나?’
도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 것을 본 두진이 눈짓하자, 직원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청으로 가시죠, 시장님. 가면서 통화하시죠.”
“네.”
두진의 말에 핸드폰을 귀에 댄 그대로 답한 도훈이 몸을 일으켰고, 영배가 얼른 카운터로 달려가 계산을 했다.
도훈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고 모두가 가게를 빠져나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0초도 되지 않았다.
주인 잃은 어묵탕에서 여전히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가운데, 긴 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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