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어느 주말 - 2.
“아이고, 그럼 아버님이 시장님이랑 동생분을 홀로 키우셨단 말씀이세요?”
“네. 그러셨습니다.”
“아이고, 어쩜!”
안타까워하는 전경완의 부인에게 도훈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많이 도와드렸죠. 사실, 동생이 걷기 전에는 제가 거의 항상 업고 다녔거든요.”
“그러셔야 했겠네요.”
“업는 것, 씻기는 것, 분유 먹이고 트림시키는 것, 기저귀 가는 것에 심지어 이유식 만드는 법까지 배웠죠. 아버지가 가르치신 게 아니고, 제가 아버지가 동생 돌보는 걸 옆에서 보고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 착한 아이셨네요.”
“착해서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고요. 어떻게든 아버지를 도와드려야겠다는 생각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착한 거죠!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어쩜!”
몇 번 말로만 들었던 전경완의 부인은 다른 건 몰라도 리액션, 즉 도훈의 말에 대한 반응이 아주 풍부했다.
그녀가 우울증을 앓았고 지금도 전경완이 그런 아내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재미있는 얘기를 귀담아듣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우울하거나 소심한 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듣기로는 50대라고 들었는데, 아주 건강한 몸매와 얼굴을 갖고 있어 40대라고 말해도 믿을 정도랄까?
“전 갑자기 시장이 되셨다고 들어서 조금은 별난 분일 거로 생각했는데, 너무 바르게 자란 ‘엄친아’셨네요.”
“엄친아는 아닙니다. 별난 것도 맞고요. 별나지 않았으면 제가 지금 시장을 하고 있지 않겠죠.”
“호호, 그건 그렇죠.”
활달하게 도훈과 대화하는 부인과 달리 전경완은 담담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부시장이 된 지 몇 달이 됐고 그간 도훈과 손발을 잘 맞추고 야근도 여러 번 함께 하며 친분이 생겼지만, 이런 도훈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개인사에 관한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정보’로 전해 듣는 것과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로 듣는 건 아무래도 감흥이 다른 때문인지 도훈을 향한 전경완의 눈이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도훈의 옆에 앉은 민세경은 마치 나라의 운명을 좌우할 극비정보를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도훈의 말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그럼 그 동생분은 뭐 하세요, 지금?”
“지난가을에 대학 졸업했고 운 좋게 바로 취직해서 지금 직장인입니다.”
“남매가 정말 바르게 자랐네요. 아버님이 좋아하셨겠어요.”
“... 그렇죠, 뭐.”
그 직장이 방송국이라는 걸 도연이가 고백하는 현장에 도훈은 없었기에 아버지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잘 몰랐다.
다만, 동생 도연이에게 ‘열심히 해라’고 말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화가 나셨든 어쨌든 혼자 속으로 삭일 정도였다는 게 다행이랄까.
“아버님은 퇴직하셨겠네요?”
“네. 지금은 시골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십니다.”
“아, 유유자적. 듣기만 해도 좋네요. 호호, 저희도 얼마 안 남았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께서 퇴직 이후를 많이 기대하시나 봅니다?”
“네. 그때가 되면 막내도 대학에 가니까 저희 부부 모두 좀 여유가 생길 테니까요.”
전경완의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반짝반짝 눈까지 빛냈기에 도훈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나중에 부시장님 정말 퇴직하면 뭘 할 것인가 리스트 같은 걸 만들어 보세요. 저희 아버지는 퇴직하시고 두어 달 방바닥만 긁으시더니 갑자기 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산에 다니시더라고요.”
“산이요?”
“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 온갖 생각이 다 든다고 먼저 머리를 비워야겠다고 산을 찾으시더군요.”
“호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 남편도 체력은 좀 되니까 산도 나쁘지 않겠어요.”
부인의 말에 전경완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체력은 어떨지 몰라도 실제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에 비해, 부인은 몸매부터 얼굴까지 아주 건강해 보였다.
“사모님 건강이 좋아 보이시니까 부시장님만 관리 잘하면 두 분이 즐겁게 지내실 수 있겠습니다. 부시장 일이 좀 덜 힘드셔야 할 텐데, 제가 죄송합니다.”
“어머, 그러지 마세요. 이 양반 건강은 제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요. 일은 열심히 해야죠.”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다 다시 도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전경완의 부인은 별 뜻 없이 묻는 것 같은데, 가만히 듣기만 하는 민세경은 도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아주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냈다.
“무슨 운동 같은 거 하셨어요? 아까 보니까 몸도 아주 좋으시던데요.”
“어렸을 때 아버지 성화로 검도를 좀 한 적 있습니다만, 예전에 관뒀죠. 그거 말고는 최근까지 탁구를 좀 쳤죠. 동호회 활동도 했고요. 시장 되고 나서는 바빠서 못 갔습니다만.”
