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홧김에 시장 되다-88화 (89/279)

88. 어느 주말 - 1.

예결특위가 끝나고 토요일 오후, 도훈이 순심이를 데리고 시청을 찾았다.

“어, 시장님? 설마 오늘도 나오신 겁니까?”

“아뇨. 뭘 좀 가지러 왔습니다. 당직이세요?”

“네.”

“고생 많습니다.”

“하하, 천만의 말씀입니다.”

직원과 인사한 도훈이 3층에 올라가 비서실을 통해 자기 사무실에 들어섰다.

목요일, 예결특위를 무사히 마치고 수정된 예산안이 본회의에 넘겨졌다.

도훈도 도훈이지만, 비서실 식구들도 지난주부터 도훈 못지않게 긴장하고 야근을 계속했기에 이번 주말은 아무런 일정을 잡지 않았다.

원래는 도훈도 웬만하면 사무실에 나올 생각이 없었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책상 서랍을 열며 중얼거리던 도훈이 안을 보고 쓰게 웃었다.

항상 개인용, 업무용 2개의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그였는데, 어제 개인용 핸드폰을 서랍에 넣어 놓고 일을 보다 깜빡 잊고 그대로 퇴근했던 것.

“긴장이 풀리긴 풀렸어.”

예결특위 일로 바짝 긴장했다가 풀려서 그런지 처음 하는 실수였다.

오늘 느지막하게 일어나 아버지께 전화하려다 뒤늦게 핸드폰이 없는 걸 알았을 정도.

“... 어디 보자, 뭐가 왔···. 응?”

부재중 전화가 오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메시지가 한 통 와 있었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도훈의 아버지.

“아까는 아무 말 안 하셨는데···.”

업무용 핸드폰으로 아버지와 잠깐 통화했는데, 아버지는 의례 통화할 때마다 묻는 안부와 일 잘하고 있냐는 말에는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 누가 너 좀 만나게 해달라고 했는데 거절했더니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문자 메시지 한 통만 넣어달라고 부탁해서 메시지 보낸다. 윤민준이라는 친구가 너 찾아갈 것 같은데, 그 사람 내 경찰 선배 아들이다. 그런 줄 알아.

“... 윤민준?”

어제저녁에 온 메시지를 확인한 도훈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도훈의 아버지가 이런 용건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기에 선배라는 분과의 친분이 두터울 거라는 건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도훈이 알기로 아버지가 친분을 유지하는 옛 동료, 선후배 중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은 기억에 없었다.

어쨌든, 누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데 아버지 선배 아들이라는 거 말고 전혀 정보가 없어 좀 생뚱맞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오면 오는 거겠지.”

중요한 일이라면 용건을 언급하지 않을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도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핸드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이 청사를 나와 차 문을 열려고 키를 꺼내는데 업무용 핸드폰이 울렸다.

“김도훈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 시장님.

“... 누구십니까?”

- 아, 예. 저는 윤민준이라고 합니다. 혹시 제 이름 들으셨는지···.

“아, 네. 아버지 선배님 아드님이라고 아버지가 메시지를 주셨더군요.”

- 아, 그러셨군요.

조심스럽던 남자의 목소리가 급격히 밝아졌지만, 도훈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어떤 일로 연락하셨죠?”

- 아, 그게 잠깐 만나 뵙고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혹시 지금 대흥시에 와 계신 겁니까?”

- 네. 좀 전에 도착했습니다.

“... 용건은요?”

- 하하, 미래지향적인 용건이라고 우선 말씀드리죠. 돈 빌려달라거나 보증 서달라거나 이런 건 절대 아닙니다.

“......”

상대가 농담을 던졌지만, 도훈은 웃지 않았다.

발치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순심이를 잠시 바라보던 도훈이 마지 못해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밖에 나와 있긴 한데, 오랜 시간은 못 드립니다.”

- 괜찮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그럼, 운계면 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있는 카페에서 뵙죠.”

집 인근의 카페를 알려준 도훈이 순심이를 태우고 차에 올랐다.

약속장소로 차를 모는 도훈의 얼굴에는 기대감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

도훈이 약속장소로 잡은 카페는 인근에서 유일하게 반려동물의 출입을 허락하는 곳이었다.

마침, 순심이를 데리고 나온 터라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도훈은 곧 상대와 마주 앉게 됐다.

“윤민준입니다.”

“네, 김도훈입니다.”

윤민준은 도훈보다 10살 정도 많아 보이는 인상 좋은 남자였다.

