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90화 (91/279)

90. 어느 주말 - 3.

“민지, 민욱이는?”

“진주가 봐주고 있지. 웬일로 걔가 이런 서비스를 다 한다.”

도훈의 질문에 영배가 답하는데, 영배 부인 선아가 새침한 표정으로 남편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웬일은 무슨? 조만간 애들 기말고사니까 미리 스트레스 풀라는 거에요, 진주 씨가 맘먹고 배려한 거예요. 도훈 씨.”

“아, 그러고 보니 곧 시험이네요.”

“네, 또 전쟁의 시작이죠.”

“그럼 미리미리 스트레스 푸셔야죠. 자, 한잔하실까요?”

“네.”

“거국적으로 한잔하시죠.”

쨍.

두 개의 테이블을 이어 여섯 명이 함께한 자리.

어색할 수도 있는 자리였건만, 부시장 부인의 활기찬 성격 덕에 그런 일은 없었다.

“어머, 그럼 남편을 시청에 보내고 다시 선생님 하시는 거예요?”

“네. 저도 도훈 씨 혼자 시청에 들여보내는 건 마음이 편치 않기도 했어요.”

“호호, 우정도 우정이지만, 부부애도 대단한가 봐요. 애 키우면서 학원 선생님까지 하시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뭐, 애는 저 혼자만 키우는 게 아니니까요.”

“쩝, 집에서는 제가 아니라 와이프가 왕입니다요.”

“하하하!”

“호호!”

영배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대학 때부터 ‘친화력 하면 조영배’라는 말을 듣고 살았던 영배는 부시장 부부와 민세경 앞에서도 그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전경완 부시장이야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시장 비서실 직원들과 여러 번 함께하며 이미 친분을 다졌고, 부시장 부인은 활달하게 영배와 함께 대화를 주도하며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민 과장님은 오늘따라 별말씀이 없으시네요? 혹시 컨디션이 나쁘신 건 아니죠?”

말없이 듣기만 하며 간간이 웃고만 있는 세경에게 영배가 말을 걸었고 세경이 답했다.

“아뇨.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서요. 듣는 데 집중해서 그래요.”

“아, 네. 그나저나 오늘 과장님은 전이랑은 좀 느낌이 다르시네요.”

“네? 뭐가요?”

“글쎄요. 딱 꼬집어서 뭐라고 말하기는 그런데 그냥 좀 느낌이···. 아, 나쁜 쪽이 아니고요. 좋은 쪽입니다, 좋은 쪽.”

“호호, 네.”

원래 본바탕이 예쁜 그녀였기에 살짝 신경 써 화장을 고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전에는 이지적인 직장인 여성의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본격적인’ 미녀랄까.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정작 그 누군가는 알아채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이 알아준 터.

“우리 남편이랑 도훈 씨 대학교 후배라고 들었는데, 맞으세요?”

“아, 네.”

세경을 눈여겨보고 있던 선아가 말을 걸었다.

“대학 때는 서로 알지 못했나요? 과장님 정도면 학교 때 꽤 유명하셨을 것 같은데, 과는 물론이고 단과대 미녀라고 소문이 났을 법한데요.”

“음, 그러게 말이야. 민 과장님 정도면 캠퍼스 여신 소리도 들을 만한 것 같은데.”

영배의 너스레에 세경이 상큼하게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저 학교 다닐 때는 완전 촌스러운 스타일이었어요.”

“설마요?”

“아뇨. 진짜 그랬어요. 시골에서 여중, 여고 다니면서 ‘범생’으로만 살아서 꾸미는 것도 몰랐고요.”

“어머, 학교 다닐 때 남자 친구 안 사귀셨어요?”

“별로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었어요. 1학년 때 소개팅 한 번 하고는 공부만 했죠. 기숙사에 살아서 맨날 후드티 입고 돌아다니고 그랬죠. 행정학과에 여학생이 많지 않아서 선배나 동기들한테 ‘노하우’를 배우지도 못했고요. 그러다가 ‘행시반’에 틀어박혔으니 학교 안에 소문 날 일은 없었죠.”

“그래요? 흠, 정경대 분위기는 그런가? 인문대였으면 소문이 자자했을 텐데.”

“호호, 제가 졸업하고 동창회에 한 번 갔던 적이 있거든요. 동기 중에서도 저 단박에 알아보는 사람 몇 안 됐어요.”

