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왜 접니까 - 2.
“그렇게 오래됐습니까?”
“네. 그렇게 오래됐어요. 그리고 처음 시작할 때는 문민정부 집권당과 관계가 있었습니다. 민의당이 아니었죠.”
“오호? 그래요?”
“네. 문민정부 중기에 우리 연구소가 ‘팽’당하고, 당시의 여권과 결별했죠.”
“흐음.”
“그래서 연구소 2대 소장님까지는 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소장부터 연구원까지 거의 물갈이가 됐죠. 솔직히 말하면, 물갈이됐다기보다는 기존 사람들이 다 제 살길을 찾아 떠난 거죠.”
시청 구내식당 구석에 도훈과 두진이 유진기와 마주 앉아 있었다.
도훈은 유진기의 말에 관심을 끊고 밥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고, 두진이 ‘예의상’ 유진기의 대화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상대해 줄 필요 없다니까 실장님도 참···.’
유진기가 나타난 직후, 도훈은 비서실 직원들을 모두 모아 토요일 오후 윤민준을 만났던 얘기를 꺼냈다.
CUS 정책연구소와 관련 있는 여당 일각에서 자신에게 관심이 있고 영입하려는 모양인데 자신은 ‘전혀’ 관심이 없다고.
도훈이 이렇게 ‘모나게’ 대응하는 건, 저쪽의 접근방식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상님이 주의를 준 때문이기도 했다.
- 어제랑 전혀 다른 놈이다.
‘예?’
- 어제는 딱히 뭔가 드러내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너한테 노리는 게 있단 말이야.
‘그게 뭔데요?’
- 글쎄다. 읽히는 건 탐욕. 그리고 음··· 명예욕?
‘무슨 뜻입니까?’
- 네가 알아서 생각해봐. 저놈 경력을 고려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을 것 같다.
‘......’
도훈은 유진기의 말에 귀 기울이는 대신, 조상님의 ‘팁’을 곱씹느라 열심이었다.
‘나를 통해서 돈을 벌려는 건 당연히 아닐 테고···. 도대체 뭐지?’
밥을 먹으며 그 생각에 집중한 도훈은, 당연히 유진기와 두진의 대화를 귓등으로 듣고 있었다.
“저는 의원님이 지난 총선에 불출마하시고 완전히 은퇴하신 줄 알았습니다.”
“한동안 정치판을 떠나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다 잊으려고도 해봤는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돌아오게 되더군요.”
“...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시다고요?”
“네. 하하.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얼버무리는 유진기를 흘끔 한 도훈이 뭔가를 떠올렸다.
‘정치인 치고 대통령 되는 걸 꿈꾸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했던가? 하지만, 저 양반은 한계를 느꼈다며 불출마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도훈은 지난 총선 때 민의당 현역의원 중 불출마 선언을 한 이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 기사에 유진기는 지역 주민과 지지자들의 성원에 지금껏 활동할 수 있어 감사했다며 아무런 아쉬움 없이 물러난다고 적혀 있었다.
‘한계를 느껴 정치를 그만뒀다는 건데···. 대통령 되는 것 말고 정치인의 꿈이 뭐가 있지?’
묵묵히 밥을 씹던 도훈의 뇌리를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 에이, 설마?’
뇌리를 스친 생각과 자기 자신을 연결해 본 도훈은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걸 알아챈 유진기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러십니까, 시장님?”
“...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 식사하시죠.”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둘러댄 도훈이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국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설사 미쳤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미치진 않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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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 직후, 시장실.
식사를 마친 도훈은 유진기와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다.
‘거절’의 뜻을 명확히 하는 게 낫겠다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15분 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는 다시 업무 시작이라서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하지요. 하하, 무턱대고 들이민 것치고 15분이면 나쁘지 않네요.”
“......”
“윤 이사를 통해서 미리 연락해서 약속을 잡는다고 했었는데 그러지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 네.”
“절차를 거치는 게 좋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고 그깟 절차 안 지켜도 될 정도로 내가 잘나서도 아니라,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시장님을 좀 ‘생’으로 보고 싶기도 했고요.”
커피잔을 손에 든 유진기가 담담하게 말했고, 도훈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우리 포럼에 가입하지 않겠다 하시는 게 생각하시는 것과 정치적 방향이 틀려서 그런 건 아니지요?”
“네. 전에 이사님께도 말씀드렸지만, 포럼에 가입하고 정치인들과 ‘연’을 맺는 게 싫은 겁니다.”
“......”
“CUS 정책연구소가 아니라 그 어디에서 제안이 왔다고 해도 똑같이 거절했을 겁니다.”
“... 그렇게까지 정치권과 거리를 두는 이유가 있습니까?”
“어제도 잠깐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 업무의 대부분은 정치가 아닌 행정입니다.”
“일부 정치가 포함된 건 부정할 수 없죠. 그리고 그 행정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에는 정치입니다.”
“......”