원래 인상이 좋은 데다가 부드러운 미소까지 머금고 있고 아버지 선배의 아들이라는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도훈은 윤민준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건 그가 내민 명함 때문인데, 도훈은 명함에 ‘CUS 정책연구소 연구이사’라고 적힌 걸 놓치지 않았다.

윤민준이라는 남자는 스스로 정치인이거나 최소한 정치권과 관련된 일을 하는 듯했다.

“CUS 정책연구소에서 일하신다고요?”

“네.”

“저는 들어본 적이 없는 곳인데···.”

“그러실 테죠. 다만, 정치인들에게는 제법 알려진 곳입니다.”

“아, 네.”

시장이 된 이후에도 정치에 관심 없고 전에는 더욱 그랬던 도훈이었기에 몰랐지만, CUS 정책연구소는 여당과 공식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현재의 여권, 정확하게는 여권의 일부 세력과 가까운 곳이었다.

“그나저나 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하하, 바로 본론이십니까? 아버님을 많이 닮았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봅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하하, 네. 제 용건은 이걸 전해드리는 겁니다.”

윤민준은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고, 봉투 안에서 서류를 꺼낸 도훈이 의아한 표정이 됐다.

“... 회원가입 제안서요?”

“네. 우리 연구소에서 운영하는 정책연구 및 공유 포럼에 가입하시는 건 어떤가 하고요.”

도훈이 말없이 서류를 읽었고 윤민준이 설명을 이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연구소는 여당의 유력 싱크탱크 중 하나입니다. 연구소 차원에서 포럼을 여럿 운영하고 있는데요. 회원 중 대표적인 분들은···.”

윤민준이 몇몇 정치인들의 이름을 언급했다.

대부분 재선 이상의 경력을 가진 의원들로, 지난 대통령 선거 전에 현 대통령과 이념, 정책 지향이 가까우냐 가깝지 않냐를 놓고 나눌 때 후자에 속했던 이들이었다.

여당의 지난 당 대표 선거에 패배한 중진을 지원하기도 했던 이들.

다시 말해, 정확하게는 여권 중에서도 중도를 표방하는 이들로, 여권 내부만을 분석하자면 개혁적 색채가 강한 현재의 주류와는 좀 견해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 윤민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입하시는 걸 한번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저희 회원 중 여럿이 김 시장님과 함께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윤민준의 말에, 도훈이 서류를 덮으며 답했다.

“글쎄요. 지금으로선 별로 가입할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윤민준은 살짝 얼굴이 굳어졌다가 얼른 폈다.

아마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곧바로 거절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책 자료나 연구 논문 같은 건 대환영입니다만, 포럼 회원이라는 명목으로 정치권 인사들과 친분을 갖는 것이 꺼려집니다.”

도훈의 말에 윤민준이 접대성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강정문 도지사님이나 김용진 의원 같은 분들과 꽤 친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긴 하죠. 거기에 대흥시 시의회 의장인 민의당 소속 안준식 시의원과도 꽤 친하고, 민의당 소속 충남 지역 기초단체장 몇 분과도 안면을 익혔습니다. 모두 공적인 관계에서 출발한 거죠. 물론, 개인적으로 친해지기도 했지만요.”

“흐음,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윤민준에게 도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다르죠, 엄연히.”

“... 어떻게 말입니까?”

“공적인 관계는 제가 선택할 여지가 적지만, 이 경우는 다르잖습니까?”

“흠, 완전히 틀린 말씀은 아니군요.”

고개를 주억거리고 난 윤민준이 말을 이었다.

“혹시 제 제안이 시장님께 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 연구소 제법 실력 있기로 유명합니다. 저희가 정기적으로 내는 보고서는 여권 관계자치고 안 찾는 사람이 없거든요. 당연히 포럼에서 논의되는 내용도 생산적이고 수준이 높죠. 그런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분들이니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도 크고요. 당연히 회원들이 서로 도움도 많이 주고받습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윤민준은 도훈에게 자기네 연구소나 포럼, 그 회원이 귀중하다거나 ‘가치 있는’ 이들임을 이해시키려는 듯했다.

애초에 도훈이 귀중하고 아니고 가치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게 아니라는 걸 짐작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

‘... 당신 얘기가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발 들이라는 거라서 싫다는 거라고.’

담담한 표정이지만 속으로는 조금 짜증이 나고 있던 도훈이 중얼거렸고, 윤민준은 그런 도훈의 속내도 모른 채 가입 제안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를 도훈에게 계속 역설했다.

“이런 기회 흔치 않습니다. 이 포럼, 외부에서 가입 신청을 해도 회원의 찬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건 정말 시장님께 좋은 기회···.”