“와, 과장님 대학 때 모습이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그건 절대 비밀이에요. 호호.”

세경의 말에 모두가 웃는데 도훈이 뜻밖의 말을 했다.

“행시반에 ‘유망주’ 들어왔다는 얘기는 있었습니다.”

“네?”

“제가 석 달인가 행시반에 있다가 그만뒀었거든요. 아마, 과장님이 들어오고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때 관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때 남학생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 있었어요.”

“......”

도훈의 말을 전혀 예상 못 한 세경이 눈이 휘둥그레졌고, 영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야, 너 민 과장님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방금 생각났어. 아까 ‘후드티’라는 말을 들으니까 생각이 나네. 행시반 신참 여학생 하나가 맨날 후드티만 입고 다니는데, 꾸미면 예쁠 것 같다···. 뭐, 이런 종류의 얘기였던 것 같아. 그게 민 과장님 맞는 것 같은데, 그렇죠?”

“... 아. 그, 그랬던 것 같아요. 제 별명이 후드티였거든요.”

“하하, 맞는 것 같네요. 저도 과장님 이름은 못 들었지만, ‘후드티’라는 단어는 기억이 나거든요.”

얼굴이 빨개진 세경이 답했고, 도훈이 담담하게 웃었다.

전경완이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시장님도 행시반에 계셨습니까?”

“네. 잠깐 있었습니다. 행시 보려고 했는데 곧 포기했죠.”

“허허. 계속하셨으면 지금쯤 ‘어공’이 아니고 ‘늘공’이셨겠네요.”

“모르죠. 행시, 어려운 시험이잖습니까.”

“어려운 시험이긴 하지만 시장님은 합격하셨을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은요. 그나저나 그때 포기 안 하셨으면 지금 시장은 아니실 테니, 우리 대흥시 시민들에겐 오히려 그게 다행이겠네요.”

“글쎄요. 앞으로도 계속 다행이려면 더 열심히 해야죠.”

도훈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고, 전경완의 부인이 말을 받았다.

“시장님은 대학 때 모습이 궁금하네요. 제법 인기 많으셨을 것 같은데.”

“음, 글쎄요. 제가 그리 사교적인 편이 아니라서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고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어머? 설마 요즘 말로 ‘아싸’셨어요?”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니었고요.”

“아니긴? 사모님. 우리 도훈이 지금이야 멀쩡하지만, 그때만 해도 ‘철벽남’이었습니다. 밥 먹자, 술 먹자, 놀자··· 뭐 이런 얘기에 단번에 ‘그러자’고 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상상이 안 가요!”

어느새 화제가 도훈의 대학생활로 이어졌고, 영배가 신난 표정으로 도훈의 ‘과거’를 까발렸다.

아직도 얼굴이 붉은 민세경은 어느새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영배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에게 영배 와이프 선아가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도훈의 옆에 앉은 세경이 영배의 말에 귀 기울이며 이따금 도훈을 흘끔 하는 걸 놓치지 않은 선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 호오? 이거 설마?’

나란히 앉은 도훈과 세경을 한눈에 담은 선아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가운데, 즐거운 저녁 식사 자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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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한 게임 해요, 시장님.”

“네. 기회만 되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또 봬요, 시장님.”

“네. 조심히 가세요.”

택시에 탄 부시장 일행을 배웅한 도훈이 돌아섰다.

“... 지금 뭐 해?”

영배와 선아가 나란히 서서 팔짱을 낀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도훈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

“난 그냥 우리 여왕님 따라 하는 중이다. 부부는 일심동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됐네.”

“형수님을? 뭔데요, 형수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건 당사자는 모르는 게 좋거든요.”

“...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신경 쓰지 마세요.”

손까지 휘휘 저으며 얼버무리는 선아의 모습에 도훈이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상한데···.”

“수상할 것도 많네. 우리 마눌님이 신경끄라면 신경 꺼, 인마. 그나저나 한잔 더?”

“......”

도훈이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영배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이었다.

“왜?”

“... 옆에 형네 여왕님 표정을 보고 그런 얘기 해라.”

“... 헙!”

눈매가 심상찮은 선아의 얼굴을 본 영배가 기겁했다.

술이 들어가면 ‘한잔 더’를 습관적으로 말하던 그였기에, 옆에 와이프가 있는 상태에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러고 말았던 것.