유진기의 반론에 도훈은 답하지 않았다.
“시장님이 지방자치나 주민자치 등에 주력하신다는 얘기는 안 의원을 통해 들었습니다. 뚜렷하진 않지만, 일부 성과를 내는 부분도 있다고요.”
“... 약소할 따름입니다. 갈 길이 멀죠.”
“약소하다고 하시지만, 그런 작은 성과가 쌓여야 현실의 변화가 이루어지니까요.”
“......”
“그리고 그런 작은 성과에 의한 변화는 분명 민주주의의 발전과 이어질 겁니다.”
“... 뭐, 그렇게 평가하신다면 감사하긴 한데, 너무 과찬 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런가요? 그럼 평가 방향을 바꿔볼까요? 그런 변화의 한계도 뚜렷하다는 건 아십니까?”
유진기의 말에 도훈이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말씀하시죠.”
“그 변화를 견인하는 힘이랄까 아니면 밀어붙이는 힘이랄까 뭐가 됐든 이른바 동력이 사라지면 금세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쉽다는 거죠.”
“... 그럴까요?”
“저는 그럴 거로 생각합니다. 쉽게 말해 다음 시장이 지금의 시장님처럼 주민참여에 공들이지 않고 귀찮게 생각해 제한하기라도 한다면, 과연 막을 수 있겠습니까?”
“참여했던 시민들과 그들의 경험이 후퇴를 막을 명분도 근거도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유진기는 의문을 표했지만, 도훈은 자신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
“유 의원님이 가정하신 그 다음 시장은 분명히 어떤 형태든 시민의 저항에 부닥치게 될 겁니다. 어지간히 반민주적이거나 반동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그 저항을 무시할 수 없을 테고요.”
“글쎄요. 대흥은 작은 시일뿐이고 전체 주민에 비하면 시 행정에 참여하는 이들도 소수일 뿐이잖아요? 그 소수의 저항이 후퇴를 막는 것과 같은 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그 작은 시의 소수일 뿐이더라도 올바른 주민참여의 성과는 전체 시민에게 혜택이 가게 됩니다. 꼭 금전적이거나 물질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죠.”
“흠···.”
“어떤 면에서든, 주민에게 가던 혜택이 사라진다면 경험 있는 소수를 시작으로 주민이 반발할 거로 생각합니다.”
“... 글쎄요.”
“그렇게 믿고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요.”
도훈의 말에 공감도 반대도 표하지 않고 유진기가 말을 이었다.
“너무 긍정적인 것 아닙니까?”
“의원님은 너무 부정적으로 보시는 건 아닌가요?”
“하하. 그런가요?”
담담히 웃으며 어물쩍 넘기는 유진기의 모습에 도훈은 확신했다.
유진기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반론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아마도, 아니 분명히 도훈이 어떻게 답하거나 반응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저런 질문을 던진 것이라는 것을.
‘... 이 사람 보기보다 더 굉장한 능구렁이인 것 같은데···.’
단 두 번째의 만남일 뿐이지만, 유진기를 향한 도훈의 경계심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도훈이 만났던 정치인 중 유진기는 어떤 유형에도 속하지 않았으니까.
‘친하게 지내자’는 쪽도 아니고, ‘성향이 다르다’며 적대하거나 경계하는 쪽도 아니며, ‘같이 현안을 해결하자’는 쪽도 아니었다.
애초에 꼭 정치인이라고 하기도 뭐한 위치에 있지만, 절대 일반인이라고 할 수 없는 남자.
게다가 그가 자신을 향해 탐욕과 명예욕을 갖고 있다는 조상님의 귀띔은 절대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도훈이 묵묵히 생각하고 있는데 유진기가 말을 이었다.
“시장님께 더는 포럼 회원이 되시라고 권하지 않겠습니다.”
“... 감사하네요.”
“다만, 우리 연구소가 보유한 정책자료는 시정에 참고하시라고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그건 괜찮겠습니까?”
“정치 원론이 아니고 행정에 공부가 되거나 도움이 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쪽으로도 충분히 많은 자료가 있을 겁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우리 연구소 역사가 제법 되니까요.”
“... 네.”
“다만, 대가라고 하기는 뭐합니다만, 이따금 제가 대흥시에 놀러 오면 상대 좀 해주시죠. 너무 박대하지 마시고요.”
“그건 어렵겠네요.”
“하하. 역시···.”
명백한 거절에도 담담히 웃는 유진기를 향해 이번에는 도훈이 질문을 던졌다.
“왜 제게 흥미를 갖게 되신 겁니까?”
“하하, 저 말고도 김 시장님께 흥미 있는 사람 꽤 많을 겁니다.”
“그분들 중 아무도 제게 유 의원님처럼 접근하지 않으셨거든요.”
“그런가요?”
“네. 공무로 만나야 하는 분들을 제하면 유 의원님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죠.”
“......”
담담한 표정으로 차분하게 눈을 빛내며 도훈이 물었다.
