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왜 접니까 - 1.
월요일,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장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죠.”
“그러세. 벌써 9시가 다 됐군.”
하루를 마무리하는 공부와 토론이 끝나고 도훈, 영배, 두진이 서류를 정리했다.
먼저 정리를 끝낸 도훈이 피곤해 보이는 영배의 얼굴에 시선을 주고 말했다.
“형, 어제 뭐 했어?”
“응? 별거 없었는데? 애들이랑 놀아주고 청소도 좀 하고, 빨래도 좀 했고, 공부도 좀 했고. 왜?”
“듣기로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노동강도가 굉장했나 봐?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오겠다.”
“... 하하. 간만에 가족에게 봉사해서 그러나? 강도가 센 건 사실이긴 하지만 다들 그러고 사는데 뭐.”
즐거운 토요일 저녁을 보내고 일요일은 아무것도 안 한 도훈에 반해 가족이 있는 영배는 그럴 수가 없는 처지.
영배 부부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는 도훈이었지만, 이럴 때 보면 솔직히 아직 솔로인 자신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자, 순심아!”
왈! 왈왈!
두진이 부르며 철망을 열자, 순심이가 꼬리를 치더니 넙죽 그의 품에 안겼다.
“누가 보면 저 집 갠 줄 알겠다.”
“그러니까···.”
영배와 도훈의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을 깔끔히 무시하는 순심이를 안고 두진이 앞섰고,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대개, 도훈과 영배는 함께 도훈의 차로 두진은 따로 출근했고, 퇴근은 도훈의 차로 모두가 함께했다.
영배가 몸을 붙이더니 작게 소곤거렸다.
“야, 나 용돈으로 보약 좀 사 먹어도 되냐? 아우, 요즘 체력 달려 죽겠다.”
“... 용돈으로 뭘 하든 형 마음이긴 한데··· 모자라지 않겠어?”
“... 모자란다고 더 주진 않을 거지?”
“당근이지.”
“하긴···. 에휴, 관두련다. 내 팔자에 보약은 무슨···.”
투덜대는 영배를 잠시 짠하게 바라보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내가 보약은 못 사줘도 정임 씨에게 말해서 홍삼차는 구비시킬게.”
“... 홍삼··· 차?”
“응. 그거라도 꾸준히 마시면 효과가 있지 않을까?”
“... 고, 고맙다··· 고 할 것 같냐!”
“필요 없어? 준비시키지 마?”
“......”
차마 ‘필요 없다’고 못하고 굳어진 영배를 웃으며 지나쳤다.
‘... 날이 쌀쌀해지고 다들 일로 고생인데, 보약까진 못해도 건강보조식품 하나씩은 돌려야겠네.’
공무원들이 야근을 많이 하고 일에 치어 산다지만, 최소한 대흥시청에서 도훈이나 영배, 두진만큼 야근을 많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임과 영진도 세 사람만큼은 아니더라도 주말에 번갈아 출근하는 등 타 부서와 비교해 업무 강도가 셌고, 도훈은 이런 비서실 직원들을 평소에도 세심하게 챙겼다.
농담을 편히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민주적인 태도를 유지했고, 아무리 작은 안건이라도 직원들의 의견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체력은 마음 씀씀이만으로 나아지게 할 수 없는 일.
도훈은 걸음을 늦춰 입을 툭 내밀고 따라오는 영배에게 말을 걸었다.
“형.”
“... 왜?”
“괜찮은 건강보조식품 좀 알아봐.”
“응? 뭐?”
“꼭 건강보조식품이 아니어도 좋아. 보약도 괜찮을 것 같은데··· 어쨌든, 나부터 시작해서 비서실 직원들 것까지 좀 알아봐.”
“오호, 진짜?”
“응.”
“예산은?”
“1인당 10만 원 정도면 되려나?”
“오케이. 나한테 맡겨.”
입이 쑥 들어간 영배는 입맛까지 다시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런 영배의 모습에 도훈은 까맣게 잊고 있던 걸 하나 떠올렸다.
‘... 전화한다고 했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오늘 나 찾는 전화 없었는데···?’
“형. 혹시 오늘 나 찾는 전화 있었어?”
“내가 알기로는 없었어. 정임 씨한테서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는데?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액정에서 눈도 떼지 않고 답하는 영배에게 둘러댄 도훈이 걸음을 서둘렀다.
‘차라리 아예 연락하지 마라. 피차 그게 좋으니까.’
청사를 나서 차를 향해 걸으며 도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위이잉.
“김도훈입니다.”
- 저, 안준식입니다.
“아, 의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 혹시 아직도 야근 중이십니까?“
“아뇨. 막 나왔습니다. 여기 주차장이에요.”
- 아, 그럼 혹시 집으로 가실 겁니까?