“한잔 더? 오빠 미쳤구나? 애들이 기다리고 있을 게 뻔한 데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하하. 그, 그게 말이지. 그,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렇지.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아빠라는 사람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아들내미 딸내미가 아빠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든 말든, 아무 생각 없이 가서 밤새 술이나 마셔라, 응?”

“... 쩝. 잘못했어.”

“어휴, 못 살아!”

영배를 다그치는 선아의 모습에 도훈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았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진압’당하는 게 좀 불쌍하긴 했지만, ‘한 잔 더’ 습관을 고치는 게 영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기에 도훈은 모른 척 구경만 했다.

얼마간 영배를 다그친 선아가 도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가요, 도훈 씨.”

“네. 가시죠, 형수님.”

도훈이 선아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고 풀죽은 영배가 뒤따랐다.

“... 기 많이 죽은 것 같아요?”

선아가 작은 소리로 묻자, 도훈이 고개를 뒤로 돌려 영배를 흘끔 하고는 답했다.

“조금요.”

“좀 심했나?”

“이 문제라면 좀 심해도 돼요. ‘한 잔 더’도 때와 장소, 상대를 가려야죠.”

선아와 도훈이 계속 작은 소리로 속삭이며 걸었다.

“사실, 오빠가 퇴근해도 애들 때문에 잘 못 쉬어요. 딸이고 아들이고 어쩜 그렇게 아빠만 찾는지 몰라요.”

“하하, 그래요?”

“네. 요즘 애들은 엄마보다 아빠가 먼저라는 말을 맨날 실감한다니까요. 한 녀석은 제가 보려고 해도, 어찌나 아빠만 찾는지.”

“잘됐네요. 애들 형한테 더 많이 맡기세요.”

“에이, 솔직히 힘들기로 따지면 오빠가 훨씬 더한데 그렇게까지 할 수는 없죠.”

두런두런 대화하며 걷고 있는데, 갑자기 영배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깜짝이야!”

“... 왜?”

선아와 도훈이 바라보자 영배가 도훈을 향해 게슴츠레한 눈빛을 보내며 쏘아붙였다.

“이분은 내 마누라님이시다.”

“... 누가 아니래?”

“훠이훠이, 저리 가.”

“... 참, 나···.”

도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잃었고, 영배가 얼른 선아와 팔짱을 끼고 걸음을 서둘렀다.

새침한 표정이던 선아도 마지 못한 척 따라 걷더니 영배에게 말을 걸었다.

“또 그럴래?”

“아니요.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요.”

“진짜지?”

“응. 맹세한다. ‘한 잔 더’라고 말하기 전에 꼭 애들 얼굴부터 생각할게.”

“흠, 믿어도 되려나?”

“당연하지!”

영배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은 선아가 도훈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얼른 와요, 도훈 씨.”

몇 걸음 뒤처져 걸으며 둘의 대화를 다 들은 도훈이 피식 웃고는 중얼거렸다.

“... 천생연분이다. 진짜···.”

“당연하지, 인마!”

도훈의 중얼거림을 들은 영배가 으스대듯 말했고, 선아가 싱긋 웃고는 중얼거렸다.

“누구 천생연분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오빠. 얼른 가자.”

셋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업무용 핸드폰을 뽑아 드니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응?”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이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고 기분 좋게 귀가하는 와중에 절대 받고 싶지 않은 내용의 메시지였기에.

- 윤민준입니다. 오늘 시장님과 만났던 결과를 보고드렸더니 우리 부대표님이 김 시장님을 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불쑥 찾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월요일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주중 바쁘지 않으신 날로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윤민준과의 다시 만나는 건 전혀 내키지 않았다.

‘이사’라는 윤민준도 그런데, 그보다 높은 부대표라는 사람은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은 도훈이었다.

보나 마나 더 정치인에 가깝거나 정치판에 더 발을 깊이 담근 인물일 테니까.

“전화 오면 제대로 거절해야겠군.”

도훈이 낮에 만났을 때보다 좀 더 단호하게 거절하고 선을 그어야겠다고 마음먹는데, 저만치 앞에서 영배가 불렀다.

“야, 우리 여왕님이 커피 사신단다. 얼른 와!”

“지금 가.”

핸드폰을 품에 집어넣은 도훈이 걸음을 서둘렀다.

다음 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될 건 상상도 못 한 채로.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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