“왜 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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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퇴근하는 도훈의 차 안.
“그래? 그럼 또 놀러 온다는 거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종하지 않을 거야.”
“응? 왜?”
“목적이 불순하니까.”
“목적이 불순해? 그게 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영배의 질문에 도훈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형, 정치하는 사람 치고 이거 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게 뭔 줄 알아?”
“... 음, 대통령?”
“그래. 그런데 그걸 포기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다른 꿈이 뭘까?”
“... 그, 글쎄?”
도훈의 물음에 답한 건 뒷좌석의 두진.
“킹이 되길 포기한 사람도 될 수 있는 게 있긴 하지.”
“... 그게 뭡니까, 실장님?”
“킹메이커.”
“네?”
“킹메이커라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
영배가 감을 못 잡은 듯 몇 번 눈을 깜빡거리고는 도훈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풋!”
영배가 얼른 입을 막았고, 도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참아도 돼. 나도 웃겨.”
“큭큭! 하하하! 푸하하하하!”
영배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뒷좌석의 두진도 우습다는 표정을 했다.
운전에 집중한 도훈도 웃지는 않았지만, 이 이상 어이없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영배는 한참 만에야 웃는 걸 멈췄다.
“하하. 아, 아이고 배야. 이거 너무 웃어서 배가 저리다.”
배를 부여잡고 잠시 숨을 고른 영배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 의원이란 양반이 너를 ‘킹’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잖아.”
“... 그런 것 같아.”
“너를 ‘킹’ 감으로 진지하게 여긴다는 거고.”
“응.”
“그렇게 말했어?”
“아니. 정확하게는 이렇게 말했어. 성장 가능성이 무한대인 정치 신인, 도착점이 어디일지 모르겠으나 함께 가보고 싶다고.”
“하하. 나 이거 참,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 설마 그 연구소 전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겠지. 아마, 그 양반 개인 혹은 주변 극소수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도훈의 말에 뒷좌석의 두진이 입을 열었다.
“자네를 유력한 정치 신인으로 생각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양반이 과대망상인 건가? 아니면 자네가 좀 멀리 넘겨짚은 거 아닌가?”
“차라리 후자라면 좋겠는데요. 킹은 아니더라도 저를 앞으로 유력한 정치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접근한 건 맞는 것 같습니다.”
“흐음. 자네 눈치도 보통은 넘으니까···.”
“네. 그래서 제가 봤을 때 제일 위험한 부류입니다. 도지사 같은 사람은 차라리 양반이죠.”
“그렇지.”
도훈과 두진의 말을 듣던 영배가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도지사는 시장인 나에게도 관심이 있지만, 개인인 나에게도 흥미가 있어. 그리고 시장으로서의 나에 관한 관심도 앞으로 훌륭한 정치인이 될 것 같으니까 한번 지켜보자 정도야.”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유 의원은?”
“음, 좀 설명하기 어려운데···. 굳이 비유하자면 이런 거야. 나를 정치 시장에 내놓은 하나의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미래에 대박을 터뜨릴 것 같으니까 미리 선점하자는 것 같달까?”
“... 선점이라.”
“그래. 나라는 상품을 통해 뭔가 이득을 기대한다는 거야. 도지사는 최소한 그런 태도는 아니거든.”
이해했다는 표정의 영배가 다시 물었다.
“네가 착각한 건 확실히 아니라는 거야?”
“장담할 순 없는데, 그런 느낌이 강해. 강해도 너무 강해.”
“흠. 그러니 앞으로 상종하지 않겠다?”
“응. 혹시 비서실에 연락해도 일절 상대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거야.”
“... 음. 그거야 이해했고, 네가 가장 위험한 부류라고 말한 것도 이해가 갔는데 말이다.”
“그런데 뭐?”
“그게···.”
영배가 답을 망설였고, 뒷좌석의 두진이 푸념하듯 말했다.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거지.”
“......”
“그런 사람들을 진보, 보수 양쪽으로 나눈다고 치세. 그중 진보 쪽의 사람들은 다 자네에게 관심이 가지 않겠나?”
“......”
“내가 봤을 때 유진기 전 의원은 자네가 대박이 확실한 상품이라서 주목한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선점할 수 있는 인재가 없어서 주목한 게 아닐까 싶네. 그쪽이 현 여당 주류는 아니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조심할 생각이고요.”
여당 주류라면, 굳이 도훈 말고도 주목할 만한 정치 신인이 많다.
상대적으로 젊고 개혁성향이 뚜렷하며 성과도 적잖게 이뤄낸 초선 국회의원만 해도 여럿이니까.
당연히 당내의 인물도 아니고 수도권도 아닌 지방 소도시 시장인 도훈을 관찰은 할망정, 유진기처럼 접근해 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쩝. 사정을 알았다 해도 뭔가 개운치 않은 기분이네.”
미간을 찌푸린 영배의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도훈의 차가 밤공기를 헤치고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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