“네. 왜 그러십니까?”
도훈이 묻자 전화기 너머에서 안준식이 망설임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실례인 줄 압니다만, 괜찮으시면 잠깐 만날 수 있겠습니까, 시장님?
“... 지금요?”
- 네.
도훈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시장이 된 후 시의원들과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신 적도 있었고, 안준식이 비서실 회식에 함께한 적도 있었다.
즉, 도훈과 안준식은 업무에서 손발을 잘 맞추는 것뿐만 아니라 개인적 친분도 꽤 쌓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시간에 갑작스럽게 만남을 청한 적은 없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 그게··· 제가 무슨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제가 어떤 분과 함께 있는데 그분이 시장님 뵙기를 청하네요.
“... 어떤 분이요? 누군데 그러십니까?”
- 우리 당 3선 의원이었던 선배님입니다. 유진기 전 의원이라고 혹시 아십니까?
“들어는 봤죠.”
- 지금 저 그분이랑 치맥하고 있는데, 시장님 얘기를 하셔서요. 오신 김에 만나고 싶다고 하시네요.
“......”
민의당 소속 전 국회의원인 유진기는 대전을 지역구로 3선을 한 인물.
현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시절, 그와 그의 지지세력을 ‘패권세력’이라 비판하는 데 참여해 대립각을 세웠으나 탈당하는데 동참하지 않고 당에 남았다.
원래부터 중도적 입장을 표방했던 그는 정치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없는,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총선에서 보수 정당이 휩쓸던 시절에도 지역구를 탄탄하게 관리해 한 번도 낙선한 적이 없는 이른바 ‘관리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기는 했다.
지난 총선 때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스스로 물러나야겠다고 판단해서가 아니라 숨겨진 비리가 있어서 그랬다는 뒷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 부담스러운데···.’
도훈이 말이 없자, 안준식이 멋쩍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탐탁지 않을 거라는 거 아는데요. 제가 시민단체 활동할 때부터 여러모로 도움을 받아서 말이죠. 어떻게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안준식이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경우는 없었기에, 도훈은 그다지 가고 싶은 마음이 없음에도 승낙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좀 있다가 잠깐 들리죠. 어디로 가면 됩니까?”
- 아, 예. 여기 운계면 사거리에···.
장소를 전해 들은 도훈이 전화를 끊고 차에 올랐다.
“왜? 뭔데 그래?”
“안 의장님인데, 손님이랑 치맥 하는데 그 손님이라는 양반이 날 보고 싶어 한다고 잠깐 들러 달라고 부탁하네.”
“치맥? 추릅.”
영배가 입맛을 다졌고 뒷좌석에서 순심이를 안고 있던 두진이 타박했다.
“아이고, 이 친구야. 지금 치맥이 문젠가!”
“... 하, 하하. 스, 습관적으로···.”
“습관 고쳐! 그리고 중요한 건 이 밤중에 시장님을 보자고 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냐?”
“... 맞지요. 죄송합니다, 실장님.”
“쯧쯧.”
영배를 향해 혀를 찬 두진이 질문했다.
“안 의장이랑 같이 있다는 손님이 누군데 그러나?”
“유진기 전 의원이랍니다.”
“유진기? 아, 대전에서 의원 했던?”
“네. 안 의장이 시민단체 활동할 때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네요.”
“그래? 흠, 성향이 좀 다른 양반들인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성향 다르다고 친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도훈이 차를 출발시켰고, 두진이 말을 이었다.
“가볼 생각인가?”
“안 의장이 부탁까지 하는데 잠깐만 있을 생각입니다.”
“그래. 일찍 들어가서 쉬어. 자네가 아직 젊긴 하지만,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해. 오늘도 일찍 퇴근하는 건 아니잖나.”
“네. 걱정 마세요, 실장님.”
별일 아니라는 듯 답한 도훈이 운전에 집중했다.
도훈의 낡은 SUV가 속도를 올려 시청 청사에서 빠르게 멀어져 갔다.
-----
“김도훈입니다.”
“유진기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네.”
술기운이 올라 살짝 얼굴이 붉어진 유진기와 인사한 도훈은 속으로 ‘딱 10분’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반가우면서도 미안해하는 듯한 안준식에게 웃어준 도훈이 자리에 앉았고, 곧 그의 앞에 500cc 생맥주가 한잔 놓였다.
“우선 가볍게 목부터 축여요.”
“그러시죠.”
쨍.
건배하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도훈이 유진기와 시선을 마주했다.
현역이 아니라서인지 편안한 옷차림인 그는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접대성 미소’가 아니라 정말 기분이 좋은 듯한 미소였다.