멈칫.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전경완이 굳어졌고, 눈을 빛내며 경청하던 민세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전경완의 부인이 말없이 아주 강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왜 그러십니까?”
모두가 갑자기 말문을 잃은 영문을 모른 도훈이 묻자, 전경완의 부인이 더 강렬하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탁구 오래 하셨어요?”
“3년 좀 넘었습니다.”
“오! 실력이 좀 되시겠네요.”
“... 그냥저냥···.”
도훈이 말을 잇지 못한 건 대답을 하면 할수록 전경완 부인의 눈빛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온화하고 부드럽던 눈빛이 돌변해 마치 정복할 산을 눈앞에 둔 전문 산악등반가의 것처럼 투지에 불탄다고나 할까?
“... 왜, 왜 그러십니까, 사모님?”
움찔한 도훈을 향해 전경완과 민세경이 어느덧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전경완의 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랑 탁구 한 게임 하지 않으실래요, 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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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정도 뒤, 대흥시청 청사 옆 체육관 탁구장.
따악!
도훈의 스매싱이 탁구대 끝부분에 맞고 큰 각을 그리며 휘어졌다.
보는 사람이나 때린 도훈이나 웬만하면 받지 못할 거라 여겼지만, 상대는 재빠르게 이동해 끝내 공을 받아냈다.
툭.
따악!
다시 한 번, 도훈의 스매싱이 탁구대의 거의 같은 위치에 꽂혔다.
스핀을 조절해 꺾이는 각이 작아진 건 상대의 실수를 노린 의도적인 것이었지만, 상대는 다시 여유 있게 공을 받아냈다.
툭.
이번에는 도훈이 옆으로 크게 몸을 움직여 포핸드가 아닌 백핸드로 스매싱을 날렸다.
따악!
도훈의 몸이 크게 젖혀지며 머리와 이마에 맺혔던 땀이 방울져 흩날렸고, 그보다 빠르게 공이 탁구대에 처박혔다.
치는 방향이 달라지니 당연히 공이 날아가는 곳도 달라졌다.
상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움직이지 못했고, 그렇게 승패가 결정이 났다.
“13 대 11. 게임 셋!”
“나이스!”
“와우! 김 시장, 오래간만에 나왔어도 실력은 그대로네?”
“우리 시장님, 오래간만에 실력발휘 했네!”
심판의 콜에 이어 지켜보던 동호회원들이 말했고, 한숨을 내쉰 도훈이 탁구대 너머의 상대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잘 쳤습니다.”
몇 달 만에 탁구라켓을 잡은 도훈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는데, 아깝게 패한 상대는 땀이 나긴 했어도 도훈만큼 많이 나질 않았다.
이기긴 했지만, 운동량에서 도훈이 상대보다 훨씬 더 많이 뛰어야 했다는 증거였다.
“대단하시네요, 시장님. 저 펜홀더에 지는 거 정말 오래간만이에요.”
“사모님이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제가 오래간만에 치는 거긴 하지만, 한 게임에 이렇게 땀을 흘린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 나거든요.”
“호호, 제가 좀 하죠. 그래도 졌잖아요.”
“사모님 장비가 아니잖아요. 남의 라켓 빌려서 하시지 않고 사모님 장비로 했더라면 졌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아쉽네요.”
“하하하.”
전경완의 부인이 정말 아쉽다는 듯한 표정을 했고, 도훈은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부인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전경완과 민세경이 만류했지만, 전경완의 부인은 계속 도훈과 탁구 경기를 하고 싶어 했다.
도훈이 응하고 체육관으로 함께 이동해 동호회 회원의 유니폼과 라켓을 빌렸다.
가볍게 한 게임 하려던 도훈이었지만, 막상 공을 주고받아보니 전경완 부인의 실력은 보통이 넘었다.
알고 봤더니, 그녀는 우울증 극복을 위해 계속 운동을 해왔고 그 종목이 바로 탁구였다.
경력이 10년이 훨씬 넘었기에 그녀의 실력은 생활체육인 중에서는 상중의 상에 속할 정도로 뛰어났다.
지금도 몸이 날래지만, 나이가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동호회 회원 중 ‘고수’에 속하는 도훈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 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적당히 하고 말았을 건데.’
오래간만에 나타난 도훈이었기에 회원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고, 도훈에게 살살 봐주며 하지 말라고 장난스럽게 야유했다.
결국, 회원들에게 등 떠밀린 도훈은 ‘진지하게’ 게임에 임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지 않았더라면 게임은 진즉에 전경완 부인의 승리로 끝났을 터.
“부시장님 사모님도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그러게요. 우리 회원 중에 상대할 사람이 몇 안 되겠어요.”