‘열변’을 토하는 윤민준의 모습에 도훈의 미간이 아주 조금씩 찌푸려지고 있는데, 전혀 예상 못 한 누군가가 도훈을 구해줬다.

“시장님?”

테이블 곁으로 다가와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윤민준은 말을 멈췄고, 도훈이 ‘이때다.’ 싶은 심정으로 끼어든 사람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시장님.”

“여긴 웬일이십니까?”

“손님 좀 만나려고요. 그런데 부시장님은 댁에 안 가셨어요?”

전경완 부시장은 아이들 학교 때문에 가족 모두가 이사하지 않고 아직 시청 앞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었다.

“아, 이번 주는 와이프가 이리로 왔습니다. 커피 한 잔 마시려고 카페에 들렸는데, 시장님이 계셔서요.”

“아, 그래요? 잘됐네요. 이 기회에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도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문 윤민준을 향해 말을 이었다.

“죄송한데, 이만 일어서야겠습니다. 미리 시간 많이 할애 못 한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러셨었죠.”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당장에는 가입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 헛수고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좀 더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아뇨. 달라질 것 같지 않네요.”

그렇게 도훈이 만남을 정리하고 일어서려는데, 윤민준이 예상 못 한 말을 했다.

“이번 예산안 처리하시면서 좀 고생하셨다고요?”

“... 조금은요.”

“시 단위에서도 그러는데 전국 단위에서는 어떻겠습니까?”

“... 훨씬 힘들고 어렵겠죠.”

“그래서 연대가 필요한 겁니다.”

“......”

“우리 연구소와 포럼은 그런 연대를 위해 노력하는 거고 말이죠.”

“... 네.”

“제 알기로 예산안 지키느라 의원들을 제각기 공략하셨던데, 연대의 힘이 더해지면 굳이 그런 비생산적인 일에 발목 잡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가요?”

살짝 놀랐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도훈에게 윤민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쇼. 찻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옆 의자에 누웠던 순심이가 폴딱 일어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저만치 자리한 전경완 부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도훈의 등에 윤민준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

“아이고, 예뻐라! 얘들 좀 봐요, 여보!”

“보고 있어요.”

“사진 좀 찍어주세요!”

“원, 사람도···.”

전경완과 그의 부인이 저만치서 귀찮다는 듯 피해 다니는 순심이와 그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자기네 강아지를 향해 관심을 집중하고 있을 때. 도훈은 테이블에 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 도훈의 눈치를 보던 누군가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시장님. 저는 혹시나 싶어서···.”

“아뇨. 세경 씨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좀 곤혹스러웠거든요.”

도훈과 마주 앉은 건 다름 아닌 민세경.

운전을 못 하는 전경완의 부인과 함께 왔다는 그녀를 도훈은 오래간만에 만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전경완이 도훈을 발견한 게 아니고 민세경이 먼저 도훈을 알아봤단다.

“시장님 표정도 표정이지만, 상대가 저도 아는 사람이라서···.”

“그 사람을 아세요?”

“정치 컨설턴트잖아요? 무슨 정책연구소에서 일한다는 것 같던데.”

“컨설턴트는 모르겠고, 정책연구소에서 일하는 건 맞는 것 같더군요.”

민세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전에 그 사람이 정문 오빠 만나러 왔었거든요. 만나고 나서 도지사님이 불쾌해하시던 게 생각나서···.”

“......”

도훈이 말문을 잃은 건 민세경이 언급한 강정문에 대한 두 번의 언급 중 앞선 것 때문.

“... 왜 그러세요?”

“... 방금 도지사님을 뭐라고?”

“도지사님을 뭐요?”

“......”

자신이 실수한 걸 깨닫지 못한 민세경이 눈을 말똥거렸고, 도훈은 그 부분에 더는 집중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도지사님이 불쾌해하셨다고요?”

“자세한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그런 적이 있어요. 꽤 크게 화를 내셨었죠.”

“... 화까지 내셨다고요?”

“네.”

도훈의 미간이 슬그머니 찌푸려지는데, 민세경이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고 말을 이었다.

“저야 전후 사정은 잘 모르는데, 이 말씀은 꼭 드리고 싶네요.”

“어떤···?”

“도지사님이 그러셨어요. 쇠심줄보다 더 끈질긴 사람이라고요.”

“......”

“분명 시장님께도 그렇게 나올 것 같은데···.”

민세경이 말끝을 흐렸고, 도훈이 윤민준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또 뵙겠습니다.

또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상대가 했던 그 말이 자꾸만 도훈의 신경을 긁었다.

생각에 빠진 도훈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지는 가운데, 민세경이 도훈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 90


0