“피곤하실 텐데 뵙자고 해서 미안합니다. 안 의원이 몇 번이고 안 된다고 하는 걸 내가 좀 떼를 썼어요.”
“왜 제가 그리 보고 싶으신지···.”
“지금은 좀 덜하지만, 시장님 화제의 인물이잖아요? 호기심도 가고, 좀 궁금한 것도 있고···. 지금은 물러났지만 나도 정치판에 10년 넘게 있다 보니 아직 물이 덜 빠졌달까요.”
“전 그냥 어쩌다 중소도시 시장이 된 사람일 뿐입니다. 일단 됐으니까, 약속은 지키고 책임을 다하려 노력하는 중이고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하는 것 같던데요? 하하.”
유진기가 웃었지만, 도훈은 담담한 표정 그대로였다.
“기사를 통해 보기도 했지만, 안 의원에게 좀 듣기도 했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던데요.”
“의장님이 너무 과찬을 하셨나 보네요.”
도훈이 안준식을 흘끔 했고 안준식이 머쓱하게 웃었다.
‘안 의장의 과한 칭찬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건가?’
도훈이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유진기가 질문을 던졌다.
“정치적 견해는 안 의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던데요. 맞나요?”
“네. 아직은 크게 이견을 보인 적이 없죠. 정치적 견해라고 말씀하셨는데, 전 제 일이 정치보다는 행정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참 특이했어요. 크건 작건, 자치단체장은 엄연히 정치인이거든요. 그런데 시장님은 좀 다르시더군요.”
“제 일 중에 정치의 영역보다 행정의 영역이 훨씬 넓으니까요.”
“그래서 묻는 건데 말이죠. 제 생각에···.”
무슨 토론회나 면접 자리도 아닌데 유진기는 계속해서 도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답할 의무가 없는 도훈이 유진기에게 나름 성의껏 답한 것은, 나이도 경력도 한참 위인 그가 도훈에게 예의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데다가 불쾌할 수도 있는 건 묻지 않았기 때문.
행정이 됐든, 정치가 됐든 그 분야에 관한 도훈의 기본 성향을 예의적으로 물으니 기자와 인터뷰 한 번 한다 치고 도훈은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얼마간 문답이 오갔고, 도훈이 맥주잔을 들어 목을 축이는 사이 유진기가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왜 이제야 김 시장님을 만났을까요? 하하, 나 현역 때 만났더라면 참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저야 일개 소시민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시장이라서 흥미가 가는 게 아닙니다. 시장님의 견해와 그 견해를 뚜벅뚜벅 실천하는 모습에 흥미가 가는 거죠. 하하.”
유진기의 칭찬에도 도훈이 담담히 말이 없던 순간,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형. 왜?”
- 아직 거기냐? 이제 슬슬 일어나서 집에 가라.
“지금?”
- 그래, 인마. 네가 전화해달라고 했잖아. 집에 갈 핑계 필요하다고.
“알지. 근데 그게 내 가방에 있다고? 확실해?”
- 얘가 뭔 뜬금없는 소리야? 아, 너 지금 앞에 사람 들으라고 그러는 거냐?
“알았어. 바로 가져다줄게.”
- 큭큭. 웃기긴 하다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넘어가자. 자, 어쨌든 목표는 달성됐지?
“응. 끊어.”
뚝.
전화를 마친 도훈은 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안준식과 유진기를 차례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제 비서인데, 제 가방에 자료를 넣어 놓고 깜빡 안 챙겼다네요.”
“저런, 중요한 거랍니까?”
“내일 아침 회의 때 제출할 서류라서요. 자료가 있어야 서류를 완성할 수 있답니다. 죄송한데, 이만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이거 아쉽네요.”
다행스럽게도 안준식도 유진기도 도훈을 잡지 않았고, 도훈은 10여 분만에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또 봅시다, 김 시장님. 다음엔 밥이나 같이 먹죠.”
“네. 그럼···.”
유진기에게 꾸벅 인사한 도훈이 치킨집을 빠져나왔다.
‘또 보긴 뭘 봐. 사양하렵니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멀어져가는 도훈을 유리창 너머로 유진기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 날 점심시간 직전, 대흥시청 시장실.
“시장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 손님이요?”
“네. 식사 약속을 하셨다는데···.”
정임의 말에 도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오늘 점심 약속은 없었으니까.
“누군데요?”
“명함 여기 있어요.”
명함을 받아든 도훈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 이름 앞에 ‘CUS 정책연구소 부대표’라고 적혀 있어서였다.
“지금 밖에 있어요?”
“네.”
도훈이 걸음을 옮겨 비서실로 나섰다.
“아, 시장님. 하하! 이렇게 쳐들어와서 미안합니다.”
“......”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유진기를 건조한 표정의 도훈이 바라보고 있었다.
#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