“시장님이 고수, 부시장님 사모님도 고수니 이거 우리 동호회 목에 힘 좀 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하하.”
동호회 회원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네 사람은 체육관을 나섰다.
“시장님 운동도 잘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오래 하다 보니 이 정도가 된 것뿐입니다. 저보다 잘하는 분도 많아요.”
“에이, 아까 동호회 분들이 오대 천왕 어쩌고 하는 얘기 다 들었어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란 뜻이잖아요.”
“하하. 그분들이 과장하신 겁니다.”
“직접 보니까 맞던데요, 뭐.”
순심이를 안고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민세경은 마치 눈에서 하트를 뿜어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도훈의 지적인 부분이야 얘기도 많이 들었고 직접 본 것도 있지만, 땀까지 뻘뻘 흘리는 활동적인 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랄까?
“졌으니 약속대로 저녁은 제가 사겠어요, 시장님. 뭐 드시고 싶으세요?”
“다음에 사세요.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기는 내기인 걸요.”
전경완의 부인은 그냥 ‘게임’은 재미가 없다며 저녁밥 사기 내기를 제안했고, 도훈은 이를 받아들였었다.
어쩌다 보니 이기긴 했지만, 굳이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부인이 자기가 사겠다고 고집했다.
“음, 혹시 중화요리 좋아하십니까?”
“네. 1주일에 한 번은 먹을 정도로요.”
“그렇다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아, 중국관 말씀이십니까?”
“네.”
전경완이 끼어들었고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씻고 옷도 갈아입을 겸, 30분 뒤에 중국관에서 뵐까요?”
“그러시죠. 이따가 뵙겠습니다.”
“네.”
도훈이 순심이를 데리고 차에 올라 자리를 떴다.
민세경이 멀어지는 도훈의 차를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는데, 전경완의 부인이 다가와 속삭였다.
“아주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구나.”
“숙모도 참, 아니에요.”
“아니긴 뭘. 보면 다 알아. 내가 눈치가 빠르잖아.”
부인이 전경완의 눈치를 보며 부인하는 민세경의 옆구리를 콕 찌르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보니 좋은 사람인 것 같다. 내가 분위기 적당히 잡아줄 테니 잘해봐.”
“......”
“뭘 빼고 그러니? 너나 김 시장이나 솔로에 적령기인 사람들인데.”
“... 아. 그만 하세요, 숙모.”
“훗. 어쨌든, 좋을 때다. 얼른 가자. 씻고 가려면 시간 없어.”
“... 네.”
숙모의 뒤를 따르는 민세경이 뭔가 결심한 표정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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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완의 오피스텔에서 부인이 얼른 씻는 사이, 민세경은 거울 앞에 붙어 앉아 열심히 화장을 고쳤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너무 튀지 않고 은은한 느낌이 나는 것이 혼자 했지만 정말 화장이 잘 됐다고 느낄 정도였다.
‘... 이 정도면 좀 눈길을 주시려나? 오늘은 뭔가 좀 진전이 있어야 하는데···. 아니지. 우연에 기댈 게 아니라 진전을 이뤄내야지.’
단단히 마음먹은 민세경과 전경완 부부가 중국관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상큼하게 미소 지은 민세경이 홀을 두리번거렸지만, 도훈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등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 안녕하세요, 부시장님.”
“아, 조 비서관.”
등을 보이고 앉았던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가 전경완을 알아보고 벌떡 일어섰다.
도훈의 비서인 영배가 와이프와 함께 탕수육에 짬뽕, 소주를 시켜놓고 저녁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부인이신가?”
“네. 인사해, 여보. 우리 부시장님이셔.”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아, 이쪽은 제 아냅니다.”
“아이고, 몰라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아, 민 과장님도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비서관님.”
영배의 일행과 민세경의 일행이 어지러이 인사를 하는 가운데, 민세경은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었다.
혹여 합석이라도 하게 되면, 도훈에게 집중할 기회가 줄어들건 당연하니까.
‘합석하면 안 돼. 얼른 따로 자리를···.’
민세경이 따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하며 숙모와 시선을 교환했다.
전경완의 부인도 같은 생각인지 빠르게 공감의 눈빛이 오가던 순간, 문이 열리고 손님 하나가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카운터 직원과 인사한 도훈이 영배 부부와 전경완 일행이 함께 있는 걸 보고 멈칫한 순간.
“괜찮으면 조 비서관과 합석할까요, 시장님?”
“저야 괜찮습니다만···.”
전경완이 도훈에게 묻자, 도훈이 전경완의 부인을 향해 시선을 줬다.
“... 호호. 합석하시죠, 뭐. 동고동락하는 사이인데요.”
어느새 태연하게 웃는 숙모를 보며 민세경이 낭패한 표정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속으로 절규했다.
‘... 망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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